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편 : 92. 케테 콜비츠]
<동행하는 작품>
전쟁 연작
직조공의 봉기 연작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
편집자 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케테 콜비츠〉 편의 경우 제1·2차 세계대전 역사 일부를 함께 다룰 수밖에 없어 기사가 조금 더 길어졌습니다.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안녕, 내 아이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징집(徵集) 나이도 되지 않는 아이가 군에 가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1914년, 아들 페터는 지금 당장 전쟁터로 가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다며 울먹였다. 어머니 케테 콜비츠(Kathe Kollwitz·1867~1945)는 녀석의 분에 찬 토로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꼭 그래야겠니?" 콜비츠는 아들의 어깨를 쥐고 나지막이 물었다. "네. 꼭 그래야만 해요." 돌아오는 답은 빠르고 단호했다. "그렇다면…. 그래. 그렇게 하렴." 콜비츠가 돌아서며 한 말이었다. 그 혈기를 막을 수 없기에 탯줄을 다시 끊는 심정으로 겨우 꺼낸 문장이었다.
그렇게 열여덟 살 아이는 폭약이 빗발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사지(死地)에서 총칼을 쥐었다.
어디 한번 제대로 살아보라고 낳았더니 스스로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콜비츠는 아들의 입대 후부터 하루도 편히 잠들지 못했다. 오직 전쟁이 일찍 끝나기만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가 그녀 집 문을 두드렸다. 녀석이 떠나고 고작 두 달쯤 흘렀을 때였다. 혹시 아들일까. 콜비츠는 그 소리에 눈을 번뜩였다. 녀석이 피투성이여도 좋았다. 얼굴이든, 몸이든 한쪽이 성치 않아도 상관없었다. 그저 꽉 끌어안을 수만 있다면 그새 무슨 일이 있었어도 문제없을 터였다. 이러한 콜비츠의 설렘은 문을 열자마자 사라졌다. 그녀 앞에는 낯선 군인이 서있었다. 아들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처음 보는 남성이었다. 그는 몇 장의 꼬깃꼬깃한 종이를 쥐고 있었다. "콜비츠 부인이십니까." 그가 조용히 말을 건넸다. "네. 그런데요?" 콜비츠는 잔뜩 경계하며 쏘아붙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이 그녀를 단번에 무너지게 했다. "부인의 아드님이 전사했습니다."
그렇게 가겠다고 악을 쓴 네가, 결국 그 꼴이 되었느냐.
눈물이 용암처럼 흘렀다. 벌어진 입에서는 짐승의 울음 같은 신음만 새어 나왔다. 그녀는 신의 저주를 받은 니오베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내가 녀석의 손발을 묶는 심정으로 길을 막았으면 어땠을까. 애초에 그런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눈 귀를 가렸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애초에 아들이 건강하지 않았다면, 아니 애초에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하지 않았다면 나았을까. 후회는 끝이 없었다. 이제 콜비츠는 잠드는 게 더 괴로웠다. 자식은 끝없이 구천(九泉)을 떠돌지도 모르는데, 어미라는 작자는 세상 편히 누워있는 것 같았다. 그 자체로 죄를 짓는 기분이었다.
울어서 아이가 돌아올 수 있다면 평생을 울겠지만, 당연히 세상의 섭리는 그러지 않았다.
콜비츠는 다시 힘을 냈다. 손때 묻은 화구를 다시 쥐었다. 여태 그녀는 땀 냄새 폴폴 나는, 흙먼지 자욱한 현장 속 피어나는 미(美)를 찾아 화폭에 옮겨왔다. 그 속 사람들의 고귀한 희생 내지 거룩한 헌신 등을 예술로 승화했다. 그랬던 콜비츠가 이제 작품 활동의 무대를 전장으로 넓혔다. 주제도 바꿨다. 희생과 헌신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이 아닌, 슬픔과 고통이 토해내는 한의 정서에 가깝게 됐다.
콜비츠는 1차 대전이 끝난 1918년부터 5년간 일곱 개의 목판화로 꾸려진 〈전쟁〉 연작을 세상에 보였다.
첫 판화의 제목은 〈희생〉이었다. 어머니가 자식을 어떤 알 수 없는 힘에 빼앗기고 있다. 어머니 눈에는 늘 핏덩이인 아이다. 어떻게든 녀석을 붙잡으려고 하나 힘이 부족하다. 이는 국가의 번영을 위해, 혹은 민족의 영광을 위해 소중한 무언가를 내준 모든 이를 위한 작품이었다. 이어 청년들이 블랙홀에 빨려가듯 전쟁터로 가는 모습이 담긴 〈지원병들〉, 남편을 포화 속에서 잃은 〈과부〉, 더 어린 자식들은 무조건 지킨다는 듯 서로를 감싸 방벽을 만든 〈어머니들〉 등도 공개했다. 콜비츠는 이를 통해 전쟁이 빚어낸 참상을 솔직히 내보였다. 전쟁터로 끌려가는 이의 공포, 보내는 이의 탄식, 남겨진 이의 비탄밖에 없다는 걸 뚜렷하게 알렸다. 전쟁 앞에서는 어떠한 미사여구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점 또한 차분하게 전달했다.
때로는 한마디 말 없는 무성 영화가 우짖는 유성 영화보다 큰 울림을 준다.
가끔은 침묵과 여백이 다 안다는 식의 호들갑보다도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 있다. 이 작품도 그랬다. 전쟁에 찔리고, 베이고, 할퀴어진 많은 이들은 콜비츠의 절제된 결과물 앞에서 비로소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그 전쟁을 형상화하기 위해 애를 썼어요. '봐라. 우리 모두가 겪은 이 참담한 과거를.' 이 작품을 들고 온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외쳐야만 할 것 같아요." 콜비츠가 〈전쟁〉을 완성한 무렵 작가 로맹 롤랑에게 쓴 글이었다. 전쟁의 가장 큰 피해자가 된 콜비츠는 노동 화가에서 더 나아가 반전 화가로 새로운 회화 세계를 펼쳐가기 시작했다.
노동자의 아름다움
과거의 콜비츠는 보다 이상적이며, 한층 더 낭만적인 예술가였다.
콜비츠는 1867년 동프로이센(지금의 독일 동북부 지방)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법학도였다. 아버지는 판검사가 되고자 법을 배웠지만, 국가의 경직된 군국주의에 실망해 완전히 방향을 튼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택한 업은 미장이였다. 율사가 아닌 노동자의 삶이었다. 법전 대신 흙반죽을 쥐는 나날이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았다.
애초에 체면 따위는 중요히 여기지 않았다. 이렇듯 틀에 얽매이지 않는 아버지 덕에 콜비츠도 곧장 미술을 접할 수 있었다. 계집애가 무슨 그림이냐는 조롱에도 굴하지 않은 그가 있었기에, 콜비츠는 최선의 환경에서 배움을 이어갈 수 있었다. 콜비츠도 아버지의 정성에 부응했다. 베를린 등 대도시에서 공부를 이어간 콜비츠는 열여덟 살 무렵 베를린 여성 예술가 협회에 가입할 만큼 실력을 쌓았다.
콜비츠가 주력으로 삼은 소재 또한 아버지를 기쁘게 했다.
그것은 노동자와 노동 현장이었다. 그녀에게 이 두 요소가 각별했다. 아버지와 함께 본 일꾼들은 겉으로만 투박할 뿐, 사실은 누구보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버지와 함께 간 현장은 조금 거칠었지만, 알고 보면 그만큼 더 치열한 공간이었다. 그녀는 노동의 모든 장면이 일요일 아침만큼 성스럽다고도 생각했다. "나는 노동자가 보여주는 단순하고 솔직한 삶이 이끌어주는 것 중 주제를 골랐다. 나는 거기서 아름다움을 찾았다. (…) 그 무엇보다 힘줘 말하고 싶은 건, 내가 프롤레타리아의 삶에 끌린 이유 중 동정심은 아주 작은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글을 쓸 만큼 노동자와 노동 현장에 진심이었다.
콜비츠는 회화 기법에 대해선 판화 쪽으로 마음의 추를 기울였다.
대부분의 화가 지망생이 그렇듯, 그녀 또한 처음에는 다채로운 색채의 유화를 그리고 싶었다. 그런 그녀는 베를린 왕립 아카데미 출신인 막스 클링거(Max Klinger·1857~1920)의 판화 연작 〈인생〉을 본 뒤 마음을 바꿨다고 한다. 때로는 검정과 회색, 흰색만의 세계가 오색찬란한 세계보다 더 깊은 여운을 줄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직조공은, 농민은…
콜비츠와 가약을 맺을 그의 이름은 칼이었다.
그는 의대생이었다. 진료와 수술만큼 노동자에게 관심 많은, 골목길과 공사장에 머물기를 좋아하는 남자였다. 콜비츠는 친오빠의 소개로 칼과 만났다. 그녀는 딱 자기 같은 사람을 찾았다고 생각했다. 1885년에 만난 둘은 6년 후인 1891년에 결혼했다. 두 사람은 이제 삶의 동반자이자, 노동 현장에 함께 머물 둘도 없는 동지였다. 신혼부부는 그들이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 갔다. 이들은 베를린의 노동자 거주 지역 프렌츠라우어 베르크에서 멈췄다. 둘은 거기가 낙원이라는 양 곧장 살림을 차렸다. 두 사람은 가장 정직한 노동이 넘실대는 이 동네에서 그들만의 행복을 가꿨다.
내과 의사가 된 칼은 근처에 작은 자선 병원을 세웠다.
허리가 짓눌린 인부, 피 섞인 먼지를 토하는 기능공 등 가난한 노동자를 보살폈다. 콜비츠는 이들을 모델로 작품 활동을 했다. 그렇게 남편 칼과 아내 콜비츠는 약속한 듯 서로의 역할을 맡아 소화했다. 칼은 때때로 청진기를 쥔 채 눈물을 흘렸다. 콜비츠도 구도를 잡고, 스케치를 하고, 잉크로 찍어내는 모든 순간 각자가 품은 처연한 사연을 곱씹었다. 그런 공기 속 빚어진 작품에는 가난과 질병 따위가 낳은 아름다움이 덕지덕지 붙어있곤 했다.
1893년, 콜비츠는 게르흐르트 하우프만의 연극 〈직조공들〉을 볼 기회가 있었다.
1884년 당시 산업화에 밀린 직조공 무리의 봉기를 다룬 이 연극은 참혹하고 참담한 내용이 주를 이뤘다. 목숨을 건 몸부림 후 지금은 달라진 게 있을까. 콜비츠는 새삼스럽게 생각했다. 여전히 직조공은 하루 12시간에 가까운 일을 하고 있었다. 이들은 뿌연 먼지 속에서 늘 콜록댔고, 임금은 턱없이 낮았고, 해고의 위험은 항상 곁에서 도사리고 있었다. 콜비츠는 1894년부터 4년간 6점으로 이뤄진 〈직조공의 봉기〉 연작을 작업했다. 〈빈곤〉 속에서는 앙상하게 마른 여성이 몸을 웅크리고 있다. 그녀는 굶은 채 죽어가는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기에 머리카락만 쥐어뜯고 있다. 그녀 뒤에 깔린 일거리는 절망감만 더할 뿐이다. 아이는 죽고 만다. 사신은 상황과 사정 따위 봐주지 않는다. 더는 잃을 게 없는 노동자들은 일을 도모한다. 반기를 들 용기가 있어서가 아닌, 이렇게 살 용기가 없기 때문에 봉기를 일으킨다. 이들은 행진한다. 제발 우리를 봐달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연작의 마지막 작품 〈최후〉를 보면, 결국 행동에 나선 이들은 싸늘한 시신으로 최후를 맞는다. 이들의 고통은 반복되고 있다. '우리'가 함께 나서지 않으면 비극은 재차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는 식의 메시지가 담긴 결과물이었다. 콜비츠의 〈직조공의 봉기〉는 베를린 살롱전(展)에서 호평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은 날것 그대로의 이 흑백 작품에 금상을 줄 생각이었다. 파급력을 불안해한 정부가 "마음을 보듬거나 달래주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며 막아선 통에 이는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외풍도 콜비츠가 유명해지는 걸 막지는 못했다.
콜비츠도 멈추지 않았다.
1902년, 콜비츠는 소설 〈농민전쟁〉을 읽고 재차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는 1525년 당시 30만명 농민이 귀족에 맞서 들고 일어난 '독일 농민전쟁'을 배경으로 한 책이었다. 콜비츠는 또 9점의 연작을 내놓았다. 연대한 농민 군단은 온갖 참혹한 일을 겪으면서도 거듭 나아간다. 이들은 꿈에서 태어난 게 아닌 절망에서 피어난 반란을 등에 이고 있다. 끝에는 파멸밖에 없다는 걸 알지만, 진격은 멈출 수는 없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특히 연작의 막바지에 속하는 여덟 번째 작품을 인상적으로 봤다. 늙은 어머니가 작은 불빛을 든 채 농민들의 시체 더미 속 아들을 찾고 있는 장면이었다. 1907년, 콜비츠는 국제적 권위를 갖는 빌라 로마나(Villa Romana)상을 받았다.
운명의 아이러니
〈농민전쟁〉에 한창 매달려 있던 1903년의 어느 날이었다.
콜비츠는 이제 막 일곱 살이 된 아들 페터를 안고 거울 앞에 앉았다. 그녀는 눈을 거듭 떴다 감으며 그간 노동자들에게 들은 애절한 사연을 떠올렸다. 그녀는 계시를 받은 듯 갑자기 화구를 쥐었다. 작품 한 점을 만들었다. 그것은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었다. 콜비츠가 창조한 화폭 속 어머니는 막 숨이 넘어간 아이를 끌어안고 있다. 그녀는 억센 팔과 다리를 갖고 있다. 험한 현장에 숙달한 억센 노동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그녀 또한, 숨을 거둔 아이 위로 내리깔리는 절망의 무게는 견디지 못한다. 헝클어진 머리와 굽은 등, 바들바들 떠는 듯한 손 모두 슬픔의 무게추에 그대로 짓눌리길 택한 듯하다.
화약 냄새가 폴폴 나는 어수선한 시기, 곧 무슨 일이든 터질 것 같은 나라 분위기, 그곳에서 아들을 둔 어머니….
콜비츠는 앞으로 펼쳐질 투박한 산업과 전쟁의 시대 속 수많은 어머니가 겪을 운명을 일찌감치 예견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끝내 그녀 또한 그 운명의 망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했다. 콜비츠가 전쟁터에서 페터를 잃은 건 이 작품을 완성한 뒤 10년여가 흐른 후였다. "부인의 아드님이 전사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콜비츠는 그때 자신이 거울 앞에서 창조한 어머니를 떠올렸다. 기구한 운명의 아이러니에 목울대가 더 뜨거워졌다.
나치에 저항
콜비츠는 단장(斷腸)의 아픔을 예술로 승화했다.
노동자의 판화가였던 콜비츠는 이제 전쟁에 자식을 잃은 모든 부모의 대변자로 올랐다. 우리의 싹을 끊어버리는 전쟁의 참혹함을 알리는 기수로 앞장섰다. 그런 콜비츠의 삶은 한 번 더 요동쳤다. 나치 탓이었다. 콜비츠가 〈전쟁〉 연작을 발표할 무렵, 1차 대전 패전국인 독일은 최악의 인플레이션을 겪고 있었다. 앞서 1차 대전에서 승리한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국은 독일에 1320억마르크를 전쟁 배상금으로 요구했다. 이는 당시 독일 전 국민이 몇 년간 생산한 걸 싹 다 긁어모아야 할 천문학적 액수였다. 독일은 당장 급한 불을 끄기 위해 악수(惡手)를 놓았다. 돈을 엄청나게 찍었다. 화폐청 윤전기가 쉴 틈 없이 돌았다. 화폐는 쏟아졌지만, 마구잡이로 늘어난 만큼 가치는 폭락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돈이 더 필요했고, 더 찍어내면 가치는 또 떨어지는 등 악순환에 빠져있었다.
극단적 전체주의를 내건 나치즘은 이처럼 초상집 분위기가 된 국가에서 서서히 자리를 잡았다.
수장 아돌프 히틀러는 강대국 독일의 재건을 내걸었다. 그는 자존감이 떨어진 국민을 자극해 폭력의 세계로 다시 이끌었다. 독일은 배상금을 낼 필요가 없고, 그럴 바에는 차라리 재무장을 하는 게 낫다고 선동했다. 콜비츠는 히틀러의 실체를 금세 알아차렸다. 입만 열면 국가를 위한다는 그의 진짜 관심사는 독재와 전쟁밖에 없다는 걸 꿰뚫고 있었다. 그녀는 히틀러의 위험성을 일찌감치 경고했다. 독일 내 양심적인 지식인들과 함께 나치즘이 부를 또 다른 전쟁을 설파했다. 하지만 1933년, 히틀러는 독일 1당에 오른 나치당 당수가 돼 국가 운영의 전권을 쥐었다.
다시 재앙의 시작이었다.
히틀러는 그의 앞길을 막으려고 한 이들을 축출했다. 그에게 쓴소리를 한 콜비츠는 당연히 요주의 인물이었다. 콜비츠는 그가 몸담은 프로이센 아카데미에서 사실상 내쫓겼다. 얼마 후에는 개인 전시회를 열 자격을 빼앗았다. 나치는 곧 국민 정서를 해치는 그림을 모았다며 '퇴폐 미술전'을 열었는데, 이 안에 콜비츠의 작품도 끼워 넣었다.
그럼에도 콜비츠는 독일에 있었다.
지식인의 망명 행렬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그대로 있었다. 외려 그 이상이었다. 비밀국가경찰(게슈타포·Gestapo)의 협박에도 반전(反轉)을 주제로 한 작품 활동을 지속했다. 콜비츠의 사람들은 이제 그녀를 '판화의 성녀'로 부르고 있었다. "너는 '돌아올게요'라고 말했었지. 네 침대 위에 있던 시든 잎을 거두고, 네 유품들을 천으로 덮었다. 흰 천 위에 하얀 자작나무들이 놓여 있구나…." 콜비츠는 삶이 원망스러워지면 십수년 전 아들 페터가 죽은 후 쓴 일기를 거듭 읊었다. 전쟁에서 희생당한 아들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총알과 수류탄이 오가는 그 비극을 막는데 조금의 역할이라도 할 수 있다면, 그녀는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나치가 부추긴 세상의 광기를 콜비츠 개인이 잠재울 수는 없었다. 화약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총부리가 또 고개를 들었다. 1939년, 이번에는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
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슬픔은 콜비츠를 또다시 덮쳤다.
나치의 통제로 의료 활동을 하지 못했던 남편은 1940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이어 2년 후에는 끔찍이도 사랑했던 손자 페터가 전장에서 전사했다. 아들에 이어 손자까지 화마에 짓밟혔다. 콜비츠는 온몸이 가루가 돼 산산이 흩어지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콜비츠는 제대로 된 애도도 하지 못한 채 피란길에 올라야 했다. 그녀의 집은 곧 폭격으로 망가졌다. 그곳에 서린 혈육과의 추억까지 잿더미가 돼버렸다. 콜비츠는 1942년, 생애 마지막 판화를 선보였다. 한 여인이 자식들을 품고 있다. 그녀의 굵은 팔뚝과 억센 손목은 아이들의 든든한 우산이 되고 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펴보고 있다. 그러는 동안 팔에 거듭 힘을 줘 움찔대는 아이들을 다잡는다. 그녀는 굳게 결심하고 있다. 이번만큼은 그 어떤 광기와 외풍에도 내 전부를 빼앗기지 않겠다고. 콜비츠가 붙인 제목은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 된다〉였다. 맞는 말이었다. 인류는 무한한 가능성을 품은 씨앗을 짓밟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대의도 그럴 자격이 없는 것이었다. "이것은 내 유언이다. (…) 이 요구는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면 안 된다'는 그런 막연한 바람이 아니다. 이것은 율법이자 명령이다." 콜비츠가 이 작품에 대해 일기장에 쓴 글이었다.
콜비츠는 이 작품을 내놓고 3년 뒤 죽었다.
드레스덴 근교의 모리스부르크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78세였다. 전쟁은 그녀가 숨지고 16일 뒤 끝났다. 그녀는 지상에서 종전을 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는 천상에서 남편, 그리고 두 페터와 함께 종전 선언의 그 순간을 내려다봤을 것이다. 이들은 또 한 번 서로를 죽도록 끌어안고 울음을 터트렸을 것이다. 영국의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가 쓴 〈서양 미술사〉는 지금도 세계적 밀리언셀러로 통한다. 곰브리치가 쓴 1950년 초판본에는 여성 예술가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는 1994년 독일어 개정증보판을 찍을 때 한 명의 여류 화가를 추가해 이목을 끌었다. 곰브리치가 택한 그녀는 콜비츠였다.
〈참고 자료〉
케테 콜비츠, 카테리네 크라머, 이온서가
케테 콜비츠 평전, 유리 빈터베르크, 풍월당
들끓는 삶의 무늬 : 케테 콜비츠의 판화 미학, 김종길, 실천문학
2022년 4월부터 매주 토요일 발행하는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는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로 업계에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습니다. 가상의 시설 후암동 미술관을 세계관으로 두는 이 칼럼은 ▷이론편 ▷인물편 ▷현장편 ▷작품편 ▷신화편 ▷현대미술편 등 특별전을 선보이며 지금도 ‘퍼스트 펭귄’으로 도전과 실험을 선도하고 있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