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는 작품>

페스트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

죽음의 섬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무자비한 사신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막달레나(일부 확대)'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페스트'(일부 확대)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페스트'(일부 확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저희가 뭘 잘못했어요?" 한 여인이 덜덜 떨며 울먹였다. "글쎄." 사신의 말은 간결했다. "그렇다면 대체 왜…." 푹. 사신은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았다. 가을 억새 베듯 무심하게 낫을 휘둘렀다. 시퍼런 날이 여인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그녀는 저항할 틈도 없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사신 무리는 기어코 여기까지 습격했다. 비쩍 마른 사신이 앞장섰다. 괴물 박쥐에 올라탄 그는 낫을 들고 골목길을 휘저었다. 움푹 패인 두 눈으로는 어차피 뵈는 게 없었다. 그렇기에 채이는 모든 이를 베고, 찌르고, 짓밟았다. 방금 전에는 원피스를 입은 꼬마를 베었다. 지금은 막 결혼식을 올린 웨딩드레스의 신부를 찔렀다. 이제는 그 위에서 울부짖고 있는 빨간 옷의 가족을 짓밟을 터였다. 그러고는 유유히 다음 희생자를 찾아 떠날 참이었다. 사신들은 술래잡기하듯 히히덕거리며 사람들을 뒤쫓았다. 도둑질하듯 문을 슬쩍 열곤 온 집안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예고없이 온 이들의 습격에 모두가 속절없이 당할 뿐이었다. 짙게 깔린 뿌연 연기가 참담함을 더하고 있었다. "왜 하필 저인가요? 왜 하필 여기로 온 건가요?" 사신에게 싹싹 빌며 애원해도 소용없었다. 울면서 사정해도 통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당신은, 왜 이곳은 예외여야 하는가." 사신은 답답하다는 듯 대꾸했다. 이들은 삽시간에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자, 이제 또 어디로 가볼까. 낫을 든 사신이 고개를 쳐들었다.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어디든 상관없다. 이렇게 생각할 게 분명했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페스트'

스위스 화가 아놀드 뵈클린(Arnold Bocklin·1827~1901)은 죽기 3년 전에 이 그림을 그렸다. 제목은 '페스트(흑사병)'다. 잊을 만하면 유럽 대륙을 습격한 페스트는 이르면 몇 시간 내 숨질 만큼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증상도 고약한 이 병은 사람 피부를 괴사(壞死)하게 해 썩어가는 듯 검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검은 죽음의 병(黑死病)'이었다. 그러고 보면 그림 속 사신과 괴물 박쥐 모두 칠흑처럼 검다. 사신이 휩쓸고 간 골목길은 잿빛으로 물들었다. 길 한켠에 쓰러진 희생자는 석탄 더미에서 건져올린 듯 새까맣다. 일흔한 살의 노인은 왜 이토록 끔찍한 그림을 그렸을까. 그 또한 처음부터 이런 그림을 그린 건 아니라는데, 그렇다면 무슨 사연이 있는 걸까.

시작은 풍경화로

뵈클린은 1827년 스위스 바젤에서 출생했다. 무역업을 하는 집안에서 큰 뵈클린은 어릴 적부터 미술에 재능을 보였다. 독일 뒤셀도르프 아카데미에 입학한 그는 풍경화가 요한 빌헬름 쉬르머(Johann Wilhelm Schirmer·1807~1863)에게 그림을 배웠다. 쉬르머도 곧 뵈클린의 남다름을 알아봤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더 큰 세상으로 떠날 것을 권했다. 등 떠밀린 뵈클린은 벨기에의 대도시 브뤼셀과 안트베르펜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그는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한 불세출의 천재 화가 페테르 파울 루벤스(Peter Paul Rubens·1577~1640), 안토니 반 다이크(Anthony van Dyck·1599~1641) 등의 그림을 베끼며 실력을 다듬었다. 1848년, 갓 스무살을 넘겼을 땐 문화예술의 중심지 프랑스 파리 땅을 밟았다. 뵈클린이 가장 즐겨 찾은 곳은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뵈클린은 그 안에서도 여러 풍경화를 모작했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폭포수가 있는 산 풍경'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샤모아(chamois)가 있는 산 풍경'

뵈클린이 이쯤 그린 그림은 그의 말년작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요하다. 가령 뵈클린 작품 '폭포수가 있는 산 풍경'에서는 웅장한 자연의 경이를 느낄 수 있다. 보다보면 산 특유의 서늘한 공기, 부지런히 쏟아지는 물소리, 은은하게 흔들리는 풀과 동물 털의 감촉이 와닿는 듯도 하다. 비슷한 때 내놓은 '샤모아(chamois)가 있는 산 풍경'도 잔잔한 분위기를 품는다. 녹지 않은 눈, 아무렇게나 포개진 바위, 제 마음대로 모이고 떨어진 샤모아들 모두 튀지 않고 조화를 이룬다. 뵈클린은 이대로 풍경화가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개성은 강하지 않지만, 실력만은 꽤 괜찮은 예술가로 무난히 생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뵈클린은 그러지 못했다. 그의 화혼이 곧 새로운 세상에 휩쓸린 탓이었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켄타우로스와 님프'

뵈클린은 1850년, 다시 유학길에 올랐다. 이번에는 이탈리아 로마였다. 뵈클린은 이곳에서 그간 못 본 그림의 영역을 접했다. 그것은 눈 뜨면 보이는 풍경화의 세계가 아닌, 눈 감아야 볼 수 있는 전설과 미신 등 상상화의 세계였다. 특히 영웅과 괴물, 요정이 등장하는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룬 옛 작품들은 보고만 있어도 황홀했다. 뵈클린은 서서히 환상의 세계로 발을 디뎠다. 이쯤 뵈클린은 풍경화와 상상화를 합친 그림을 그렸다. 대표작은 '켄타우로스와 님프'다. 먼저 눈에 띄는 건 울창한 수풀과 잔잔한 개울이다. 산과 물을 그리는 데 도가 튼 뵈클린의 노련함을 볼 수 있는 부분이다. 그 다음 보이는 건 상체는 인간, 하체는 말인 켄타우로스가 님프를 붙든 모습이다. 신화 속 켄타우로스는 여색을 좋아하는 종족으로 등장한다. 성욕이 들끓는 이 반인반수는 종종 숲에 사는 님프를 납치해 희생양으로 삼곤 했다. 이 그림이 표현하는 게 딱 그 장면이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님프를 쫓는 판'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샘 옆의 님프'

뵈클린은 이 시기에 자연과 목축의 신 판이 나체의 님프에게 따라붙는 그림 '님프를 쫓는 판', 잠시 여유를 즐기는 님프를 담은 '샘 옆의 님프' 등도 그렸다. 사실주의 화풍에 가까웠던 젊은 풍경화가는 이처럼 보다 비장한, 더욱 감성적인 낭만주의 화풍으로 마음의 추를 기울였다. 하지만 뵈클린의 이 그림들 또한 그가 만년에 그린 종말론적 분위기의 작품과는 여전히 거리감이 있다. 무난하게만 보이는 그의 삶에 갑자기 무슨 일이 끼어든 것일까.

전염병에 잃은 자식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Play of the Nereides'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세이렌'

사실 불안과 좌절, 고통과 죽음 등 저릿한 단어들은 뵈클린의 삶에 은은히 스며들고 있었다.

뵈클린과 결혼을 약속했던 여인은 청춘의 꽃도 못 피운 채 허무하게 죽었다. 그는 가까운 이의 죽음을 온몸으로 체감했다. 짝을 잃은 뵈클린은 곧 다른 여인에게 청혼했지만 매몰차게 차였다. 절망한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었다. 다행히 우울의 늪에 잠식되지 않았지만, 두 경험 모두 그에게 흉터를 안겼다. 뵈클린은 1853년, 이탈리아 출신의 여성과 결혼했다. 드디어 가정을 이뤘다. 이탈리아에 있으면서 그에게 맞는 그림 스타일도 찾았다. 이제 다 잘 될 것 같았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삶은 만만치 않았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그리스도를 애도하는 막달레나'

왜 하필 저입니까. 뵈클린이 허공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는 목이 축 늘어진 아기의 시신을 안고 있었다. 물론 제가 아니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요. 하지만…. 뵈클린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저는 이미 두 번이나 겪었지 않습니까. 뵈클린은 꺽꺽대며 울었다. 뵈클린은 자기를 쏙 빼닮은 아기를 또 잃었다. 벌써 세 명째였다. 사인은 먼저 세상을 떠난 첫째, 둘째처럼 또 전염병이었다.

뵈클린은 어떻게든 불행을 잊으려고 했다. 1856년, 그는 독일 뮌헨으로 왔다. 이후 바이마르 아카데미(Weimar academy)에서 교편을 잡고, 1862년부터 4년간은 다시 로마에서 그림 실험을 이어갔다. 스스로 혹사하면서 교육과 작업에 더 열을 올렸다. 쏟아지는 일, 흘러가는 시간이 다시 벌어진 흉터를 봉합해주길 기다렸다. 하지만 결코 낫지 않는 게 있었다. 그게 바로 자식을 잃은 슬픔이었다. 뵈클린은 때때로 발작하듯 흐느꼈다. 어쩌다 아이의 옷가지, 미처 신지 못한 신발을 보면 절대로 신을 용서할 수 없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뵈클린의 그림에는 차츰 죽음의 기운이 깔렸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

이 무렵 뵈클린의 대표작은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죽음이 있는 자화상'이다. 그간의 풍경화, 신화화와는 분위기가 확실히 바뀌었다. 뵈클린은 눈을 부릅 뜬 채 화구를 쥐고 있다. 그런 그의 뒤에서 섬뜩한 몰골의 해골이 바이올린을 켜고 있다. 겉으로는 담담한 척하지만, 사실은 늘 죽음의 공포와 함께 있다는 걸 표현하고 싶었을까. 그러는 동안 뵈클린에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는 더 짙어졌다. 먼저 떠나보낸 자식 셋에 이어 자식 둘을 또 잃었다. 이번에도 각종 전염병 탓이었다. 뵈클린과 아내는 평생 열 넷의 자녀를 낳았다. 이 가운데 다섯이 전염병 등으로 어린 시절에 죽은 셈이었다. 나머지 아홉 가운데 셋도 뵈클린보다 오래 살지 못하고 숨졌다. 뵈클린 또한 장티푸스에 걸려 사경을 헤멘 적이 있었다. 뵈클린은 어느덧 죽음에 익숙해졌다. 떨쳐내야 할 게 아닌, 안고 가야 할 존재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의 섬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죽음의 섬(첫 번째 버전)'

"뵈클린 선생. 지금 뭘 그리고 있는 거예요?"

1880년, 이탈리아 피렌체의 한 작업실. 뵈클린을 보러온 마리 베르나가 붓을 든 그에게 무작정 물었다. 그녀는 그의 유력 후원가 중 한 명이었다. "부인. 수집가 알렉산더 귄터 씨가 주문한 그림을 그리고 있소." 뵈클린이 가볍게 목례했다. "잠시만 기다려주겠소?" 뵈클린은 말을 덧붙였다. "계속 그리세요. 부디, 저는 신경쓰지 말고 계속 그려주세요." 베르나는 홀린 듯 걸음을 멈추고 서있었다. 그녀는 뵈클린이 칠하는 캔버스 앞을 떠나지 않았다. 초조하게 손톱을 깨물었다. 화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뵈클린 선생. 혹시…." "말씀하시오." "괜찮으시다면, 저한테도 이 그림과 똑같은 걸 한 점 그려줄 수 있어요?" 베르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제될 건 없지만, 무슨 일이 있소?" 이제는 외려 뵈클린이 궁금해졌다. "제 옛 남편이 디프테리아로 죽은 걸 아시죠?" "그렇소." "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이 그림을 보면 죽은 그 사람이 사무치게 떠올라요." 베르나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비슷한 상처가 있는 뵈클린은 여기에 대고 딱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뵈클린 선생. 저를 위한 두 번째 그림에는 딱 한 장면만 더 그려주겠어요?"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그러니까…. 이 섬으로 다가가는 배와 여인, 그리고 흰 포로 덮인 관이요."

이날 뵈클린이 베르나 앞에서 작업하던 그림은 '죽음의 섬'이었다. 뵈클린은 영생의 상징인 사이프러스가 우뚝 솟은 가상의 섬을 그리고 있었다. 사이프러스는 땅 한가운데 모여 빽빽한 숲을 형성하고 있다. 한 줄기 빛도 볼 수 없을 그 안에는 귀신과 정령만이 살고 있을 듯하다. 뵈클린은 이와 함께 찬 공기, 우주처럼 짙은 바다, 절절한 사연을 품은 듯한 풀과 바위도 함께 표현하고 있었다. 반듯하게 깎인 문(門)의 형태도 볼 수 있는데, 각각은 사람이 묻힌 무덤인 듯보인다. 풍경화와 상상화 등 두 장르를 모두 통달한 뵈클린이었기에 그릴 수 있는 그림이었다. 자식을 한아름 잃은 후 심연에 들어가 죽음만을 생각해본 그였기에 표현할 수 있는 세계였다. 남편의 죽음을 본 베르나가 이 그림에서 울림을 느낀 건 우연이 아니었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죽음의 섬(두 번째 버전)'

'여기에서 한 장면만 더 그려주세요….' 뵈클린은 베르나의 부탁을 곱씹었다. 그래서 그녀를 위한 두 번째 '죽음의 섬'을 그릴 때는 배 한 척을 함께 그렸다. 작고 검은 배에는 흰 옷을 입고 선 여인, 흰 포로 덮은 관이 있다. 이는 죽음에 대한 암시, 귀천을 위한 애도였다. 노를 젓는 이는 신화 속 카론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둠의 신과 밤의 여신이 낳은 카론은 사자를 저승으로 안내하는 뱃사공이다. 유유히 떠다니는 배는 곧 섬의 입구에 닿을 것이다. 그 사이 애도를 마친 여인은 관을 숲과 바위 품에 내줄 것이다. 이제 망자의 혼은 한없이 고요한, 더없이 잔잔한 이곳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림을 요청한 베르나는 죽은 남편도 이 섬에서 편히 쉬길 바랐다. 뵈클린이 다시 그린 '죽음의 섬'에는 예술가와 주문자 모두의 절절한 사연이 스몄다. 그래서일까. 마성의 매력을 품은 이 그림은 많은 이에게 깊은 인상을 줬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죽음의 섬(다섯 번째 버전)'

뵈클린에게 그림 주문이 이어졌다. 그는 같은 제목, 같은 구도로 세 점의 '죽음의 섬'을 더 완성했다. 뵈클린의 고향 스위스, 그가 머문 독일 등에서는 '죽음의 섬' 연작에 대해 '게르만의 영혼'이라는 찬사까지 내놓았다. 여태 뵈클린은 적당히 알려진 화가였다. 그런 그는 이 그림들 덕에 단숨에 거장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결국 그를 위대하게 만든 건 아름다운 풍경도, 사연 많은 신화 속 괴물과 요정도 아니었다. 아이러니하지만, 죽음에 대한 숱한 경험과 천착이 그를 대체할 수 없는 예술가로 이끌었다. 이는 말년의 뵈클린이 섬뜩한 그림에 집착한 이유기도 했다.

되살아난 페스트

그놈이 또 고개를 쳐들었다. 고대부터 중세 시대까지 수억명의 생명을 앗아간 병, 특히 중세 유럽 시절에는 인구 3분의 1 이상을 도륙한 최악의 균, 페스트였다. 19세기 중후반쯤 재창궐의 기회를 엿본 페스트는 끝내 유럽과 아시아를 다시 삼킬 기세로 퍼졌다. 뵈클린에게 이 소식은 재앙이었다. 1893년부터 이탈리아 피에솔레에 정착한 그는 곧 주변인까지 페스트에 걸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전염병으로 잃은 아이들이 거듭 떠올랐다. 더는 가만히 있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그림을 그렸다. 전염병의 무자비함, 이로 인해 빚어질 수 있는 최악의 사태를 경고하는 작품이었다. 아이에 여성, 노인 등 그 누구도 봐주지 않는 병, 일단 퍼지기 시작하면 온 집안을 풍비박산내는 병의 추악함을 한 화폭에 직관적으로 표현했다. 그게 뵈클린이 남긴 분노의 말년작 '페스트'였다.

뵈클린은 이 그림을 그리기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적이 있다. 그 이후부터 그는 보폭을 좁혔다. 그는 피에솔레에서 남은 생을 보냈다. 세상을 떠날쯤 뵈클린은 게르만 국가들 사이에서 최고의 화가로 대우받았다. 당시 독일의 거의 모든 중산층 집에 '죽음의 섬' 복제화가 걸려 있을 만큼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1901년에 삶을 마감했다. 그제야 먼저 보낸 여덟 명의 자식 곁으로 갈 수 있었다. 그가 다섯 번이나 그린 '죽음의 섬'에 실제로 닿을 수 있었다. 죽음의 트라우마가 깊이 박힌 그의 상상 속 그림들은 초현실주의 화가인 조르주 데 키리코, 살바도르 달리에게 영향을 줬다. 구스타프 말러,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 등 음악가도 작곡에 영감을 받았다. 스위스는 뵈클린을 19세기 대표 화가로 꼽고 있다. 2001년에는 뵈클린 서거 100주년을 맞아 그의 자화상을 우표로 발행했다.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아놀드 뵈클린, '죽음의 섬(세 번째 버전)'

한편 뵈클린에게 심취한 뜻밖의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아돌프 히틀러였다. 한때 화가를 꿈꾼 히틀러는 뵈클린의 그림 11점을 소유할 만큼 그에 대해 애정을 보였다. 뵈클린이 그린 '죽음의 섬'의 세 번째 판도 히틀러 손에 넘어간 적이 있다. 지금도 이 그림은 독일 베를린의 국립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히틀러가 뵈클린에게 푹 빠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히틀러는 심각한 건강 염려증을 앓았다. 감기에 걸린 사람과는 잠깐의 면담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는 자신이 일찍 죽을 것이라는 강박까지 달고 살았다. 그런 그가 뵈클린의 으스스한 그림을 보고 묘한 공감대를 느낀 게 아닐까. 물론 뵈클린은 자신을 향한 독재자의 무서운 집착을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의 생이 겹친 적은 있지만 이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뵈클린이 사망한 해 히틀러는 고작 열두 살이었으니.

〈참고자료〉

런던 내셔널 갤러리

티센보르네미차 미술관

Arnold Bocklin, Ostini, Fritz Von, Severus

“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이원율의 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후암동 미술관 작품 편 읽는 순서〉

1)“내 딸이 얼어죽을뻔 했어!” 식은 욕조에 女모델 뒀다가 소송갈 뻔한 사연[후암동 미술관-존 에버렛 밀레이 편] - 오필리아 (2023. 9. 2.)

2)“그녀 남친을 제가 죽였어요” 짝사랑 훔쳐보던 괴물, 무슨 짓을 벌였나[후암동 미술관-오딜롱 르동 편] - 키클롭스 (2023. 9. 16.)

3)“몸값만 900억원 이상!” 13명 품에 안긴 男실종사건…정말 화형 당했나[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가셰 박사의 초상 (2023. 9. 30.)

4)“그남자 목을 주세요” 춤추는 요부의 섬뜩한 유혹…왕은 공포에 떨었다[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모로 편] - 유령(환영) (2023. 10. 14.)

5)“전염병이 내 아기 다섯을 죽였어요” 피눈물 아빠가 본 ‘사신’은 이랬다[후암동 미술관-아놀드 뵈클린 편] - 페스트 (2023. 10. 28.)

〈후암동 미술관 신화 편 읽는 순서〉

1)“독수리가 간 쪼아도 참는다” 최악고문 받는 男, 무슨 사연[후암동 미술관-프로메테우스 편] (2023. 9. 9.)

2)“도저히 못참겠어” 봉인 푼 그녀, 외마디 비명…惡은 그렇게 쏟아졌다[후암동 미술관-판도라 편] (2023. 9. 23.)

3)“네 엄마 뼈를 던져라” 화들짝 놀란 명령…울면서도 할 수밖에[후암동 미술관-데우칼리온 편] (2023. 10. 7.)

4)“앗, 아파” 근육질 아기가 빨아들인 모유…뻥 걷어차고 싶었지만[후암동 미술관-헤라클레스 편] (2023. 10. 21.)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모더니즘①)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모더니즘②)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무자비한 짐승男인 줄 알았는데” 쫙 빼입은 신사 등장, 모두 놀랐다[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행복의 야수(야수파) (2023. 8. 26.)

5)“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개념미술) (2023. 6. 10.)

6)“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7)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8)“나나 네 엄마나 죽느냐 사느냐한다” 190㎝ 키다리 아저씨, 딸에게 한 고백[후암동 미술관-김환기 편] -붓을 든 시인(추상표현주의 특별편) (2023. 8. 19.)

9)“관음男-노출女가 만났네요” 조롱…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후암동 미술관-살바도르 달리 편] - 위대한 쇼맨(초현실주의) (2023. 7. 8.)

10)“여자랑 사느니 맹수랑 살겠다” 아내앞서 폭언…‘전쟁같은 사랑’을 한 부부[후암동 미술관-에드워드 호퍼 편] 고독의 화가(불모지) (2023. 8. 5.)

11)“난 고깃덩어리, 죽으면 시궁창에 던져버려” 폭탄발언…그는 ‘인간중독’이었다[후암동 미술관-프랜시스 베이컨 편] 고통의 화가(외딴섬) (2023. 7. 29.)

12)“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팝아트) (2023. 6. 3.)

13)“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신표현주의) (2023. 5. 27.)

14)“엄마가 사라졌다, 속이 시원했다”던 그녀도 실종…1년뒤 ‘뜻밖’의 발견[후암동 미술관-아그네스 마틴 편] - 홀로 선 은둔자(미니멀리즘) (2023. 8.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