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화가
불모지
<동행하는 작품>
철길 옆집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
햇빛 속의 여인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여보!"
"…."
그러면 그렇지. 조세핀 니비슨은 입을 꾹 다문 에드워드 호퍼를 보고 혼잣말을 했다. 차라리 벽에 대고 말하는 게 낫겠어. 휴. 니비슨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을 타고 들어온 빛이 방 한가운데 드러누웠다. 햇살 속에서 먼지가 춤을 췄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렸다. 이 시간, 이 순간이 어떤 이에게는 일요일 아침처럼 성스럽게 보일 것이었다. 1961년, 미국 뉴욕에서 맞이하는 어느 날이었다.
"내가 새벽에 어딜 다녀왔는지 궁금하지 않았어요?"
니비슨은 호퍼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날 때부터 고요함을 견디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상대가 침묵하면 내가 두 배로 말하면 된다는 게 그녀의 신조였다. 역시나 호퍼는 침묵했다. "그냥 혼자 산책했어요.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점점 꽃과 풀이 좋아지는 것 있지요. 아침에 동네를 돌다보면 동네 들꽃을 실컷 볼 수 있어요." 니비슨은 호퍼의 실룩이는 눈썹을 봤다. 오, 내 말을 듣고는 있었다! 니비슨은 신이 났다. "푸른 하늘, 철길을 달리는 아침 기차, 가끔은 이층집 테라스에서 멍하게 있는 사람들도 구경할 수 있어요." 니비슨은 계속 떠들었다. "그렇군." 니비슨은 흠칫했다. 오랜만에 듣는 호퍼의 중저음 톤이었다. "에드, 지금 내 말을 듣고 대답한 거예요?" 끄덕. "세상에. 오늘 뭘 잘못 먹었어요?" "그런 것 없어." 호퍼는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나, 오늘 있었던 일 더 말해도 될까요?" "그래." "혹시 그 전에 진한 커피 한 잔씩?" "그건 됐어." 니비슨은 호퍼의 단호함에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니까, 오늘 산책 중에 스미스 부부를 봤어요."
"그 의사 부부?" 니비슨이 호퍼의 말을 받고 이어갔다. "맞아요. 둘이 손잡고 걷는 게 어찌나 좋아 보이던지! 나는 평생 못해본 일인데 말이에요." 흠, 흠. 니비슨은 헛기침을 했다.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니고…. 스미스 씨가 당신 그림에 큰 감동을 받았다고 해요. 대체 뭘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런 그림을 그릴 수 있느냐고. 당신 머릿속을 해부(dissection)하면 무엇이 있을지 궁금하다는데, 참 유쾌한 사람들이에요." "아니, 내가 듣기에는 끔찍한데." 호퍼가 질색했다.
"에드, 그런데요. 나는 그 사람들 말을 듣고 좀 슬펐어요."
"왜?" 방금만 해도 신나서 말하더니… 호퍼가 되물었다. "왜, 또 갑자기 슬퍼? 여자 마음은 참 이해할 수가 없어." 고개를 저었다. "아니, 들어봐요. 나는요. 그 부부의 물음에 어떤 답도 할 수 없었어요." 니비슨의 말에 호퍼가 헛웃음을 지었다. 또 시작이라는 표정이었다. "왜냐고요? 나도 당신을 모르잖아요. 반평생을 같이 산 남편인데, 그렇게 매번 뚱하게 있으면 내가 뭘 알겠어요?" 니비슨이 차츰 격양했다. 스미스 부부 일을 떠올리자 서러움이 예고 없이 밀려왔다. 그래, 이러면 호퍼는 또 입을 꾹 닫을 거야. 늘 그랬듯. 니비슨은 생각했다. "….조. 당신은 나에게 무엇이 그렇게 궁금한데?" 호퍼가 예상 밖의 말을 했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깜짝 놀란 조세핀은 토끼 눈을 뜬 채 침묵을 깼다. "전부 다요."
그림용 칠판에 쓴 글…‘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
"'호퍼는 어쩌다 화가가 됐답니까?'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은 이거예요. 당신이 매번 뭐 씹은 표정으로 있으니, 매니저 같은 나한테 물어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나는 이 흔한 질문조차 제대로 대답을 못 했어요. 왜? 나도 모르니까!"
"음…. 화가가 된 이유? 나도 잘 모르겠어. 나는 늘 그림을 그렸어."
"더 이야기해봐요. 무엇이든."
"…언젠가 친누나가 내게 말한 일인데, 한번은 꼬마였던 나에게 뭘 물었더니 내가 대답 대신 그림을 그려줬다는군."
호퍼는 1882년 미국 뉴욕주(州) 나이액 내 중산층 집안에서 출생했다.
어릴 적 호퍼는 잡화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 아버지는 선대(先代)와 달리 사업 수완이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남다른 감수성이 있었다. 그런 그 덕에 몽테뉴와 빅토르 위고, 이반 투르게네프 등 위대한 작가들을 알 수 있었다. 꼬마 호퍼는 그때부터 그림을 그렸다. 한 손에는 책, 다른 손에는 연필을 쥐었다. 호퍼는 위고의 '레 미제라블' 속 장 발장이 은식기를 훔치다가 붙잡히는 모습을 상상해 그려봤다. 투르게네프의 '첫사랑' 속 16살 소년 블라디미르가 21살 처녀 지나이다에게 반하는 순간을 떠올리며 끄적였다. 그의 스케치북에는 책 삽화 같은 그림이 가득찼다. 그쯤 호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그림용 칠판을 받았다. 호퍼는 거기에 이렇게 썼다. 'ASPIRING ARTIST(나는 화가가 될 것이다).' 화가가 된 이유를 놓고 호퍼는 "잘 모르겠다"라고 했지만, 독서광 아버지가 없었다면 그는 다른 길을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를테면 선박이다. 그는 실제로 요트를 각별히 좋아했다. 뉴욕주 내 허드슨강과 바짝 붙은 나이액이 일대 요트 제작의 중심지였기에 더욱 관심도 쏟을 수 있었다. "한때는 배에 관심이 많아 선박 디자이너가 될까도 했지만, 결국 난 화가가 됐다." 호퍼 또한 훗날 이렇게 돌아본다.
호퍼는 이미 자기 서명이 담긴 유화를 낼 수 있었다.
고작 13살 때였다. 1899년, 호퍼는 뉴욕 체이스 미술학교(파슨스 디자인 대학의 전신)에 입학했다. 호퍼는 원래 삽화에 더 흥미를 가졌다. 호퍼의 부모도 그가 삽화가가 돼 월급을 따박따박 받고 살길 바랐다. 하지만 호퍼의 지향점은 교사 로버트 헨리를 만나고 크게 바뀌었다. 헨리는 그의 학생들이 큰 꿈을 갖길 바랐다. 틈만 나면 아이들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데려갔다. 이들에게 프란시스코 고야, 디에고 벨라스케스, 프란스 할스 등 그 시절의 선구적 예술가를 소개했다. 헨리는 학생 중에서도 호퍼를 관심있게 봤다. 헨리는 학생들의 그림을 벽에 붙인 후 마음에 들면 'O', 별로면 'X' 표시를 하곤 했다. 호퍼의 습작에는 언제나 'O'가 붙어있었다. 헨리는 호퍼가 프랑스로 유학을 하게끔 이끌기도 했다. "온 세상을 흔들 수 있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헨리는 그에게 입버릇처럼 이런 말을 했다.
"헨리 선생님! 반가운 이름이군요. 나도 그분을 기억해요. 나는 헨리 선생님의 모델 일을 한 적도 있었지요. 지금은 이래 봬도 그때는 내가 그 학교에서 당신의 1년 후배였으니까요."
"그랬지."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에드, 그런데요. 그때 당신은 왜 나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았어요?"
"헨리 선생님이 따로 부르지 않는 한, 나는 수업이 끝나면 집에 가기 바빴어."
파리서 길을 찾다…“나는 피카소를 모른다”
"그래서 결국 프랑스로 유학을 한 것이지요?"
"맞아. 4년간 세 번쯤."
1906~1910년, 호퍼는 프랑스 파리를 3차례 방문했다.
호퍼가 가장 먼저 간 곳은 살롱 도톤(Salon d’Automne·매년 가을 파리에서 열리는 미술 전람회)이었다. 호퍼는 펠릭스 발로통, 알베르 마르케의 그림에 감명받았다. 그 또한 이들처럼 자기만의 지향점이 농밀하게 채워진, 시류와 유행을 타지 않고 그저 "이건 호퍼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작품을 그리고 싶었다. 이 생각은 훗날 호퍼가 현대미술의 맹아(萌芽)격인 입체주의와 추상표현주의 등에 한눈팔지 않는 버팀목이 된다. 호퍼는 일대 미술관과 전시회도 열심히 탐방했다. 그는 렘브란트 반 레인의 야경을 가장 좋아했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가 일품이었다.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멋지다." 호퍼의 감상평이었다. 이때의 감동은 훗날 호퍼가 밝음과 어두움의 대비를 즐겨 활용하게끔 이끌게 된다.
보수적인, 그리고 고전적인 화풍에 마음이 끌린 호퍼는 비교적 급진적인 화풍에 당연히 질색했다.
부담스럽다는 이유였다. 가령 원근법을 깨부순 폴 세잔, 추상회화 길을 튼 바실리 칸딘스키, 건드리지 않은 게 없는 파블로 피카소…. 누군가가 그래도 동년배 피카소(둘은 한 살 차이였다)는 알아두면 좋지 않겠느냐고 하면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나는 피카소에 대해 들은 기억이 없어(알고 싶지 않아)."
호퍼가 파리에서 배운 건 또 있었다.
환한 색채였다. 호퍼는 파리의 하늘, 빛을 반사하는 건물, 윤슬이 떠다니는 센강을 좋아했다. 호퍼는 원래 어두운 톤의 물감을 즐겨 썼다. 그런 그가 파리의 햇살, 그 밑에서 춤을 추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생기에 물들어 밝은 톤의 물감을 짰다. 붕붕 대는 벌, 야외 테이블에 앉은 사람, 차려입고 극장에 들어가는 남녀를 관찰했다. 그렇게 혼자, 조용히, 계속.
파리 물을 잔뜩 머금고 온 미국 유망주에게는 이제 성공만 있을 줄 알았다.
1913년, 호퍼는 뉴욕 아모리 쇼(The Armory Show·미국 최초의 국제 현대미술전)에서 그림 '항해'를 팔았다. 250달러를 벌었다.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만만치 않았다. 호퍼는 곧장 새로운 야심작을 선보였다. 높이 91.8㎝, 폭 182.7㎝의 큰 작품이었다. 가장 눈에 띄는 건 분칠을 한 광대였다. 또 시선을 사로잡는 건 광대가 안쓰러운 듯 은근하게 쳐다보는 여성이었다. 이들 주변에는 흔히 볼 수 있는 차림의 남녀가 단역처럼 깔려있었다. "프랑스의 사순절 축제 중 피에로와 얼굴을 하얗게 칠한 여성을 봤어요." 파리 시절 호퍼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썼다. 이 그림에 그때 풍경을 담았다. 피에로는 당연히 파리의 이방인, 호퍼 자신이었다. 호퍼는 사람들이 이 그림을 보고 감상에 젖길 바랐다. 거룩함이니, 숭고함이니 그런 건 모르겠고 그저 공감해주기를 기원했다. 쓸쓸한 듯 자유로운, 외롭지만 이렇게 조금 더 있고 싶은 몽글몽글함에. 제목은 '푸른 저녁'이었다. '여름날 푸른 저녁이면, 나는 들길을 가리라. (…) 아무런 말도, 생각도 하지 않으리. 그러나 무한한 사랑은 내 마음속에서 피어날 것이다. 나는 가리라, 멀리, 더 멀리, 집시처럼. 여인과 함께 가듯 행복하게, 자연 속으로.' 아르튀르 랭보의 고요하고 단단한 시 '감각'에서 따온 것이었다. 하지만 호퍼의 이 그림은 큰 관심을 얻질 못했다. 외려 부록처럼 끼워서 선보인 그림 '뉴욕 코너'가 더 좋은 평을 받았다. 나 혼자 오버한 거였어? 호퍼는 혼란스러웠다. 내 운은 여기까지인가? 호퍼는 '푸른 저녁'을 둘둘 말았다. 가구 한쪽에 처박았다.
"푸른 저녁? 그 그림은 지금 어디 있는데요?"
"나도 몰라."
"정말 매정하네요."
"확실한 건, 그 일을 겪고서 거의 10년간 단 한 점의 작품도 팔지 못했다는 거야. 이대로 끝인가 싶었어."
"하지만 다행히 아니었지요. 그게 언제부터였지요?"
"그건 알고 있지 않아? 당신을 만나고 난 후부터지."
※에드워드 호퍼의 '푸른 저녁'은 그가 죽고 난 후에야 발견됐다.
‘니비슨의 마법’…유망주, 드디어 터졌다
"나는 그쯤 우울증 때문에 각성제를 먹었어. 끝이 안 보이는 긴 터널을 걷는 듯했어."
"그래요? 전혀 몰랐군요."
1923년, 호퍼는 니비슨과 다시 마주했다.
호퍼가 매사추세츠주의 항구 도시에서 여름을 보낸 때였다. 바닷가 집이나 수채화로 그리면서 마음을 추스르던 시기였다. 호퍼는 자기와 정반대인 니비슨에게 끌렸다. 호퍼는 키가 2m에 가까울 만큼 크고, 조용했고, 보수적이었다. 반면 니비슨은 고개를 든 호퍼 눈에선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작고, 쉴 새 없이 떠들고, 자유분방했다. "해변 스케치가 멋지군요." 호퍼의 그림을 본 니비슨이 눈을 찡긋했다. 호퍼로서는 오랜만에 듣는 따뜻한 말이었다. 호퍼가 이 항구 도시에서 그린 그림은 뜻밖의 호평을 받았다. 팔리기도 했다. 이 또한 오랜만에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호퍼와 니비슨은 결혼했다. 둘 다 마흔이 넘은 나이였다. 호퍼는 니비슨을 '조', 니비슨은 호퍼를 '에드'라고 부르길 좋아했다.
니비슨의 마법일까.
1925년, 터질 듯 터지지 않던 호퍼가 드디어 주목받았다. 그림 한 점이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철도 앞에 빅토리안 풍 집이 우뚝 섰다. 덜커덩, 육중한 열차가 지나가면 집 또한 흔들릴 듯하다. 석탄과 기름 냄새만 진동할 뿐, 사람의 기운이라고는 전혀 느낄 수 없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미국은 눈부신 성장을 이어갔다. 그러나 그런 미국 또한 승자의 혼미를 피할 수 없었다. 화려한 파티 후에는 허무한 뒷수습이 따라왔다. 난장의 행사가 끝난 뒤에는 허탈한 뒷정리를 해야 했다. 미국 매스컴은 크리스마스의 시끌벅적한 쇼핑몰을 연일 조명했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실제로는 황량한 크리스마스를 맞는 이가 더 많다는 점을. 모두가 웃고 떠들지만, 사실은 모두가 외롭고 고독했다. 미국이 낳은 그 말, '군중 속의 고독'이 전염병처럼 퍼졌다. 호퍼의 그림 '철길 옆집'은 그런 미국인들에게 위로를 줬다. 때로는 슬픈 노랫말이 힘이 되는 것처럼, 상실감을 환기해 카타르시스를 느끼도록 했다. 다만 호퍼가 이를 의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는 이런 말만 했다. "모든 답은 캔버스에 있어."
"'미국의 풍경을 다룬 화가'라는 평은 어땠어요?"
"촌스러운 말이었어."
"왜요?"
"그렇다면 렘브란트는 네덜란드의 모습을 그린 화가인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프랑스의 풍경을 다룬 화가인가? 나도 그들처럼 그냥 그린 거야. 렘브란트나 쿠르베처럼 나 자신을 캔버스에 표현했고, 내 주변을 표현했을 뿐이었어. 날 더러 리얼리스트라느니, 미국의 정신이라느니…. 그런 걸 내가 왜 뒤집어써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어."
불모지를 택한 그…결국 폴록과 나란히 서다
"잭슨 폴록처럼 추상 회화를 할 생각은 없었어요? 그쯤 폴록은 미국 화가, 나아가 모든 현대미술 화가의 교주 같았는데."
"전혀."
"당신은 추상 표현주의에 늘 질겁했지요."
"자연을 그리는 데 있어 더 이상 진전은 없다는 게 그들 생각이었어. 그래서 표현 방식을 더 단순하게 바꾼 것이고. 하지만 말이야. 추상 표현주의라는 말은 번듯하지만, 결국은 그 또한 해독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사조 중 하나가 아닐까."
호퍼는 자기 화풍을 불모지로 표현했다.
호퍼의 시절 현대미술은 폴록의 액션페인팅, 그에게 바통을 받은 윌럼 데 쿠닝과 마크 로스코 등의 추상 표현주의를 지지대로 삼았다. 추상을 떠받든 현대미술은 더는 구상(具象)을 그리워하지 않을 것처럼 매몰찼다. 그러나 추상에 취한 현대미술의 호기는 오래 가지 못했다. 첫째는 예술가들의 빈곤한 상상력이었다. 둘째는 대중과의 괴리였다. 사실 이게 결정적이었다. 대중은 추상을 곱게 보지 않았다. 뭘 그린건지 당최 알 수 없었다. 무언가 있긴 있나보다, 하고 봐줬더니 자꾸 선을 넘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대중은 다시 돌아봤다. 더는 관심을 주지 않아 불모지가 된 구상회화의 땅을 추억했다. 호퍼는 여전히 거기에 있었다. 버려진 거친 땅에 그대로 있었다. 추상에 실망한 대중이 하나둘 돌아왔다. 그렇게 '추상은 현대미술, 구상은 고전미술'이라는 편견도 깨졌다. 이제 추상은 추상대로, 구상은 구상대로 미래를 향해 나아갔다. 그쯤 추상의 제국을 주도자가 폴록이었다면, 구상의 왕국을 이끈 지도자는 호퍼였다. 호퍼 등으로 인해 부흥한 구상의 세계는 곧 프랜시스 베이컨, 키스 해링, 장 미쉘 바스키아 등을 타고 새로운 전성기를 맞는다.
'철길 옆집' 이후 호퍼는 특유의 밀도감 있는 그림으로 승승장구했다.
1942년, 호퍼는 니비슨과 종종 찾은 뉴욕의 24시간 식당에 영감을 얻어 그림을 그렸다. 차려입은 남녀 한 쌍이 바 안쪽에 앉아있다. 멀끔한 직원이 맞은 편에서 둘을 응대하고 있다. 중절모를 쓴 남성이 이들과 한 뼘 떨어진 곳에서 등을 진 모습이다. 할 말이 많지 않은 듯한 남녀, 늘 하는 일을 되풀이하는 직원, 홀로 생각에 잠겨있는 남성이 한 공간에서 밤을 지새우고 있다. 물리적으로는 함께 있지만, 심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있다. 환한 형광등 불빛이 식당에 넘실대고 있다. 이 빛은 식당 앞 인도까지 침투했다. 그 덕일까. 바깥 또한 촬영 끝난 영화 세트장처럼 고요하고 적막할 뿐, 어떤 위협도 느낄 수 없다. 식당 상단에는 당시 5센트짜리였던 대중적인 담배 '필리스 시가' 광고가 걸려있다. 어느 맑은 날의 밤, 깔끔한 거리, 티끌 하나 없는 유리창. 그리고 외로움과 고립, 도시 속 멜랑꼴리(melancholy)…. 제목은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이었다. 호퍼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본)장면을 상당히 단순화했고, 식당은 (실제보다)더 크게 그렸어요. 무의식적으로 대도시의 쓸쓸함을 그리고 있었던 것 같긴 해요." 호퍼의 그림에는 일관성이 있었다. 식당과 주유소, 극장과 아파트, 호텔 방과 아파트 테라스 등 전형적인 도시 모습이 나타났다. 빈 의자, 조용한 거리, 앉아있는 여인 등이 등장했다. 그 풍경은 덧없고, 단조롭고, 절절하고, 담담했다.
"당신은 홀로 있는 그 상태를 유지하라. 그들의 혼돈으로 들어가지 말라."
"누구 말인지 알아요. 랄프 왈도 에머슨,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미국 시인이지요?"
"그래."
전쟁 같은 사랑…니비슨은 모든 걸 포기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자리를 잡았군."
"그렇죠. 하지만 그게 우리의 성공은 아니었지요. 나는 모든 게 끝났으니."
"또 시작이군."
"난 정말 좋은 화가가 될 자신이 있었어요. 당신만큼."
호퍼는 결혼 후 끈질기게 니비슨을 그렸다.
그는 니비슨을 모델로 해 여러 여성의 상(狀)을 표현했다. 호퍼의 붓끝에서 니비슨은 해가 내리쬐는 작은 방, 자동판매기가 있는 식당, 서늘한 거리와 바닷가에서 나타났다. 니비슨은 호퍼가 요구하는 모든 분위기를 소화했다. 그녀는 그렇게 때로는 미래를 고민하는 소녀, 풍파에 지친 처녀, 사별한 여인 등의 모습으로 등장했다. 니비슨과 결혼한 그해에 개인전을 연 호퍼는 모든 그림을 다 팔아치웠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과 휘트니 미술관 등 대형 기관들도 그림에 눈독을 들였다. 호퍼에게 니비슨은 최고의 뮤즈이자 행운의 여신이었다.
이렇게만 보면 아주 낭만적인 부부의 상이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둘의 사이는 좋지 않았다. 대체 왜 같이 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최악일 때도 많았다. 호퍼는 분명 니비슨의 그림 재능과 안목, 독립적인 성격과 자유분방한 태도에 반해 결혼했다. 그런 호퍼가 니비슨을 아내로 맞아들인 후부터는 그녀에게 순종적인 아내 역할을 강요했다. 둘의 관계가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한 건 니비슨이었다. 한때 파리에서 열린 '미국의 화가전'에 작품을 낼 만큼 실력을 갖췄던 니비슨은 이제 호퍼의 매니저 역할만 수행했다. 니비슨은 숫기 없는 호퍼 대신 그의 후원자들과 친목을 다졌다. 호퍼에게 오는 편지에 일일이 답장을 썼고, 호퍼 작품에 대한 장부를 직접 관리했다.
호퍼는 이제 그림만 그리면 걱정할 게 없었다.
니비슨이 나머지는 다 알아서 처리했다. 그런데도 호퍼는 사석에서 니비슨을 종종 크산티페(소크라테스의 악처)로 표현했다. "여자 한 명과 사는 건 말이야. 호랑이 두세 마리랑 사는 일과 맞먹어"라며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에드랑 함께 있는 것? 그냥 우물에 돌을 던지는 일과 같아. 차이점은 있어. 우물에 던진 돌과 달리 쿵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는 거야." 그때마다 니비슨은 우아하게 받아치곤 했지만.
니비슨은 종종 호퍼에게 투덜댐을 넘어 폭언도 들어야 했다.
"볼품없는 그림을 또 그리는군." 니비슨이 틈틈이 그림을 그리면 호퍼는 꼭 어디선가 튀어나와 이따위 말을 했다. 니비슨은 운전에 서툴렀다. 특히 주차를 어려워했다. 사고가 날 뻔도 했다. 호퍼는 니비슨이 운전하는 것을 싫어했다. 기어코 운전을 하면 주차만큼은 자기가 하려고 했다. 이 과정 중 호퍼가 니비슨에게 온갖 거친 말을 하며 두 다리를 잡아당겨 차에서 끌어내린 적도 있었다. 니비슨도 그런 폭군에게 반항했다. 호퍼를 할퀴고 때렸다. 온 동네에 울릴 만큼 소리도 질렀다. 둘은 죽을 때까지 충돌과 화해를 반복했다. 말 그대로 전쟁 같은 사랑이었다. 호퍼는 니비슨이 없으면 자기도 이 정도 성과를 낼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호퍼도 그 나름대로는 자기가 니비슨을 특별히 여긴다는 점을 티내려고 했다. 가령, 호퍼가 그렇게나 좋아하는 연극에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니비슨 뿐이었다. 니비슨 또한 일기에 호퍼를 원망하는 글을 썼지만, 그의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의 절절한 감탄도 빼놓지 않고 기록했다.
"우리가 같이 산 지 얼마나 됐지요?"
"음, 글쎄. 40년쯤?"
"비슷했어요."
두 희극배우의 퇴장…“지금껏 봐줘서 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에드. 이제 옷 좀 입어도 돼요?"
"그래. 벌써 해가 지는군."
"오늘 그림은 마음에 들어요?"
"고생했어."
"오늘은 왜 갑자기 말문이 터졌어요?"
"…."
우리에게 이런 시간이 얼마나 더 남았을까 해서.
호퍼는 마지막 말을 삼켰다. 이날도 호퍼는 온종일 니비슨을 그렸다. 나체의 니비슨을 우수에 젖은 금발의 여인으로 표현했다. 니비슨이 찬 공기에 덜덜 떠는 걸 알고서도 붓질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림 속 벌거벗은 금발 여성은 창 쪽을 가만히 보고 있다. 오른손에는 담배를 쥐고, 뒤편에는 정돈되지 않은 이불과 하이힐을 둔 채 감상에 젖어있다. 그림은 전혀 관능적이지 않다. 그저 그녀의 여러 사연을 상상하게 할 뿐이다. 여성은 왜 홀로 서 있을까.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동굴 같던 남편과의 지난 세월? 찬란한 꿈과 눈부신 재능을 접은 후 따라오는 뒤늦은 후회? 아니면, 그럼에도 이번 삶은 가치가 있었다는 위로? 호퍼는 이 그림의 제목을 '햇빛 속의 여인'으로 지었다.
이들의 장르는 황혼이 된 후에야 로맨스로 바뀌었다.
말년의 호퍼와 니비슨은 나란히 병원에 입원했다. 호퍼는 5층, 니비슨은 3층이었다. 호퍼는 니비슨을 보기 위해 거의 매일 3층으로 갔다. 니비슨도 그런 호퍼를 기다렸다. 호퍼는 몇 차례 전립선 수술을 받는 등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호퍼는 위기를 이기지 못했다. 그는 1967년, 워싱턴 스퀘어 인근에 있는 자기 스튜디오에서 죽었다. 85세였다. "예술가 중 90%는 죽고서 10분 안에 잊히고 말아." 호퍼의 말이었다. 하지만 그는 90%가 아니었다. 호퍼가 죽은 후 니비슨은 그가 잊히지 않도록 애를 썼다. 니비슨은 호퍼와의 공동 소장품 2500여점을 휘트니 미술관에 기증했다. "내 남편의 진가를 알아봐줘 고마웠습니다." 이 말과 함께였다. 그렇게 호퍼의 이름이 미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에 영원토록 남게끔 했다. 니비슨도 곧 사망했다. 호퍼가 죽고서 1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호퍼는 죽기 직전, 최후의 작품 '두 희극배우'를 완성했다.
광대 복장을 한 남녀가 손을 맞잡고 무대에서 고별인사를 하는 모습이다. 누가 봐도 남성은 호퍼, 여성은 니비슨이었다. 호퍼는 니비슨을 피에로로 그리며 그녀의 다재다능한 재능, 희생적인 사랑에 대해 경의를 표했다.
"에드."
"응?"
"이제 갈 시간이에요."
"그렇군."
"작별 인사를 해야지요."
"어떻게?"
"지금껏 우리의 희극을 봐주셔서 고맙습니다고요."
〈참고자료〉
에드워드 호퍼, 세르지오 로씨, 조반니 스카르두엘리, 이유출판
호퍼 A-Z, 얼프 퀴스터, 한길사
Edward Hopper's New York, Conaty, Kim, Whitney Museum of Art
Hopper, Renner, Rolf G, Taschen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모더니즘①)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모더니즘②)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개념미술) (2023. 6. 10.)
5)“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6)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7)“관음男-노출女가 만났네요” 조롱…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후암동 미술관-살바도르 달리 편] - 위대한 쇼맨(초현실주의) (2023. 7. 8.)
8)“여자랑 사느니 맹수랑 살겠다” 아내앞서 폭언…‘전쟁같은 사랑’을 한 부부[후암동 미술관-에드워드 호퍼 편] 고독의 화가(불모지) (2023. 8. 5.)
9)“난 고깃덩어리, 죽으면 시궁창에 던져버려” 폭탄발언…그는 ‘인간중독’이었다[후암동 미술관-프랜시스 베이컨 편] 고통의 화가(외딴섬) (2023. 7. 29.)
10)“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팝아트) (2023. 6. 3.)
11)“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신표현주의) (2023. 5.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