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편 120. 노예선]
인류의 흑역사 ‘삼각무역’
사냥감·화물된 같은 인간
돈 때문에, 바다에 버렸다
‘종호 학살’ 여파는 어땠나
편집자 주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2년 4개월 넘게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망망대해서 이뤄진 ‘학살’
종(Zong) 호 선장 루크 콜링우드는 이제야 배가 영 엉뚱한 곳에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노예 무역선 종 호는 아프리카 땅에서 잡은 원주민 442명을 꽉꽉 태운 후 닻을 올렸다. 갈 곳은 북아메리카 카리브해에 있는 자메이카였다. 사탕수수 농장 일꾼이 부족한 그 땅에서 이들을 명당 35~40파운드 값에 팔 요량이었다.
…이쯤이면 자메이카에 닿아야 하는데.
1781년, 11월29일. 돛을 펴고도 벌써 3개월이 흐른 때. 선장이 파이프 담배를 피우며 중얼거렸다. 그의 말이 맞았다. 제대로만 왔다면 최소한 그 땅이 보이기라도 해야 했다. 그러나 종 호는 지금도 망망대해에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뒤늦게 지도를 뜯어본 선장은 얼마 전 큰 실수가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종 호는 진작에 자메이카와 가까운 지점까지 갔었다. 너무도 잘 갔는데, 선장과 항해사가 그곳을 프랑스 식민지인 생도맹그(오늘날의 아이티 등 일부)로 착각해 지나친 것이었다. 종 호는 그렇게 자메이카를 지나친 채 다른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잘못된 걸 안 순간에는 이미 배가 자메이카와 480㎞가량 떨어진 곳에 있었다.
선장은 뒤늦게 뱃머리를 바로 잡았다.
그런데 하필 맞바람이 부는 쪽이었다. 이래선 열흘이 흘러도 도착을 장담하기 어려웠다. "며칠 치 물이 남아있는가?" "직전 정박지도 지나쳐버려서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아껴 마시면 사나흘 치 정도는 될 겁니다." 이대로면 위험하겠는데. 막내 선원 말을 들은 선장은 혼잣말을 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 말은, 저희가 노예들을 뭉텅이로 물에 버리자는 말입니까?"
"그렇게 하면 동난 식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소. 또…." 이날 오후 긴급회의를 연 선장은 그의 결심에 되묻는 선의(船醫) 등 몇몇 사람에게 대고 이렇게 받아쳤다. 괜히 주변 눈치를 또 살핀 선장은 목소리를 줄인 채 말을 이어갔다. "저 노예 놈들. 당신들도 알겠지만 물이 없으면 어차피 곧 저승행이오. 우리 입장에선 쟤들이 그냥 굶어죽으면 큰 손실이오. 그런데 그거 아시오? '배에 위기가 닥쳤을 때 한해, 노예를 바다에 던질 수밖에 없었다면 명당 보험금 30파운드씩을 청구할 수 있다.' 보험사와 한 계약이오." 그의 손에는 꼬깃꼬깃한 증서가 들려있었다. "지금 배는 항로를 한참 벗어났소. 식량도 넉넉지 않다고 하오. 우리가 살고, 나아가 고생한 만큼 돈까지 벌기 위해선 어쩔 수 없소." 선장은 조곤조곤 말했지만, 그의 눈에는 이미 광기만 가득했다. 돈 이야기에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이들의 한숨을 듣고 있던 선장이 꺼낸 다음 말은 간결했다. "병들거나 비쩍 마른 노예부터 던지는 것으로 하겠소."
그리고 바로 54명, 다음 날 42명, 그다음 날 36명….
공범이 되기로 한 선장과 선원은 132명 노예를 물속에 밀어넣었다. 반항하며 도망치는 녀석은 나무통에 쑤셔박은 뒤 걷어차버렸다.
윌리엄 터너, 노예선, 1840, 캔버스에 유채, 90.8x122.6cm, 보스턴 파인 아트 미술관
윌리엄 터너가 당시 벌어졌던, 이른바 '종 호 학살'을 상상해 그렸다. 제목은 〈노예선〉이다.
별 정보 없이 이 그림을 접하면 금빛 하늘과 바다가 잘 어우러진 풍경화 같다. 대담한 붓질, 과감한 색채는 그림 주제가 대자연의 힘 내지 석양 품은 바다의 절경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러나 그림의 오른편 밑을 보는 순간 싸늘한 느낌이 든다. 사슬을 찬 다리가 있다. 물에 빠진 노예다. 온갖 물고기와 새가 그 주변에 몰려있다. 배 갑판에서 걷어차인 노예는, 말 그대로 물고기 밥이 돼 잔혹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바다 위로 검은 무언가가 수십개나 쑥 튀어나와있다. 자세히 보니 이 또한 물살에 쓸려가는 노예의 팔이다. 깊고 짭짤한 물속에서 겨우 손만 내민 채 발버둥 치는 모습인 것이다. 노예를 한 움큼 걷어찬 종 호는 이들을 버려둔 채 파도를 힘껏 넘는다. 비로소 이 그림은, 마법이 풀린 듯 참혹한 역사화로 보이기 시작한다. 이제는 금빛 하늘도 핏빛 석양, 요동치는 파도도 죽음의 소용돌이 같다.
인간이 인간을…사냥하다
노예란 존재는 고대 시절부터 있었지만, 16~19세기 당시 유럽 주도의 삼각무역(triangular trade)이 성행했던 시절만큼 잔혹하게 다뤄진 적은 없었다.
먼저 유럽의 노예 상인이 무역선에 올라 아프리카로 온다. 상인은 일대 원주민을 붙잡아 배에 싣는다. 이들을 잔뜩 태운 배를 끌고 이번에는 아메리카 땅을 밟는다. 그다음, 아프리카 원주민을 사탕수수 농장 등 일대 현장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식이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은 자연스럽게 아프리카로 무기(사냥용품 등)와 생필품을 팔았다. 아프리카는 원치 않게 아메리카로 노예를 수출했다. 아메리카는 이들(강제로 노예가 된 아프리카인들)이 일해 얻은 설탕 등을 유럽에 다시 수출했다.
유럽에서 아프리카, 그다음 아메리카. 또 유럽.
주고받는 흐름이 삼각형을 그린다고 해 붙은 말이 삼각무역이었다. 이는 앞서 15세기에 소위 유럽 내 대항해시대가 열린 결과였다. 유럽인이 비슷한 시기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찾고, 이 땅을 제 이익에 맞게 주무른 결과 빚어진 흑역사였다.
그 시절 유럽 노예 상인은 아프리카인을 사냥감으로만 봤다.
1745년생으로 열한 살 무렵 아프리카 고향에서 '사냥' 당한 올라우다 에퀴아노의 증언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평범했던 어느 날, 그와 여동생은 웬 남자 둘과 여자 하나에게 덮쳐져 손발이 묶였다. 둘은 밧줄에 이끌려 걷고, 또 걸었다. 며칠이 흘렀을까. 배와 바다가 보였다. 갑자기 낯선 이들이 몰려왔다. 이들은 남매의 몸 곳곳을 주물럭거렸다.
프랑스 화가 장 레옹 제롬의 그림 〈노예시장〉에서 이런 절차가 노골적으로 이뤄지고 있는 장면을 볼 수 있다. 고대 시대부터 노예 판매자와 구매자는 노예의 건강을 최우선으로 신경 썼다. 특히나 눈, 이, 피부, 관절 등을 꼼꼼하게 살폈다. '등급'을 따지는 절차였다. 이가 흔들거리거나, 피부에 종기가 있다면 가치가 크게 떨어지는 식이었다. 잡혀 온 남매는 자기 몸을 더듬는 이들 틈에서 그제야 주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둘처럼 포박된 이가 바글댄다는 걸 뒤늦게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1만개의 나라를 갖고 있다면, 이를 다 내주고서라도 (차라리)내 나라의 가장 천한 노예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에퀴아노의 회상이었다.
노예 상인은 악랄했다.
토끼 잡듯 사냥개를 풀고, 길목마다 덫과 함정을 파놓는 건 흔한 일이었다. 강도와 방화, 폭행과 성폭력 등 범죄도 일삼았다. 일대 문화와 지리를 아는 아프리카인을 끌어들여 전문 사냥꾼으로 키우기도 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눈물을 흘리는 ‘인간 화물탑’
한가운데 있는 남성 둘이 바닥에 누워있는 노예를 살펴본다.
상태가 심상치 않은 듯, 노예의 입을 벌려 안쪽을 보는 남자가 옆 사내의 팔을 잡고 있다. 중절모를 쓴, 귀찮다는 표정으로 다리를 뻗은 채 앉아 있는 그가 이번 원정단의 실세일 게 분명하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이 노예는 '불량품'이 돼 버려질 것이다. 그런가 하면, 초록색 줄무늬 옷을 입은 남성은 또 다른 흑인 노예에게 바코드 새기듯 불도장을 찍고 있다. 프랑수아 오귀스트 비아르의 그림, 〈노예무역〉이다.
종호 선장 콜링우드와 선원들 또한 갖은 방법으로 아프리카 원주민을 마구 잡았다.
그런 다음부터는 비아르의 그림 장면처럼 이들을 철저히 짐으로 취급했다. 붙잡히기 전이 사냥감이었다면, 붙잡힌 후에는 내다 팔아야 할 상품으로 보는 식이었다. 이들은 은유나 비유가 아닌, 정말로 화물(貨物) 이상의 대우를 받지 못했다.
종 호는 짐(붙잡은 아프리카 원주민, 즉 노예)의 등급 분류를 마친 후 닻을 올렸다.
그런 뒤, 삼각무역 흐름에 맞춰 사탕수수 농장이 잔뜩 깔린 아메리카로 가는 중이었다.
그렇다면 영문도 모른 채 노예 낙인까지 찍힌 아프리카인들은 배 안에서 어떻게 살았을까.
무역선이 돈을 아끼기 위해 가장 먼저 하는 조치는 일단 많이 싣는 것이다. 채울 수 있을 때까지 가득 채워 한 번이라도 덜 오가는 것이다. 노예 상인도 그런 마음이었다. 사냥해 붙잡은 화물, 노예 무리를 갑판 아래 가득 밀어넣었다. 이들을 맨 끝 모서리에서부터 한 명씩 강제로 눕혔다.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빼곡해지면 그 위로 한 명씩 새롭게 또 얹었다. 겹겹이 포갰다. 그러다보면 갑판에는 노예로 층층이 만들어진 높고 넓은 인간 화물탑이 생겼다. 신음하는 탑, 눈물이 흐르는 탑, 배설물을 흘리는 탑…. 그것은 기괴하고, 참담한 광경이었다.
수백명 인간이 벗어놓은 양말 더미처럼 진득하고, 축축하게 엉켜있다.
촛불을 들고 가면 불이 꺼질 만큼 산소가 부족하다. 옥수수알뿐인 배설물이지만, 그게 바닥에 계속 고이니 밑층부터 똥독이 오른다. 이질, 홍역, 천연두와 같이 병이 돌 수밖에 없었다. 선장 콜링우드와 선원들은 그런 지옥통에 있는 노예를 가끔 갑판 위로 끌고왔다. 건강, 그러니까 이번에도 '품질'을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시켰다. 이 또한 채찍을 휘두르며 억지로 춤을 추도록 하는 게 다였다. 진작부터 신경써야 했을 해도(海圖)와 나침반은 밀어둔 채. 채찍 든 자들의 어이없는 실수로 종 호는 길을 잃었다. 끝내 더 어이없는 판단으로 132명 노예를 수장시켰다. 이것이 종 호 사건 전말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역사에 길이 남은 미친 짓을 벌인 대가를 치렀을까.
고작 그따위의 심판이라니
이들은 법정에 섰다. 나름의 심판도 받았다. 하지만 그 수위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판사, 국왕 직속의 법률 자문관마저도 이 자들을 '살인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심지어 이들이 먼저 소송을 걸었다는 점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종 호에 탔던 뱃사람들은, 보험사가 계약을 어기고 보험금을 주지 않는다며(!) 런던의 법원 문을 두드렸다. 우리는 식수 부족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예 132명을 바닷물에 밀어넣었다. 보험사는 이른바 '위기 보상' 계약상 우리가 내다버린 노예 한 명당 30파운드를 줘야하는데도 입을 닫고 있다는 게 이들 입장이었다. 이들 반대편에 선 보험사는 종 호가 우여곡절 끝 육지로 온 당시 배에 420갤런(약 1580리터)의 물이 있었다고 받아쳤다. 이는 300~400명이 열흘간은 마실 수 있는 양이었다고 항변했다. 이런 가운데, 1심 재판부는 뱃사람들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고 봐 이들 편에 섰다. 그렇게 1차전은 끝을 맺었다. 마실 물이 정말 없어서 노예를 내다버린 건가. 그저 보험금을 타 내기 위해 노예를 수장시킨 건가. 재판부가 주목한 건 이 지점이었다. 노예 몇 명이 물에 빠졌고, 이들이 어떻게 죽었고, 숨통이 끊어지기 전 무슨 절규를 했는지 등에는 별 관심을 보이질 않았다.
보험사의 항소로 열린 2차전도 분위기는 비슷했다.
외려 이번에는 선장과 선원의 착각(혹은 고의적 누락)이 있었고, 사실은 학살 당시에도 식수가 충분했었다는 정황만 더욱 설득력을 얻었다. 노예 입장에선 비극성만 더해지는 건이었다. 2심은 보험사의 승소로 막을 내렸다. 오직 그뿐, 이번에도 노예 학살에 대한 책임은 거론되지 않았다. 일부 노예무역 반대론자들이 재판 중 뱃사람들을 살인죄로 고발할 움직임을 보이기는 했다. "(노예를 바다로 밀어넣은)이 사건은, 말을 바다에 집어던진 일과 똑같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당시 국왕 법률 자문관은 이렇게 호통쳤다는 설이 있다. 뱃사람들은 결국 보험금을 받지 못했다. 다만, 이들에 대한 심판은 그걸로 끝이었다. 작자 미상의 그림 〈사슬을 찬 노예〉를 보면, 이 결과에 따른 서글픔과 허무함은 더욱 깊어진다. 앳된 흑인이 목에 사슬을 달고 있다. 이제는 모든 걸 포기한 듯 늘어진 그가 보고 있는 건, 목과 같이 자기 팔목에도 걸려있는 사슬뿐이다. 나도 인간인데, 나도 하나의 인격체인데…. 그가 혼잣말이 들리는 듯도 하다.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
다행히도 종 호 학살이 이대로 묻히지 않았다.
당시 영국의 몇 없는 노예 해방론자였던 그랜빌 샤프(Granville Sharp)와 몇몇 작가가 이 어이없는 사건, 또 사건만큼 어이없는 재판 결과를 세상에 열심히 알렸다. 선을 넘어도 한참 넘은 이번 만행을 접한 여론은 그제야 노예제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인간이 같은 인간을 가축처럼 부리는 일. 이러한 노예제가 자연법(natural law)으로 보든, 종교 윤리로 보든 용인할 수 없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고 있었다.
종 호 학살이 있고서 10년이 흐른 1791년.
이번에는 영국 노예무역선 리커버리(Recovery) 호가 아프리카 원주민을 싣고 카리브해를 지나고 있었다. 선장 존 킴버는 그 또한 노예 '품질'을 관리하겠다며 이들을 갑판 위로 끌고왔다. 그런 뒤 강제로 옷을 벗기곤 춤을 추도록 했다. 어린 여자 노예 둘이 말을 듣지 않았는데, 킴버는 기강을 잡겠답시고 이들을 채찍으로 때려죽여 버렸다.
그런 킴버는 앞서 종 호 사례와 달리 살인죄로 기소돼 재판을 받았다.
드디어 유럽이 노예를 짐짝 내지 조랑말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본 격이었다. 킴버는 결국 무죄를 받긴 했다. 재판부가 노예들이 학대 아닌 질병으로 죽었다고 판단한 데 따른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노예를 죽였다는 일만으로 법정에 넘겨진 일 자체가 그간 없던 사례였다. 사법부가 예전과 달리 큰 관심을 두는 여론의 눈치를 본 결과였다. 영국 출신의 삽화가 겸 만화가 아이작 크뤽섕크가 책 속 삽화를 통해 문제의 장면을 그리기도 했다. 거꾸로 매달린 노예가 괴로운 듯 얼굴을 감싸고 있다. 채찍을 들고선 게슴츠레하게 웃고 있는 남성, 그가 킴버다. 킴버는 무죄를 받았지만, 그의 사례와 이 삽화는 노예 해방운동에 중요한 선전물로 쓰인다.
종 호 학살은 유력 종교 단체와 지식인의 양심을 흔드는 데도 상당한 역할도 했다.
1783년. 영국 퀘이커교도 273명은 하원에 노예무역 폐지 청원서를 제출했다. 1787년에는 런던 내 노예무역 폐지 협회도 공식 출범했다. 영국은 1807년에 들어서는 노예무역을 금지했다. 1833년에는 노예제 폐지법도 국회를 통과했다. 영국은 원래 압도적 국력으로 노예시장에서 큰 손을 자처했다. 그런 곳이 돌변하자 유럽의 이웃 국가들도 흐름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유럽 나라 대부분도 비슷한 시기 노예제를 철폐했다. 정의는 절뚝대면서도 기어코 자기가 있어야 할 곳으로 온 듯했다.
그런데, 다시 터너의 〈노예선〉을 보자.
터너는 이 그림을 1840년에 그렸다. 영국 내 노예제가 사라지고 이미 7년은 흐른 때에 이 작품을 내놓은 것이다. 그렇게 다시 종 호 학살 사건을 끌어올린 것이다.
대체 왜?
터너는 이 대작을 통해 인류에게 경고의 말을 던졌다. 먼저, 이젠 불법인 걸 알지만 여전히 몰래 노예무역을 하는 현재의 업자에게 대고 말했다. 이 참혹한 비극을 또 되풀이하려고 그따위 짓을 계속하는지를. 아울러 언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할지 모를 미래 세대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안겼다. 오직 물질만능주의에만 천착하면 어떤 재앙이 빚어질 수 있는지를. 터너의 〈노예선〉은 만들어진 그해 6월, 영국 왕립 박물관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보였다. 당시 런던에서 열린 세계 노예제도 반대 회의를 가장 명징하게 기념하는 예술품이었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각지에서 온 많은 이가 그림 앞에서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여 애도를 표했다고 한다.
윌리엄 터너(William Turner·1775~1851)영국의 국가대표 화가. 미술에 대해서만큼은 '불모지'로도 칭해질 만큼 상황이 좋지 않았던 영국이 낳은 몇 안 되는 스타급 예술가다. 이발사의 아들로 출생했지만, 일찍부터 회화에 재능을 보여 20대 때 이미 왕립 아카데미 정회원 자리에 올랐다. 풍경화와 역사화를 즐겨그린 그는 특히나 빛에 대한 묘사가 탁월했다. 이에 화풍으로는 낭만주의에 속하지만, 인상주의의 창시자 내지 선구자로 꼽히기도 한다. 대표작은 〈테메레르의 마지막 항해〉, 〈눈 폭풍, 알프스를 넘는 한니발과 그의 군대〉, 〈눈보라〉 등. 말년에는 스스로 고립을 택했다. 남몰래 이름을 바꾸는가 하면, 아예 죽은 사람처럼 은둔키도 했다. 그는 제자도, 후계자도 두지 않았다.
프랑수아 오귀스트 비아르(François Auguste Biard·1799~1882)프랑스 리옹 출신(추정)으로 모험가 성향이 강한 화가이자, 그 시절 노예무역에 반대하는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그는 꾸준히 새로운 곳을 견학했다. 프랑스에서 스페인, 이어 시리아, 그리스, 이집트를 돌았다. 그런 다음 브라질에 2년간 있으며 아마존강과 네그루강 등을 돌며 일대 원주민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북극권까지 가서 빙산을 그린 최초의 유럽 화가로도 추정되고 있다.
〈참고자료〉
노예선, 마커스 레디커, 갈무리
에퀴아노의 흥미로운 이야기, 올라우다 에퀴아노, 해례원
낙인찍힌 몸, 염운옥, 돌베개
Voyage of the Slave ship, May, Stephen J. McFarland & Company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