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의 부인하고 있는 살인교사범, 이틀뒤 항소
살인교사 범행 배경…‘영등포 쪽방촌 재개발’
80대 고령 건물주 살인교사까지 나아간 비극
“상당히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범행” 중형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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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이용경 기자] 지적 장애가 있는 직원을 가스라이팅 해 80대 건물주를 살해하도록 교사한 40대 모텔 주인에게 1심에서 징역 27년의 중형이 선고됐다. 이 같은 범행의 배경에는 서울 영등포 쪽방촌 재개발 이권을 둘러싼 피해자와의 뿌리 깊은 갈등이 있었다.
▶죄를 인정하지도 뉘우치지도 않는 살인교사범
선고공판 당일인 지난 9일 서울남부지법 법정 안. 살인교사 등 혐의로 기소된 조모(44) 씨는 검은 정장을 입고 안경을 쓴 채 피고인석에 섰다. 조씨는 시종일관 침착함을 유지하는 듯 보였지만, ‘피고인에게 징역 27년을 선고한다’는 재판장의 말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조씨에게 징역 27년형이 선고되자 방청석에선 간간이 탄식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모텔을 운영해 온 조씨는 지난해 11월 서울 영등포구에 있는 한 빌딩 옥상에서 모텔 직원이던 지적장애인 김모(33) 씨에게 80대 건물주 유모 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도록 지시한 혐의로 기소됐다.
재판 과정에서 줄곧 자신의 범행을 부인하던 조씨는 1심 선고 이틀 뒤인 11일 곧바로 항소했다. 검찰은 15일 “자신을 가족처럼 신뢰하는 지적장애인을 교사해 고령의 피해자를 잔혹하게 살해했음에도 범행을 전면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았다”며 “유족들이 엄벌을 탄원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더 중한 처벌이 필요하다”며 항소했다.
▶살인교사 범행의 배경…영등포 쪽방촌 재개발 사업
법원 판결문 등에 따르면 조씨가 살인교사 범행을 저지르게 된 배경은 약 4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20년 1월 서울 영등포 공공주택지구, 이른바 ‘영등포 쪽방촌 재개발’ 사업이 발표된 이후로 조씨는 같은 해 4월부터 영등포 공공주택 주민대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유씨 소유 건물 바로 옆에서 모텔을 운영하던 조씨는 유씨가 소유한 주차장을 임대하면서 인연을 맺었다.
서울 영등포 일대에서 40년간 영향력을 행사해 온 유씨는 재개발 지역 내에서 308평 상당의 토지와 건물 등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조씨는 2021년 7월 유씨와 재개발 보상 관련 컨설팅 명목으로 계약을 체결하고 사업적으로도 밀접한 관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씨는 2022년 5월부터 재개발 사업 추진과 관련해 유씨 측과 관계가 나빠졌고, 특히 조합원 대토 보상과 재개발 조합장 선출에 관해 유씨가 자신에게 협조하지 않자 자신의 직원인 김씨로 하여금 유씨를 살해할 것을 결의한 것으로 검찰은 파악했다.
16일 헤럴드경제가 영등포 재개발 지역 일대를 탐문한 결과, 조씨는 재개발 관련 주민대책위원장 시절에도 열정을 갖고 일을 추진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대토 보상을 원활하게 추진하려는 조씨의 뜻과 달리 건물을 소유한 유씨가 건물 매도를 거절하자 계속해서 갈등이 누적, 악화돼 온 것으로 전해졌다.
현재 영등포 쪽방촌 재개발 사업은 아직 착수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다만 한국토지주택공사(LH) 관계자는 16일 헤럴드경제와 통화에서 “오는 10월께 조합원들에 보상과 관련한 안내가 나갈 예정”이라며 “11월부터는 구체적인 협의를 진행할 예정이며 차질 없이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80대 건물주 살인교사까지 나아간 비극
이처럼 쪽방촌 재개발 사업 관련해 유씨에게 앙심을 품은 조씨는 지능지수 47의 지적장애를 가진 직원 김씨에게 “유씨가 너를 욕했다”는 등의 거짓말로 이간질을 하고 유씨에 대한 강한 적대감을 갖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 조씨는 범행 현장의 폐쇄회로(CC)TV 방향을 돌려놓은 채 김씨가 유씨를 따라 올라가 살해하도록 한 뒤 김씨를 도피시킨 것으로도 전해졌다.
특히 검찰에 따르면, 조씨는 4년 전 김씨에게 일자리를 주면서 “나는 네 아빠로서, 네 형으로서 너를 위하는 사람”이라는 식으로 가스라이팅을 일삼고 노동력을 착취한 것으로도 조사됐다. 조씨는 또한 김씨가 모텔이 아닌 주차장에 있는 간이 시설물에서 살았는데도 모텔 숙박비 명목으로 김씨의 장애인 수급비까지 뜯어낸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김씨는 2020년 7월부터 약 3년 4개월 간 모텔과 주차장을 관리했지만, 아무런 임금도 받지 못한 것으로 조사됐다.
▶1심 “상당히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범행” 중형 선고
검찰은 지난달 살인교사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된 조씨에 대한 결심공판에서 징역 40년을 구형했다. 이에 대해 서울남부지법 형사15부(양환승 부장판사)는 지난 9일 조씨의 선고공판에서 징역 27년을 선고했다.
당시 재판부는 “피고인에게는 피해자를 없애고자 하는 감정적·경제적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며 “피고인에게 감정적으로 의지하고 손 쉽게 조종당하는 김씨의 상황 등 다양한 증거를 종합해 볼 때 피고인이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김씨에게 상당한 기간에 걸쳐 피해자에 대한 험담과 이간질을 통해 살해를 결의하게 한 점이 인정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이어 “피고인은 범행 결의 이후 증거를 인멸하고 가담한 사실도 인정된다”며 “지적장애가 있는 김씨에게 직·간접적으로 교사해 피해자를 살해하게 이르렀다”고 설명했다. 또 “피고인은 상당히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했다. 범행 도구를 숨기고 멋대로 CCTV를 꾸미는 등 범행 후 정황도 매우 좋지 않다”며 “수차례 거짓말을 했고 이 법정에서도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며 납득하기 어려운 주장을 지속했다”고 질타했다.
그러면서 “피고인의 범행으로 피해자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했고, 그 유족은 평생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입었다”며 “김씨의 지적장애를 악용해 모텔에서 일을 시키면서도 임금을 전혀 지급하지 않았고, 김씨의 얼마 되지 않는 장애인 수당 등을 월세 명목으로 편취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그러한 김씨를 이용해 본인의 이익을 위해 범행하도록 했다”며 양형 이유를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