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편 119.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비극에 절여진 총명했던 황제

사랑한 아내 죽자 통제 잃었다

핏줄·측근까지 의심하고 처형

결국 아들·며느리·왕손까지…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4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일리야 레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일부), 1885, 캔버스에 유채, 199.5x254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후계자 아들을…때려 죽였다

내가 죽으면 황후에 오를 여자가 어찌 저러고 다니는가!

1581년, 11월의 어느 날. 루스 차르국(러시아) 황제 이반 4세는 며느리 엘레나 쉐레메테바를 보고 격노했다. 꼬장꼬장한 이반 4세는 그녀의 차림새를 용서할 수 없었다. 곧 황후가 될 황태자비, 심지어 임신까지 한 그녀의 옷이 너무 야하다고 본 것이었다. 막 황실의 주요 행사가 열릴 터였다. 국내외 굵직한 인사가 모일 참이었다.

그런 자리에 온 여자가 저렇게 얇은 옷을…?

망상증이 도진 이반 4세는 이를 황제와 황실에 대한 도발 행위로 보기 시작했다. 자신의 화병을 돋우기 위해 저따위 천 조각을 두른 게 아닐까 하는 의심도 생겼다. 그뿐인가. 이날 참석하는 모두가 저 여자는 물론, 나와 내 아들까지 천박하게 볼 것이다. 내가 평생 쌓아올린 황실 권위가 추락하고, 어쩌면… 이를 빌미로 반란까지 생길 수도 있지 않겠는가. 이반 4세는 어그러진 생각에 사로잡혔다. 의심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는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저 경솔한 여자를 응징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법의학적으로 복원한 이반 4세의 얼굴상 [By Shakko - 자작, CC BY-SA 3.0]

이반 4세는 씩씩대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속내가 들켜 긴장하는 건가? 이반 4세는 이 모습 또한 제멋대로 해석했다. 이반 4세는 예를 갖추려는 그녀를 곧장 발로 차버렸다. 쓰러진 채 신음하는데도 마구 짓밟았다. 그녀는 겨우 목숨을 건질 수 있었지만, 뱃속 생명까지는 구하지 못했다. 유산이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는 이반 4세의 망상과 달리 조금의 흑심도 없었다.

임신 후 몸에 열이 많아져 그런 옷을 입은 것이었다. 그녀 입장에선 난데없이 봉변을 당한 셈이었다.

"아버지. 제발 좀, 그만 제멋대로 사세요!"

악보(惡報)를 전해들은 황태자 이반이 이반 4세를 찾아가 악을 썼다. 하지만 아들 앞에 선 이반 4세는 어떤 사과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여전히 얇은 옷을 입은 며느리가 잘못했고, 아이를 지키지 못한 일 또한 며느리의 잘못으로 생각했다. "저는…. 아버지를 저주할 겁니다." 황태자 이반이 맹세하듯 말했다. "저주?" 이반 4세의 표정이 또 일그러졌다. "내가 널 후계자로 삼고 얼마나 아꼈는데, 고작 한다는 말이 저주란 말이냐?" 그의 분노가 또 폭발했다. 이번에도 눈에는 보이는 게 없었다. 그는 쇠지팡이로 아들을 마구 내리쳤다. 정수리와 가슴, 허벅지… 손이 가는대로 크게 휘둘렀다.

"미쳤어. 정말 미쳤…."

황태자 이반은 갑자기 목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다.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은 탓이었다. "아, 아버지…." 황태자 이반은 튀어나온 생선처럼 경련을 일으켰다. 팔다리가 기괴하게 휘는가 싶더니, 그대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어라? 그는 그제야 자기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갑자기 목구멍에서 쇠 맛이 났다. 힘이 풀린 그는 더는 서 있지 못했다. 기어가듯 다가간 그는 힘 빠진 아들의 머리를 잡고, 목을 세우고, 팔을 들어올렸다. 아들을 때려잡고, 며느리를 죽기 직전까지 폭행하고, 뱃속 손주까지 없애버린… 망령 든 폭군. 그는 현실로 돌아왔다. 이제야, 이제서야.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일리야 레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일부), 1885, 캔버스에 유채, 199.5x254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일리야 레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 1885, 캔버스에 유채, 199.5x254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일리야 레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스케치)

일리야 레핀은 그림 〈이반 4세와 그의 아들〉을 통해 당시 상황을 묘사했다.

이반 4세의 두 눈이 모든 걸 말해준다. 사백안이 된 눈동자가 보이는 감정은 공포와 절망, 좌절과 죄책감뿐이다. 그는 한 손으로 아들을 끌어안고, 또 다른 손으로 아들 머리에서 쏟아지는 피를 막고 있다. 그의 입은 보이지 않지만, 머리털 한 올과 핏줄 한 가닥까지 비명을 내지르는 것처럼 보인다. 그저 어둡기만 한 옷, 여윈 몸과 쏙 들어간 볼, 송곳처럼 뾰족한 지팡이는 이반 4세가 그간 얼마나 예민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하게끔 한다. 존재 자체가 공포스러웠기에 황제 아닌 뇌제(雷帝·the Terrible)라고도 불린 사람, 이반 4세. 그런데, 그도 처음부터 이렇게까지 끔찍한 이는 아니었다.

의심과 불안에 절여지다

이반 4세를 아주 어릴 적부터 봐왔던 이들은, 그가 이처럼 답도 없는 늙은이가 될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이반 4세는 1530년 모스크바 대공국의 대공 바실리 3세와 그의 계비(두 번째 아내) 엘레나 글린스카야 밑에서 장남으로 출생했다. 아버지는 말과 글을 빠르게 익힌 이반 4세를 무척 아꼈다. 법과 제도를 갈고 닦을 학자형 지도자가 나왔다고 본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가 패혈증으로 갑작스럽게 죽은 후부터 이반 4세는 사랑둥이가 되지 못했다. 그는 벌써 암투와 음모, 배신과 협잡의 세계에 발을 담가야 했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H. 웨이겔, 이반 4세, 16세기경

이반 4세는 고작 세 살 나이로 대공 지위를 이어받았다.

어린 나이에 뭘 할 수 있겠는가. 자리에 오르자마자 궁중은 권모술수의 장으로 변했다. 어머니가 섭정(攝政·군주가 직접 통치할 수 없을 때 그를 대신해 다스리는 행위)을 맡았다. 이반 4세는 곧 그런 어머니와 죽은 아버지의 형제, 즉 삼촌 사이 권력 다툼을 봐야 했다. 어머니가 이들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장면 또한 목도해야 했다.

그리고 얼마 안 돼 이반 4세는 어머니와 보야르(최고위 귀족)들의 국정 주도권 싸움도 봐야 했다.

어머니도 그렇지만 귀족들은 더더욱 간사하고, 주도면밀하고, 앞뒤가 달랐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죽었다. 가장 먼저 돈 소문은, 귀족 무리가 그녀를 독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이때 이반 4세는 고작 여덟 살이었다. 벌써 피비린내에 절여진 이반 4세는 맹세했다. 힘을 기를 것. 잔인해질 것. 또…. 항상 모든 일을 의심할 것. 광기의 씨앗은 이때부터 움틀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쥔 귀족 일당이 이반 4세를 살려둔 이유는 단순했다. 무언가 꼬였을 때 희생양으로 둘 얼굴마담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귀족들은 저들끼리 있을 때는 이반 4세를 길거리 꼬마처럼 대했다. 얼굴을 비춰야 할 행사가 없는 날 이반 4세는 첨탑에 갇혀있어야 했다.

영민한 이반 4세는 매 순간 정신을 붙잡고 있었다.

이반 4세는 열세 살 나이였던 1543년 12월에 생을 걸고 일을 벌였다. 결전의 날, 이반 4세는 궁 곳곳에 몇 안 되는 시종을 숨겼다. 그런 다음 형식상 대공이 참여해야 하는 연말 회의장에 들어섰다. 귀족들은 역시나 그를 본체만체하고 싸움이나 하고 있었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미하일 네스테로프, 이반 4세를 찾아온 교회 사절, 1884

"목소리를 낮추세요."

이반 4세가 입을 열었다. 당시 귀족 중에서도 실세였던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런 뒤 다시 목소리를 높여 상스러운 말을 쏟아냈다. 이반 4세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서 안드레이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대공을 깔보고 무시했습니다. 그렇지요?" "하! 오늘따라 왜 그러십니까?" "고로, 제가 대공의 자격으로 여기 있는 모든 이에게 명령합니다. 반역자인 이 사람을 죽이십시오." 이반 4세의 목소리가 회의장에서 선명히 울렸다. "제 말이 들리지 않으십니까? 그러면 시종을 시키지요. 저는 정당한 권한을 행사하는 겁니다." 이 상황을 기다렸다는 듯 숨어있던 시종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왔다. 이들은 얼어버린 안드레이를 끌고갔다. 그러고는, 굶주린 사냥개가 있는 우리로 걷어차버렸다.

"그래서…. 회의 안건이 무엇이었지요?"

이반 4세가 다시 말을 꺼냈다. 밖에서는 맹견이 무언가를 으드득 씹어먹는 소리만 들렸다. 이반 4세가 이 일을 15살께, 회의 아닌 식사 중 벌였다는 말도 있다. 어쨌든 이반 4세는 이번 피바람으로 단박에 귀족들을 휘어잡을 수 있었다. 귀족들 입장에선 패착이었다. 이반 4세가 가진 고유 권한을 무시한 채, 그를 말 잘 듣는 노리개로만 보고 방심한 것이었다.

이반 4세는 이렇게 쥔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그는 탐욕스러운 최고위 귀족에게 불만이 큰 드보랸(지방 귀족)을 우군으로 만들었다. 그 사이 수완 좋은 상인층도 구슬렸다. 힘은 나날이 커졌다. 이반 4세는 1547년, 동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을 본떠 자신의 대관식도 치렀다. 그사이 정적과 반대파의 목은 착실히 날렸다. 이때가 열일곱 살이었다. 악마를 몰아내기 위해 악마가 된 사람. 이반 4세의 행보가 딱 이랬다.

뜻밖의 개혁군주

그렇게 키를 쥔 이반 4세가 통치는 잘했을까.

어릴 적부터 보고 당했기에 얻은 광기의 소용돌이, 뿌리 깊은 불안과 의심의 싹을 통제할 수 있었을까.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알렉산드르 리토브첸코, 영국 대사에게 자신의 보물을 보여주는 이반 4세(Ivan the Terrible shows his treasures to the English ambassador Horsey), 1875, 캔버스에 유채, 153x236cm, 러시아 박물관

의외로 가능했다.

이는 이반 4세가 초기에는 괜찮은 치세를 펼쳤다는 것을 뜻한다. 일단 그는 그간 행보로 증명했듯, 결단력과 추진력이 있었다. 그의 아내인 아나스타샤 로마노프나도 든든한 우군으로 나서줬다. 그녀는 이반 4세가 황제에 오른 후 결혼한 명문가 여인이었다. 수시로 발작하는 이 남자를 순한 양으로 둘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반 4세는 스스로를 개혁 군주로 칭했다.

이반 4세는 1550년에 젬스키 소보르(전국 회의)를 열었다. 러시아 역사상 첫 사례였다. 성직자와 지방 귀족, 상인과 수공업자 등 각계각층 대표가 나선 이 회의에서 국가 안건을 결정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최고위 귀족의 힘을 더욱 뺄 수 있었다. 이들을 향한 복수심에 따른 일이기도 했겠지만, 이반 4세가 전국 회의를 열면서 얻는 이점은 기대 이상이었다. 고여버린 최고위 귀족의 부정부패를 막고, 보다 입체적인 정책도 내놓을 수 있었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빅토르 바스네초프, 이반 4세(일부 확대), 1897, 캔버스에 유채, 247x132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빅토르 바스네초프, 이반 4세, 1897, 캔버스에 유채, 247x132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이반 4세는 정복 사업도 착실하게 이끌었다.

1552년에 카잔 한국(칸국), 1556년에는 아스트라 한국을 정복했다. 이를 통해 제국 영토를 대폭 확장했다. 빅토르 바스네초프가 위엄에 찬 이반 4세의 모습을 상상해 그렸다. 뚜렷한 이목구비는 쪼그라든 얼굴 틈에서도 존재감을 보인다. 째려보는 눈과 꽉 다문 입술, 화려한 문양의 금빛 털옷과 검은 지팡이에서는 황제로의 힘과 권력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 실제로 그가 1550년대에는 이렇게까지 늙지 않았겠지만, 어릴 적부터 이어진 비극과 신경증은 그의 몸 곳곳에 때 이른 주름살을 박았을 것이다. 국민은 나라 안팎에서 성과를 내는 그를 뇌제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 편일 때는 든든하고, 적일 때는 무서운 존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그는 곧 우리의 빛나는 군주에서, 우리에게도 벼락처럼 두려운 폭군으로 변한다.

폭주하기 시작하는 ‘뇌제’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바실리 푸키레프, 예배당에 있는 이반 4세, 1884

내 아내를 데려간 신은 잔인하고, 분별이 없었다. 앞으로는 나도 그렇게 하겠다.이반 4세, 아내 아나스타샤 로마노프나가 죽은 후

이반 4세의 울컥함을 다독일 수 있는 유일한 이, 언제나 현명한 조언을 건넨 최측근. 그랬던 그의 아내가 요절했다. 1560년, 고작 서른 살이었다. 이반 4세는 세상이 무너지는 고통을 겪었다. 왜 또 불행인가. 광기를 누르고 착실히 살았건만 또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건가. 이반 4세는 이때부터 자해를 한다. 정확히는 제 몸과 다름없다고 한 제국과 국민에게 고통을 가한다.

이제 이반 4세는 망상이 뒤룩뒤룩 살을 찌우도록 방치했다.

이반 4세는 그가 찍어누른 최고위 귀족의 잔당이 아내에게 독약을 먹였다고 믿었다. 이반 4세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귀족들을 대대적으로 척살하기 시작했다. 의심의 망은 계속 촘촘해졌다. 처형 명단에 그의 최측근과 추종자까지 올라올 지경까지 왔다.

살아남은 귀족들은 이 학살을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1564년, 이들이 모여 황제의 축출 방안을 의논하던 그때…. 이반 4세가 갑자기 사라졌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클라브디 레베데프, 이반 4세, 1916년경

이제는 편집증에 사로잡힌 미친 황제지만,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기민했다.

클라브디 레베데프가 그린 〈이반 4세〉에선 까다롭고,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모습의 이반 4세를 볼 수 있다. 그는 두통이 심한 듯 손으로 이마를 덮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도 두 눈만큼은 여전히 날카롭다. 그는 이런 눈빛으로 늘 갖은 수를 짜고, 이를 위해 포석을 깔았다. 귀족들의 작당모의를 눈치챈 이반 4세는 선수를 쳤다. 그는 모스크바에서 빠져나왔다. 몸을 옮긴 곳은 95㎞가량 떨어진 북쪽 마을, 알렉산드로프였다. 이반 4세는 모스크바로 편지 두 통을 썼다. 한 통은 귀족들이 나를 무시하는 통에 통치를 할 수 없다는 글이 쓰였다. 다른 한 통에는 민중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아낀다는 문장이 담겼다. 이 편지가 여론을 움직였다. 이반 4세는 피해자, 귀족 무리는 적폐이자 가해자로 낙인찍혔다. 이반 4세는 두 가지 조건과 함께 의기양양하게 돌아올 수 있었다. 첫째. 황제만이 반역자를 골라내고 처벌하는 권한을 갖는다. 둘째. 황제도 개인 영지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오프리치니나(Oprichnina) 제도를 도입한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니콜라이 네브레프, 오프리츠니크, 187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4x152cm

날개를 단 이반 4세의 숙청은 멈출 줄 몰랐다.

이제 이반 4세의 손발은 검은 제복 차림에 검은 말을 탄 이른바 '검은 기사단'이 맡았다. 말 안장에는 개 머리와 빗자루를 달고 다닌 이 부대의 이름은 오프리츠니크(Oprichnik)였다. 6000명 규모의 이들은 어느 순간부터 비밀경찰 역할을 자처했다. 누구든 황제를 욕하면 죽이고, 수상한 일을 하면 죽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죽이는 식이었다. 앞서 이반 4세는 오프리치니나 제도로 넓은 규모의 개인 토지를 가질 수 있었다. 그는 이 땅을 지켜야한다며 친위대를 꾸렸는데, 그게 바로 오프리츠니크였다. 즉, 모든 게 이반 4세의 노림수였다. 그가 무턱대고 개인 땅을 달라고 고집한 데는 이유가 있었다. 사실은 이를 통한 비밀경찰 창설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미하일 클로트, 이반 뇌제와 그가 죽인 희생자들의 그림자,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등, 27x39cm, 스타브로폴 미술관

수년간 진한 피 맛을 본 이반 4세는 예전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황제는 신에게 하사받은 노예를 자기 뜻대로 부릴 수 있다. 황제가 불의한 일을 행한다고 해도 이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중죄를 범하는 것이다. (…)" 폭주한 이반 4세는 이런 글도 썼다. 그가 나이를 먹을수록 그가 품은 광기의 씨앗 또한 더 깊이 뿌리를 내렸다. 미하일 클로트는 당시 이반 4세가 겪었을 편집증을 시각화했다. 이반 4세가 죽인 모든 이가 유령이 돼 그에게 찾아왔다. 병사와 성직자, 여성에 심지어 어린아이까지 그를 향해 손가락질한다. 머리를 감싼 이반 4세는 곧 소리 지르고, 발버둥 치고, 베개와 이불을 들고 마구 휘젓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저 혼자서는 강박과 환영을 이길 수 없다. 정신이 피폐해지고, 또 누군가를 의심하는 악순환이 이어졌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삶을 놓아버렸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뱌체슬라프 슈바르츠, 자신이 살해한 아들의 시신 곁에 있는 이반 뇌제, 1864, 캔버스에 유채, 71x89cm,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어쩌다 이런 일이…."

신하가 짐승 소리 같은 통곡을 듣고 달려왔다. 말문이 턱 막혔다. 공포에 질린 이반 4세, 피투성이가 돼 죽어가는 황태자, 나뒹구는 쇠지팡이…. 신하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곧장 짐작할 수 있었다. 신하는 황태자를 둘러업고 달렸다. 하지만 때는 늦었다. 황태자는 사흘 뒤 사망했다. 뱌체슬라프 슈바르츠가 이반 4세, 그리고 그의 만행으로 정신을 잃은 황태자를 함께 화폭에 담았다. 이반 4세는 바람 빠진 풍선 같다. 머리에 붕대를 두른 황태자는 막 사망 판정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반 4세는 추도문을 읽는 소리, 소문을 전해들은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넋이 나간 그가 느낄 수 있는 건 공허함밖에 없을 터였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일리야 레핀, 이반 4세와 그의 아들(두번째 버전), 1909, 캔버스에 유채, 71.5x125cm, 보로네시 미술관

이반 4세는 그 뒤로 모든 일에 흥미를 잃었다.

그러다 아들이 죽고 3년이 흐른 1584년, 그 또한 삶을 마감했다. 향년 쉰네 살이었다. 그의 생이 심상치 않았듯, 죽음을 놓고도 전설 같은 설이 있다. 죽기 얼마 전, 이반 4세는 점성술사를 불러 자기가 언제 죽을지를 물었다는 말이 있다. "올해 3월18일에 승하하실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이반 4세는, 그날 내가 죽지 않으면 너를 불구덩이에 넣겠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점성술사가 짚은 그날, 이반 4세는 갑자기 체스를 두겠다며 체스판을 가져오게 했다고 한다. 그가 말을 잡으려는 순간 발을 헛디뎌 거꾸러졌고, 그대로 숨졌다는 것이다. 이밖에 측근의 여동생을 겁탈하려다가 목이 졸려 죽었다는 식의 이야기도 있다. 방황하는 벼락은 그제야 잠잠해질 수 있었다.

“죽을 줄은 몰랐다”…친아들 때려잡은 ‘폭군’ 아빠, 참혹하고 황당한 사연[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이반 4세 편]
이반 빌리빈, 이반 4세의 죽음, 1935

일리야 레핀(1844~1930)러시아 역사상 최고 화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인물. 추구예프에서 태어나 핀란드의 쿠오칼라에서 사망했다. 당시 러시아 사회의 모습을 대담한 사실주의 화풍으로 그렸다. 인물 내면의 심리 묘사도 탁월했기에, 그 시절 왕족과 귀족 대부분이 그의 초상화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대표작은 〈아무도 기다리지 않았다〉, 〈볼가강의 배 끄는 인부들〉, 〈1901년 5월7일 국가 의회 100주년 기념 회의〉 등. 안톤 체호프는 "러시아사에 예술가 딱 셋을 꼽는다면 문학은 톨스토이, 음악은 차이콥스키, 미술은 레핀"이라는 말도 했다.

빅토르 바스네초프(1848~1926)로비얄촌에서 출생해 모스크바에서 사망한 러시아 화가. 러시아 신화와 역사, 민담의 결정적 장면을 화폭에 잘 녹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림뿐 아니라 건축과 디자인, 무대 장식 등에서도 출중한 재능을 보였다는 평을 받는다. 일리야 레핀과도 친한 사이였다. 대표작은 〈3용사〉, 〈야료누시카〉, 〈회색 늑대에 올라탄 이반 왕자〉 등. 빅토르 바스네초프, 그리고 그의 동생이자 화가 겸 미술 평론가였던 아폴리나리 바스네초프의 이름은 우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1978년 천문학자 루드밀라 주라블레바가 한 소행성을 찾았는데, 거기에 3586 바스네초프라는 이름을 붙인 것. 그만큼 바스네초프는 러시아 국민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참고자료〉

세계를 뒤흔든 광기의 권력자들, 김상운, 자음과모음

제왕열기, F.E.A.R. 들녘

명화로 읽는 러시아 로마노프 역사, 나카노 교코, 한경arte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