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편 107. 수잔 발라동]
모델에서 화가로
<동행하는 작품>
자화상
아담과 이브
푸른 방
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화가의 꿈을 꾸게 된 모델 소녀
"어이, 딴생각은 그만하지 그래?"
쉰일곱 살의 노화가 퓌비 드 샤반이 열여섯 살 소녀 수잔 발라동에게 핀잔을 줬다. "내가 그리는 걸 왜 자꾸 흘깃 보고 그러는가? 모델이면 포즈를 잡는 데 더 신경을 쏟으면 좋겠군." "아…. 네! 그럴게요." 발라동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무너진 자세를 잡기 위해 턱을 다시 들었다. 그런 발라동은 또 얼마 안 돼 시선을 샤반 쪽에 두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샤반을 보지 않았다. 그가 하는 행동을 보고 있었다. 아하, 구도는 저렇게 잡고 명암은 저런 식으로 하면 되겠구나. 그녀가 머릿속으로 또 생각하는 순간…
"어이!"
샤반이 발라동에게 대고 소리쳤다. "발라동 양. 지금 집중을 못 하는 건가? 아니면 안 하는 건가?" 마음 상한 그가 또 호통을 쳤다. "자네, 요즘 좀 수상해. 오늘 그림 작업은 여기까지 할 테니 뒷정리나 해주게. 주방과 침실 청소도 잊지 말고." 샤반의 말에 발라동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프랑스가 누린 벨 에포크 시절, 화가의 모델이 그날 하녀 역할까지 도맡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작업실 청소를 마친 발라동은 설거지를 하고, 이어 샤반의 이부자리까지 펼쳤다. '나도 어쩌면….' 발라동은 그 많은 일을 하면서도 한 가지 생각만 했다. '나도 어쩌면,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을까.' 샤반의 의심이 맞았다. 그녀에겐 꿍꿍이가 있었다. 그것도 어리고, 가난하고, 가방끈도 짧은 당시 여성으로는 품기 힘든 마음을 품고 있었다. 화가의 꿈이었다. 그녀가 이젤 앞 모델로 서면서도 샤반의 작업을 곁눈질로 본 건 이 때문이었다.
수잔 발라동, '목욕하는 소녀', 1919, 캔버스에 유채, 몽마르트 미술관
"샤반 선생님. 저…."
얼마 후, 발라동은 모처럼 샤반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혹시 제가 그린 걸 봐주실 수 있을까요?" 발라동은 모델 일을 하는 틈틈이 그린 자화상 등 자기 그림을 샤반에게 건넸다. 이를 받아든 샤반은 잠깐 눈동자를 굴리는 듯했다. "…같아." "선생님. 뭐라고요?" 기대에 찬 발라동의 되물음에 샤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곤 더 큰 목소리로 말을 툭 뱉었다. "쓰레기 같은 그림이라고 했어."
발라동은 샤반의 이러한 악담을 잊지 못했다. 그나마 점잖다고 봐 마음을 줬던 샤반의 민낯을 본 후 망설임 없이 연을 끊었다. 발라동은 다시 거리에 섰다.
여러 화가의 화폭 앞에 서면서 밥벌이를 했다. 붉은 기가 도는 갈색 머리칼에 푸른 눈동자, 키는 약간 작지만 굴곡진 몸, 그리고 무엇보다도 요동치는 강한 생명력…. 발라동 분명 매력적이었다. 곧 모든 예술가의 뮤즈로 불릴 만큼 이름을 알렸다. 오귀스트 르누아르. 이제 막 사십대에 접어든 중절모의 화가도 그런 발라동을 찾은 이 중 한 명이었다. 발라동은 이제 르누아르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그녀는 르누아르의 〈부지발의 무도회〉에서 양 볼이 복숭앗빛으로 물든 채 춤추는 청초한 소녀로 등장했다. 〈우산〉 속 화폭에선 발끝까지 닿는 긴 치마를 들어올리고 걷는 정숙한 여인의 모습을 보였다. 과연 '행복을 그린 화가'라는 별명답게, 르누아르는 발라동을 봄날의 꽃망울처럼 아름답게 표현했다. 발라동은 어느덧 그런 르누아르에 대해 모델 이상의 연인 역할도 해내고 있었다.
하지만 둘의 인연도 짧았다.
르누아르 또한 발라동의 얼굴과 몸매에만 눈길을 줄 뿐이었다. 그녀는 그의 곁을 떠나야만 했다. 발라동은 또 골목길에 우두커니 섰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간 겪지 못한 몸의 변화를 느꼈다. 임신이었다. 그녀는 곧 열여덟 살 몸으로 출산을 경험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내 아들이 아니다." 샤반과 르누아르 등 그녀를 거친 남자 모두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사생아를 낳은 셈이었다.
발라동의 삶은 시작부터 이처럼 쉽지 않았다.
그래도 돈은 벌어야 했으니, 결국 또 모델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발라동은 이번만큼은 아무에게나 몸을 맡기기 싫었다. 자기 예술혼을 이해할 수 있는 이를 찾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유독 덩치가 작은 화가였다. 왜소한 몸에 비해 큼직한 손과 발, 여태 들어본 적 없는 고상한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이 사내의 정체는….
‘서커스 곡예’가 즐거웠지만…
"나는 소년처럼 행동하는 악동이었다."
언젠가 발라동은 자신의 유년 시절을 이렇게 되새겼다. 이 말이 딱 맞았다. 발라동은 1865년 프랑스의 한 시골에서 세탁부의 딸로 출생했다. 발라동 또한 훗날 그녀가 낳을 아들처럼 사생아로 세상 빛을 본 것이었다. 발라동은 어릴 적부터 아비 없는 자식이라며 손가락질 받았다. 그래서 그녀는 주로 혼자 놀았다. 가장 좋아한 건 상상 놀이였다. 석탄 등으로 그림을 그려 그녀만의 왕국을 창조한 후, 그 위에 꽃과 강아지 등을 그려 함께 떠들었다. 이게 외려 좋을 때도 많았다. 스케치북 위 세상에선 뭘 하든 내 마음이었다.
발라동의 어머니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파리로 집을 옮겼다.
동네 사람들의 뒷말을 잊고 새로운 삶을 살 생각이었다. 발라동은 여섯 살 때부터 그곳에서 세탁소 일을 거들었다. 그러다 돌연 수녀원이 운영하는 학교에 입학했다. 고요와 적막에 질린 그녀는 그곳에서 얼마 안 돼 벗어났고, 그때부터 재봉사와 웨이트리스, 공장 직원과 꽃가게 점원 등 여러 일을 했다. 발라동이 이 가운데 가장 좋아한 일은 서커스 곡예사였다. 하지만 발라동은 그 일조차 반년가량밖에 하지 못했다. 그녀는 공중제비를 돌다(혹은 말을 타다) 추락해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만약 내가 다치지 않았다면… 난 그곳을 결코 자진해서 떠날 일은 없었을 거야." 훗날 발라동의 회상이었다.
발라동은 이 무렵부터 화가의 모델로 나서기 시작했다.
친구의 권유로 하게 된 이 일이 생각보다 적성에 잘 맞았다. 발라동은 이미 생의 쓴맛을 다 봤다. 그렇기에 쾌활한 소녀부터 황혼기를 맞은 노인까지 모든 모습을 연출할 수 있었다. 발라동은 종종 몽마르트 언덕의 댄스장을 찾아 춤을 췄다. 술에 취하면 풍차 물랑 드 라 갈레트에 있는 난간을 미끄러져 내려오는 장난을 치며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발라동은 그러다 당시로도 이름값이 높던 샤반과 르누아르의 눈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화가로서 미래를 상상한 것이었다. 이 둘에게 그 꿈을 보였지만 무시당하고, 다시 거리로 나오게 됐지만.
로트레크와 드가의 ‘화가 수업’
툴루즈 로트레크.
그는 프랑스의 귀족, 이른바 '샤를마뉴 대제의 열두 동료' 중 하나의 혈통을 타고난 고귀한 자였다. 다만 근친혼의 결과로 허약함을 타고난 데다, 어릴 적 몇 번의 사고 후 키 성장이 멈춰버렸다. 나아가 지팡이가 없으면 제대로 설 수도 없을 만큼 후유증에 시달렸다. 이 탓에 아버지에게 내쳐진 그는 당시 파리 내 가장 비루한 곳, 몽마르트 언덕에 머물며 화가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 로트레크가 발라동에게 손을 내민 것이었다.
로트레크는 그녀를 모델로 그리는 한편 그림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발라동은 때마침 그해 〈자화상〉을 다 그렸다. 질끈 묶은 머리, 피하지 않고 응시하는 두 눈, 굳게 다문 입술과 강한 턱에서 결연한 의지를 엿볼 수 있는 작업물이었다. "화가의 길을 포기하지 말게." 발라동의 그림을 본 로트레크는 이렇게 당부했다.
로트레크는 발라동을 여성이 아닌 '인간'으로 그린 첫 화가기도 했다. 이는 로트레크가 발라동을 모델로 그린 〈숙취〉를 통해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는 다른 화가처럼 발라동을 요정처럼 그릴 생각이 없었다. 그저 남들처럼 숙취에 취해 멍하게 앉은, 보이는 모습 그대로를 표현했을 뿐이었다. 비슷한 시기 르누아르가 발라동을 불러 작업한 〈갈색 머리를 땋는 소녀〉와 견주면 둘의 시선 차이가 확연하다. "이건…. 정말 저군요." 〈숙취〉를 받아든 발라동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아름답지 않은 그림 또한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
발라동은 로트레크에게 남다른 예술관도 배울 수 있었다. '아름답지 않은 그림도 아름다울 수 있듯, 아름답지 않은 삶의 우리 둘 또한 함께라면….' 언젠가 발라동은 이런 마음으로 로트레크에게 청혼까지 했다. 나를 사람 대 사람으로 본 이는 그대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둘은 쓰라린 유년 시절, 가슴 깊이 박힌 결핍과 인정 욕구 등 묘하게 닮은 점이 많았다. "발라동 양. 그것만은 안 되는 일일세." 하지만 로트레크는 단호했다.로트레크는 생과 그림의 운명은 다르다고 본 것일까. 생에서는 불행과 불행이 뭉쳐본들 더 큰 비극밖에 태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까. 로트레크는 이 지점에 대해선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만, 로트레크는 예술과 관련해선 발라동에게 변함없이 선물을 듬뿍 줬다.
로트레크의 선물 중 가장 큰 건 에드가 드가와의 만남 주선이었다. 드가는 동시대 파리에서 가장 데생을 잘한 화가였다. 1890년대 초에 발라동을 본 드가는, 그녀의 드로잉을 보고 바로 재능을 인정했다. 사람, 특히나 '여자 사람'을 싫어한 것으로 정평이 난 드가가 발라동에게는 모질지 않았다. 곧 로트레크에 이어 미술 교사로 나선 드가는 발라동에게 선을 긋는 방식부터 꼼꼼히 가르쳤다. 자기 돈을 털어 그녀의 그림을 사주는가 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이어가시오"라는 식의 응원 편지도 종종 부쳤다.
급성장한 발라동은 1894년, 프랑스 국립예술학회 전시에 드로잉 다섯 점을 걸 수 있었다.
남성 아닌 여성 화가로는 처음이었다. 그 까칠한, 그 신랄한 드가가 어느덧 원숙해진 발라동의 작품을 보곤 이렇게 평가했다. "이제 수잔도 우리 중 하나가 됐군." 이는 발라동을 사연 많은 소녀의 세계, 철부지 미혼모의 세계, 객체(客體)였던 그림 모델의 세계에서 화가의 새로운 세상으로 끌어올려주는 말이었다. 발라동의 입장에선 또다시 코끝이 찡해지는 평가였다. 로트레크와 드가를 거친 발라동의 발전상은 1898년작 〈자화상〉을 통해 볼 수 있다. 초기 자화상과 비교하면 선이 대담해졌다. 머리칼과 얼굴 등에 더 능숙하게 명암을 표현했고, 이때 구사하는 색까지 한 단계 더 풍부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의식을 버린 표정에서 묻어나는 자신감, 이를 뒷받침하는 정열의 색채가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발라동은 이제 어딜 가도, 누구를 만나도 예술가였다.
언더독·아웃사이더…그러나
근대 여성 화가 중에서는 베르트 모리조와 메리 카사트가 특히 유명하다.
두 여성 또한 드가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에서 발라동과 비슷했다. 불굴의 열정, 한 번 붓을 쥐면 끝장을 보는 집요함도 닮은 면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발라동은 근본적으로 한 부류로 묶일 수 없었다. 모리조와 카사트는 모두 명문가의 자제였다. 이들과 비교할 때 사생아의 딸인 발라동은, 온실은 경험해보지도 못한 잡초 처지였다. 몇 안 되는 여류 화가의 그룹 중에서도 언더독 내지 아웃사이더 자리에 있어야 했다.
그런 발라동은, 이 부분을 자신의 차별점으로 삼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반열에 선 발라동은 누드화를 그리는 데 열중했다. 어떤 여성 화가보다, 나아가 당시 모든 남녀 예술가와 견줘도 밀리지 않는 밀도 높은 누드화를 탄생시켰다. 탐미(耽美)적 시선을 진작에 벗어던진 그녀의 누드화는 깊고 절절했다. 여성 겉모습이 아닌, 그 안에서 요동치는 삶과 고뇌를 표현한 덕이었다.
가령 〈목욕하는 소녀〉와 〈빨간 소파의 누드〉 속 여인은 자신이 어떻게 그려지는지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보인다.
그림은 환상적이지도, 매혹적이지도 않다. 삶의 밑바닥에서 퍼올린 듯한 현실감만이 가득하다. 모델로서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욕구, 화가로서 예쁘게 그리고 싶다는 욕망 모두 느껴지질 않는다. 누드화지만 골똘히 생각하게 되는, 살굿빛을 좇아 눈을 굴리기보다 외려 눈을 감고 사색하게끔 이끄는 그림이었다. 발라동 또한 붓을 든 화가 앞에서 나체의 모습을 한 적이 있었다. 화가들은 그녀의 우아한 곡선을 그리는 데 여념 없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당장 오늘 저녁에는 뭘 먹어야 할지를 고민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뇌하곤 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현실은 결코 아기자기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 경험을 녹여 이토록 사실적인 그림을 그린 것이었다. 이런 누드화를 그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발라동뿐이었다.
발라동은 이제 그림 앞에서 그랬듯, 사랑을 놓고도 주체(主體)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이제 복수라도 하듯 자신이 남성을 선택하는 삶을 살았다. 더는 남자가 자신을 택하고, 자신을 무시하고, 자신을 내치도록 놔두지 않았다. 음악가 에릭 사티가 발라동이 스쳐 간 남자 중 가장 유명해진 사내일 것이다. 1893년, 사티는 발라동을 본 순간 첫눈에 반했다. 자기 옆 방으로 발라동이 이사한 후부터는 서로가 서로의 운명일 것이라고 여겼다. "발라동의 몸, 사랑스러운 눈, 부드러운 손, 작은 발…." 사티는 열정적으로 편지를 썼다. 사티는 이 무렵 누구든 한 번은 들어봤을 곡 '난 그대를 원해요'를 작곡했다. 그러나 사티의 청혼을 발라동이 뿌리치며 관계는 끝을 맺었다. 고작 6개월 기간이었다.
발라동이 그 다음 고른 상대는 부유한 금융인 폴 무지였다.
이번에는 결혼도 했다. 1896년께 식을 올린 발라동은 그 덕에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전업 화가로 그림에만 매달릴 수 있었다. 무지는 배려심이 있는 사내였다. 같이 살 집을 두고도 오직 아내의 작업을 위해 또 아파트와 원룸을 빌릴 정도였다. 무지는 발라동이 그 몰래 자유분방한 연애를 이어가는 점 또한 짐작하고 있었지만 최대한 모른 척을 해주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히 그럴 수는 없었다. 특히나 당시 파리 예술계를 뒤흔든 '그 사건'을 보고선 더는 견디기 힘들었다. 참다못한 무지가 이혼 소송을 걸었다. 1910년이었다. 발라동은 사십대 중반, 결혼 생활도 무르익을 만큼 무르익을 때였다.
희대의 스캔들 주인공이 되다
"우리, 금기를 깨고 저질러버릴까?"
"아니, 그게…."
이브. 나체의 이 여인이 그녀처럼 벌거벗은 사내를 향해 신호를 주고 있다. 이브는 창조주가 절대 건들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쥐고 있다. 이제 살짝 힘을 주면 똑하고 떨어질 터였다. 아담. 그녀 옆에서 신호를 받고 있던 그가 이브의 손목을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이브를 말리는 듯하지만, 외려 그녀를 살살 부추기는 듯도 해보인다. 발라동이 이혼 직전에 완성한 작품, 〈아담과 이브〉였다. 발라동의 그림 속 이브는 당당하다. 반면 아담은 머릿속이 복잡한 모습이다. 알고는 싶은데 나서기는 싫은, 궁금하긴 한데 죄를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은 듯한 기색도 느낄 수 있다. 발라동의 이 그림은 내용과 노골적인 누드의 형식 등 모든 면이 파격적이었다. 파리 예술계가 크게 술렁였다. 공개 후 아담의 특정 신체 부위를 가리기 위한 풀잎을 덧그려야 할 만큼 외설 논란도 일었다. 발라동은 금기를 깨려는 당돌한 이브를 자신에 빗대 그렸다. 이브 뒤에서 망설이는 아담은 그녀가 여태 만난 상당수의 소심한 남성들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진짜 금기를 깨고 저질러버릴까? 너도 내가 그간 만난 사내들처럼, 나약하게 있을거야?"
당시 발라동은 이 그림을 통해 누군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 상대는 앙드레 우터. 그는 발라동이 낳은 아들의 친구였다. 발라동과 비교하면 스물한 살의 연하남이었다. 당시 발라동은 44세, 우터는 고작 23세였다. 둘 사이에는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녀의 삶도 이 이야기와 함께 말년으로 접어든다.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먼저 그 사람부터 언급해야 한다.
앞서 잠깐 등장한, 발라동이 열여덟 살 당시 낳은 아들. 사생아가 낳은 사생아, 모리스 위트릴로다. 발라동은 자기 아이를 대하는 데 서툴렀다. 알고 지낸 예술가의 성을 빌려 위트릴로라는 완전한 이름을 만들어줬지만, 그뿐이었다. 화혼에 젖은 발라동은 위트릴로를 사실상 방치하기 시작했다. 외할머니 손에서 큰 위트릴로는 어릴 적부터 술을 마셨고, 결국 알코올 중독자가 된 채 거리에서 방황했다. 발라동은 그제야 위트릴로에게 심리 치료법의 일환으로 그림을 가르쳤다. 그 엄마와 그 아들인지,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 곧잘 그리기 시작했다. 위트릴로 또한 화가의 길을 걷었다. 여전히 주정뱅이 문제아인 건 같았지만. 그러니까 유부녀였던 그때부터 발라동이 유혹한 스물한 살 연하남 우터는, 그런 위트릴로의 친구이자 동료 화가였다. 발라동의 남편 무지는 자기 아내가 그런 아들뻘 남성과 스캔들이 생긴 일만큼은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래도 이혼녀가 된 발라동은 또 한 번 사랑을 쟁취했다.
발라동은 우터와 1914년에 결혼했다. 발라동과 우터, 그리고 발라동의 아들 위트릴로는 한때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았다. 무엇 하나 파격적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저주받은 삼위일체." 사람들은 이들을 이렇게 부르곤 했다.
발라동은 그런 말 따위 신경 쓰지 않았다.
쉰일곱 화가 샤반 밑에 들어간 그녀의 열여섯 살 당시에는 그 노화가를 대놓고 비판하는 이가 있었는가. 뒤이어 사십대 화가 르누아르의 연인으로 있던 그때도 그 중절모 화가의 행실을 지적하는 이가 있었는가. …그렇다면, 나는 왜 그러면 안 되는데? 그녀의 생각이었다. 발라동은 외려 더 도발적인 행보를 보였다. 발라동은 우터와 결혼한 그해 〈그물 던지기〉를 그렸다. 우터를 모델로 한 이 그림은 보기 드문 노골적인 남성 누드화였다. 잘생긴 얼굴과 근육질 몸매의 모델 같은 남성 셋이 낚시 그물을 던지는 모습이었다. 이제는 그녀가 당당히 남성의 몸을 보고, 즐기고, 연구하고 있었다. 그렇게 당시 예술계에서의 성 역할까지 뒤바꿨다. 누드화를 그리는 건 남성, 그려지는 건 여성이라는 인식을 완전히 역전시키고 말았다.
한 여인이 담배를 입에 문 채 비스듬히 누워있다.
그녀는 투박하다. 그녀는 전쟁터에 세워진 천막 안 장군처럼 보인다. 혁명군의 우두머리 또는 한 종교의 예언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화폭 가득한 푸른색처럼 냉철한 면을 갖추고 있을 그녀는, 꿈꾸고 생각하는 모든 일을 이룰 것처럼 여겨진다. 이는 발라동의 말년작 〈푸른 방〉이다. 이게 발라동이 생각하는 진짜 자기 모습이었다. 여성이 아닌 사람, 객체가 아닌 주체, 그녀가 만난 숱한 인간들과 달리 나약하거나 비겁하지 않은, 당당한 삶의 주도자. 나, 수잔 발라동.
발라동과 우터 부부는 정기적으로 작품을 함께 전시했다.
둘은 발라동이 거의 일흔 살이 된 1934년에 이혼했다. 다만, 갈라진 후에도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관계는 이어갔었다고 한다. 이 무렵부터 건강 악화를 겪은 발라동은 이혼 후 4년 뒤인 1938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화폭에 꽃을 그리던 중 뇌졸중을 일으켜 죽었다고 한다. 일흔두 살이었다. 발라동이 세상 빛을 볼 때는 어머니 한 명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세상에서 하직할 때는 앙드레 드랭, 파블로 피카소, 조르주 브라크 등 그의 동료와 친구들이 앞다퉈 달려왔다. 그녀는 할 말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삶을 살았다. 자유롭고도 열정적인, 그럼에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우물을 갖고서 생을 유영했다.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그녀가 토해내듯 한 말은 지금도 울림을 품고 있다.
〈참고자료〉
수잔 발라동, 문희영, 미술문화
위트릴로, 유준상, 서문당
The Valadon Drama, Storm, John, Must Have Books
독자분들의 사랑과 격려에 힘입어 〈후암동 미술관〉을 뼈대로 한 책 〈결정적 그림〉이 출간되었습니다. 혼자서는 절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매번 잊지 않고 찾아주신 모든 분의 관심과 응원 덕입니다.
이번 편에선 조연으로 등장한 드가와 로트레크, 르누아르가 각각 주연이 돼 전개되는 이야기도 책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많은 문장을 새롭게 쓰고, 여러 비하인드 스토리를 더해두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이번주도 끝까지 읽어주셔서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이 기사들은 이후 여러 매체가 비슷한 포맷의 연재물을 연달아 내놓을 만큼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기획을 선보이며 지금도 앞장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가끔 역사, 문학 등과 관련한 특별전도 선보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