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진의 브랜드피디아 29호
[헤럴드경제=김유진 기자] “이금기(Lee Kum Kee) 씨, 당신은 누구신가요.” 마지막 한 방울까지 똑 떨어진 굴소스 병을 바라보다 불현듯 궁금증이 생겼다. 매번 호기심을 뒤로한 채 지나쳤던 그 이름, ‘이금기’에 관해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굴소스 명인(名人)으로 착각했던 이금기의 실체는 사람이 아니었다. 한문 표기 때문에 인명(人名)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한국인이 아닌 홍콩 사는 ‘이씨’(李氏) 가문에서 만든 소스 회사 이름이다. 이들 가족은 5대째 굴소스 장사로 삼성 이재용가(家)에 버금가는 자산을 일군 재벌 가문이다. 반도체·바이오 같은 고부가가치 산업도 아닌 소스 장사로 자수성가 한 이금기, 그 이야기에 군침이 돌았다.
삼성엔 이병철, 이금기엔 ‘이금상’…“최초의 굴소스, 이금기”
굴소스는 어느덧 한국인의 부엌에 필수 아이템으로 자리잡은 외래종이다. 한식·일식·중식·양식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어울리는 이 놀라운 조미료의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13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88년 중국 남부 광둥성의 해안마을 난쉐이(南水). 이금기 초대 회장인 이금상은 굴을 요리하다 의도치 않게 완전히 졸여버린다. 우연치 않게 갈색으로 눌러붙은 굴에서 나는 감칠맛을 본 이금상은 ‘이거다!’하고 무릎을 쳤다.
그는 이날의 경험을 토대로 굴 소스 개발에 나선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앞 두 글자에 가게를 뜻하는 ‘기’(記) 자를 넣어 이금기를 설립한다. 이 회사는 장차 전세계 굴소스 시장의 80~90%를 장악하게 될 이금기유한공사(李錦記有限公司)로 이어진다.
이금기는 굴소스로 일어선 회사인 만큼 원료가 되는 굴의 수정·배양·정착을 위한 환경과 조건에도 민감하다. 굴들이 먹을 해조류를 이유식 고르듯 나이에 따라 다르게 선별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닷물의 산소농도, 염도, 온도, 수소이온농도(PH)수치는 물론 중금속까지 모니터링한다.
지금의 이금기를 있게 한 ‘이금기 프리미엄 굴소스’는 굴추출물 농축액 함량이 90%이상으로, 제품군 중 가장 높다. 보트에 탄 소년과 성인 여성이 노를 젓는 그림을 담은 동양풍 디자인의 역사만 57년이다. 1972년 미국 시장에 진출하면서 굴 함량이 낮은 염가판 ‘판다 굴소스’를 출시하긴 했지만, 간판 소스로는 항상 프리미엄 굴소스가 꼽힌다.
이재용家 안 부럽던 이금상家…무슨 일?
57년간 제품 디자인을 고수해 온 이금기지만, 변화의 바람은 매서웠다. 블룸버그가 발표하는 아시아 부호 순위에 따르면, 이금상 가문은 지난 1년새 순위가 5계단 하락했다. 삼성가를 위협하던 이금상 가문의 위세가 5대에 이르러 도전에 직면한 것이다.
블룸버그가 지난 1월 발표한 2024년 아시아 부호 순위에서 이재용 회장의 삼성가는 182억 달러로 12위, 이금기 가문은 143억 달러로 17위에 이름을 올렸다.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이금기 가문과 삼성가의 자산 순위는 각각 11위(179억 달러)와 10위(185억 달러)로 박빙이었다. 그러나 이금상 가문의 자산 규모가 36억 달러(약 4조 8335억원) 증발하면서 순위 격차가 5계단으로 벌어졌다.
전통과 가족을 중시했던 이금상 가문은 매너리즘에 빠진 브랜드를 새로이 단장하는 동시에 디지털 마케팅을 향한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금기의 의중을 가장 잘 보여주는 건 올초 영입 소식이 알려진 알리바바(Alibaba) 부사장 출신 징지예(Jing Jie) 최고경영자(CEO)의 화려한 이력이다. 고급 화장품 SK-II 등 유명 기업의 브랜드 매니지먼트로 커리어를 시작한 그는 중국 최대 온라인 쇼핑몰 알리바바의 핵심 임원 중 한 명이었다.
그런 징지예의 영입은 일용소비재(FMCG) 전문가의 손길로 탈바꿈 할 이금기의 새 얼굴을 기대하게 만든다. 다소 옛스러운 디자인의 이금기 제품 패키지는 물론, 유튜브 등 온라인 마케팅과 판매 채널 등에도 점차적인 변화가 예상되는 이유다.
세계 1위 굴소스, 국내 시장 성적표는?
글로벌 1위 굴소스 회사인 이금기의 한국 시장 장악력은 어떨까. 이금기 굴소스는 국내 기업 오뚜기가 1996년 수입한 이래 초창기 연평균 30% 안팎의 매출 성장세를 보이며 발빠르게 한국인의 식탁에 침투했다.
다만 국내 시장 성적표는 아직까지 글로벌 인기에는 미치지 못했다. 국내 굴소스 시장점유율 35%(2018년 기준)를 기록한 ‘1위 기업’ CJ제일제당의 존재감이 그만큼 컸다.
상대평가 성적표는 아쉽지만, 절대평가 성적표는 기대해봄직하다. 국내 굴소스 시장의 전망이 밝아서다. 시장조사기업 닐슨에 따르면 국내 굴소스 시장 규모는 2016년 213억원 규모에서 5년만인 2021년 약 388억원(7월 기준)으로 80% 가까이 늘었다. MSG가 건강에 해롭다던 기존의 부정적 인식엔 금이 가고, 고물가 상황으로 집밥 소비는 늘고 있는 국내 분위기도 이금기에게 나쁘지 않다.
어느덧 요리 필수품이 된 굴소스. 제 2차 ‘조미료 전쟁’의 시대는 이미 열렸다. 변신을 예고한 136살 ‘원조’ 굴소스 회사가 국내 굴소스 업계에 대격변을 가져올 수 있을까? 감칠맛 전쟁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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