“스위스 아미 나이프와 앤 캐서린만 있다면 모든 게 가능했다.”
높은 담장을 넘어 각종 진귀한 작품을 훔치는 괴도 뤼팽은 사실 소설 속에서만 존재하는 인물은 아니다. 스테판 브라이트비저는 1994년부터 2001년까지 7년 여 동안 유럽 전역에서 200여 회에 걸쳐 300점 이상의 예술 작품을 훔쳤다. 그가 도둑질 한 예술품의 금전적 가치는 2조 여원. 가히 ‘실사판 괴도 뤼팽’이라 할만 하다.
논픽션 작가 마이클 핀클은 그의 신작 ‘예술 도둑’을 통해 브라이트비저가 왜 예술품을 그렇게 많이 훔치게 됐는지 알고자 그의 삶을 추적한다. 브라이트비저와 주변 사람에 대한 인터뷰, 사건 기록, 재판 현장 등 광범위한 취재를 토대로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이야기를 짜임새 있게 풀어냈다.
저서에 따르면 브라이트비저는 우리가 상상하듯 높은 담장을 뛰어넘고 첨단 방범시설을 무력화시키는 ‘대도(大盜) 스타일’의 도둑은 아니었다. 유럽 곳곳에 있는 소규모의, 방범이 허술한 박물관에서 작품을 주로 훔쳤다. 그의 연인인 앤 캐서린이 망을 보면 스위스 아미 나이프로 작품을 덮고 있는 플렉시글라스(유리처럼 투명한 합성수지)의 고정 나사를 풀어 작품을 빼내고는 뒷문으로 유유히 사라지는 식이다.
그의 범행 동기는 사실 평범하진 않다. 그는 소위 작품을 감상하려면 소파나 안락의자에 몸을 기대고 원한다면 술도 한 모금 마시며 느긋하게 즐겨야 하는데, 현행 박물관 시스템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선택받은 자’인 그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좀 더 향유하기 위해 작품을 훔쳤다. 그에게 박물관은 ‘예술의 감옥’ 같은 존재이고, 작품을 그곳에서 꺼내온(?) 자신은 ‘예술 해방자’라고 자처한다.
실제로 그는 범죄 대상을 선정할 때 남이 매기는 작품의 가치보다 자신이 그 작품을 보고 얼마나 감동했는지를 더 따졌다. 이와 함께 아무리 마음에 드는 작품이라도 그 박물관에서 가장 가치있는 작품은 남겨뒀으며, 작품 훼손이나 절도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또 훔쳐온 작품은 내다 팔지 않고 자신이 살고 있는 어머니의 다락방에 전시해 놓고 매일 보고 쓰다듬었다.
저자는 그가 한 범죄의 원인을 주변 사람들로부터 찾았다. 우선 그의 연인 앤 캐서린은 스무 살 동갑내기로 만나 예술혼을 일깨워주는 뮤즈처럼 그에게 예술에 대한 사랑이 소유로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신을 줬다. 앤 캐서린은 브라이트비저만큼 예술작품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만, 모험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1994년 늦은 봄 16세기 곡물창고를 개조한 박물관에서 수발총에 눈독을 들이던 그에게 “그렇게 해. 가져가자”라고 말한 것도 앤 캐서린이었다.
늘 지나치게 허용적이었던 어머니 미레유 스텐겔과 그의 외조부모, 그가 10대일 때 아내와 이혼하면서 아들이 사랑한 골동품까지 모두 가져간 아버지 롤랑 브라이트비저 역시 그의 절도 행각의 원인 제공자였다. 브라이트비저의 첫 절도 대상이 아버지의 총과 비슷한 수발총이었고, 범행 동기도 아버지에게 대한 복수심이 일부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예술 전문기자 노스는 “(그의 주변에) 부모 역할을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며 “‘도둑질을 멈춰라’, ‘어른답게 행동해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점이 브라이트비저의 문제”라고 꼬집었다.
신소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