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이후 피의사실공표죄 기소 건수 ‘제로’
지난해 고(故) 이선균 씨 사망 이후 논의 재점화
22대 국회선 ‘피의사실공표금지법’ 특별법 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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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용경 기자] 지난 1995년부터 올해까지 지난 30년 동안 검찰에서 피의사실공표죄로 처리된 765건 중 기소된 사례가 단 한 건도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피의사실은 수사 주체인 검찰이나 경찰에 의해 수집·공표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검찰과 경찰이 스스로에 대한 수사를 하기 어렵다는 특성이 기소 건수가 한 건도 없는 이유로 지목된다. 정치권에선 지난해 12월 배우 고(故) 이선균 씨의 사망 사건을 계기로 피의사실공표 행위를 실효적으로 규제할 입법 논의가 진행중이다.
27일 헤럴드경제가 대검찰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형사 사건 통계 전산화가 시작된 지난 1995년부터 올해 7월까지 피의사실공표죄로 처리된 765건 중 기소된 사례는 0건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552건은 불기소 처분됐는데, 세부적으로는 ‘각하’ 264건, ‘혐의없음’ 222건, ‘죄가 안됨’ 47건, ‘공소권없음’ 11건, ‘기소유예’ 8건 등이다. 이 밖에도 ‘기소중지’ 5건, ‘참고인중지’ 13건, ‘기타’ 195건 등으로 집계됐다.
형법 제126조에 따르면 피의사실공표죄는 검찰과 경찰 그 밖에 범죄수사에 관한 직무를 수행하는 자 또는 이를 감독하거나 보조하는 자가 그 직무를 수행하면서 알게 된 피의사실을 기소 전에 공표한 경우 성립하며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에 처하게 된다.
그동안 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언론에 흘려 혐의가 확정되지 않은 피의자를 사실상 유죄로 예단하는 등 헌법상 인격권, 사생활 비밀 자유, 공정한 재판을 받을 권리 등을 침해한다는 비판은 계속돼 왔다. 특히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형법이 제정될 당시부터 규정돼 있었지만, 범행 주체와 수사 주체가 같다는 특성상 지금껏 단 한 건의 기소도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지난해 12월 마약 투약 혐의로 경찰 수사를 받던 배우 이선균 씨가 숨진 채 발견되면서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 문제가 다시금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판사 출신인 김승원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12월 수사기관의 피의사실공표 행위에 대해 ‘법원 금지명령’을 신설하는 형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했다. 해당 법안은 피의사실공표에 따른 피해를 입은 국민이 관할법원에 피의사실 공표 등의 금지를 청구하면 법원이 검사 의견을 청취한 뒤 금지명령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골자로 했다. 이를 위반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년 이하의 자격정지로 가중 처벌하는 내용이 규정됐다.
김 의원은 “피의사실공표죄가 실효적으로 작동하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는 국민의 알권리, 언론의 자유가 충돌하는 지점에서 사후적으로 수사기관의 공표행위에 대해 형벌을 부과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이라며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공표행위의 한계를 명확히 하는 한편 피의자, 피고인 등 사건관계인의 절차상 권리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형법 개정안 제안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이 법안은 올해 1월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으나 국회 임기 만료로 폐기됐다.
22대 국회가 개원한 뒤인 올해 6월에는 검사장 출신인 양부남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특별법인 피의사실공표금지법을 대표 발의했다. 형사 사건의 공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피의사실을 공표·유포·누설할 경우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년 이하의 자격정지를 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한다.
양 의원은 제안 이유에서 “수사기관이 형법에 반하는 피의사실공표의 예외규정을 행정규칙(경찰청 훈령·법무부 훈령·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훈령)으로 제정해 해당 규정에 따라 피의사실을 공표해 왔다”며 “이러한 수사기관의 자의적 규칙 제정의 문제를 해결하고 형법 취지에 따라 사건관계인의 기본권을 우선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피의사실공표를 전면 금지하고, 국민의 알권리와 생명 및 재산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피의사실 공개의 예외사유와 공개 범위를 법률로 규정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번 특별법은 국회 법사위에 상정돼 논의되고 있다. 향후 국회를 통과할 경우 피의사실공표의 예외 범위가 대폭 축소될 것으로 전망된다.
김희균 서울시립대 로스쿨 교수는 27일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피의사실공표 행위는 기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라면서도 “수사 현실에서 과연 피의사실공표죄를 형사 처벌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선 아직까지 회의적인 입장”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국회에서도 여러 형법 개정안이나 특별법을 통해 피의사실공표죄 규정에 대해 논의하고 있지만, 지금 당장 피의사실공표 때문에 국민 대다수가 피해를 보고 있거나 민생에 시급한 문제는 아니기 때문에 보다 학계와 법조계, 정치권을 중심으로 신중히 논의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외국에선 기본적으로 한국과 같이 피의사실공표 행위를 형사 처벌하는 규정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9년 7월 발간된 한국형사청잭연구원 연구보고서 ‘피의사실공표죄의 합리적 적용방안 연구(연구책임자 김재현)’에 따르면 미국, 일본, 독일 등 주요국에선 피의사실공표죄 규정이 없는 것으로 조사됐다. 미국은 연방법무부 차원의 매뉴얼을 통해 공표 및 공개할 정보가 무엇인지 적극적으로 규정하고 있고, 일본은 이 같은 공표행위가 명예훼손죄를 통해 처벌될 행위가 아니라는 점을 규정하고 있다. 독일도 재판상 비공개심리와 관련된 사실을 공표하는 행위를 처벌하는 규정을 두고 있지만, 한국의 피의사실공표죄와는 무관한 것으로 분석됐다.
연구진은 해당 보고서에서 “피의사실공표와 관련해 처벌 규정을 두고 있지 않은 것에 각 국가별로 동일한 배경이 존재한다고 볼 수는 없다”며 “다만 미국은 미연방 수정헌법상 표현의 자유 또는 언론의 자유에 대한 광범위하고 두터운 보호가 그 배경이라고 추정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 형법상 피의사실공표죄는 대단히 특이한 처벌규정이라고 봐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