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신화
액션페인팅
<동행하는 작품>
원을 자르는 달의 여인
연보랏빛 안개 넘버 1
심연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풋내기 주제에 날 기다리게 해!"
1942년, 미국 뉴욕의 아파트. 예술품 수집계의 거물 페기 구겐하임이 팔짱을 끼고 섰다. 왼발로 바닥을 거듭 찧었다. "건방진 녀석 같으니." 족히 한 시간은 흘렀다. 손목시계 초침이 재깍재깍 돌아갔다. 구겐하임은 헛웃음만 나왔다. 그자는 여전히 올 기미가 없었다. "제가 꽤 참신한 유망주를 찾아냈는데요." 얼마 전, 구겐하임은 조수 하워드 퍼츨의 들뜬 표정을 봤다. "누군데?" "젊은 미국 화가예요. 와이오밍주(州) 출신이었어요." 심드렁한 구겐하임을 움직이게 한 건 이 말이었다. 때마침 그녀는 미국 태생의 젊은 신인을 찾고 있었다. 세계대전 포화를 피해 미국 땅을 밟는 유럽 예술가와 맞설 '토종' 예술가를 탐색 중이었다. "그 사람, 몇 살이야?" "이제 막 서른 살쯤 됐을걸요?" "딱 좋아. 날짜 잡아봐. 내가 봐야겠어." 구겐하임은 서둘러 빈 일정을 살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 약속의 순간이었다.
나와의 약속을 어겨? 배짱 좋군.
5층짜리 계단을 밟고 온 구겐하임이 다시 느릿느릿 내려가며 콧방귀를 뀌었다. 날 보고 싶어하는 예술가가 줄을 섰다는 걸 모르나? 어찌 이렇게나 무례할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열받았다. 밖으로 나가 운전 기사를 부르려는 참이었다. 그런데, 복도 한편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싸구려 술 냄새가 훅 와닿았다. "미쳤어, 정말!" 웬 여성의 목소리였다. "왜 또 술을 마셨어. 오늘이 어떤 날인지 잊었어?" "여기가…. 어디야? 뭐야?" 여성의 따끔한 질책, 뒤이어 남성의 혀 꼬인 주정이 들려왔다. 하, 저 녀석이겠군. 구겐하임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아파트 5층이었다.
이 사내의 방안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그녀 이름은 리 크래스너였다. 아직도 술에 덜 깬 이 남자와 같이 사는 사이라고 소개했다. "이 인간이 어제부터 술을 너무 마셨어요. 그러고는 친구 결혼식에 잠깐 간다더니, 식장 앞에서 퍼질러 자고 있었어요." 크래스너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녀 또한 화를 누르지 못한 듯했다. 구겐하임은 방에 걸린 이 자의 그림을 살펴봤다. 별 감흥은 없었다. 솔직히 파블로 피카소의 아류작 같았다. "잘 봤어요." 구겐하임은 더 있을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저 사람…. 괜찮아요?" 구겐하임이 휘적대는 남자를 보고 물었다. "난 괜찮소! 그림은 어떠오?" 갑자기 고개를 바짝 든 그가 스스로 대답했다. 구겐하임은 별말 없이 돌아섰다.
"페기. 그 사람 그림은 눈여겨볼 필요가 있어."
구겐하임은 혼란스러웠다. 피터르 몬드리안까지 주정뱅이 편을 들어줄지는 생각도 못 했다. "지금껏 미국에서 본 작품 중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야." 세상 고민은 다 떠안고 사는 그가 모처럼 흥분한 모습이었다. 그런 구겐하임에게 한 예술가가 결정타를 가했다. 마르셀 뒤샹이었다. 구겐하임이 안목으로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 남자 그림 봤어? 나쁘지 않지(Pas mal)?" 구겐하임은 알고 있었다. 뒤샹에게 '나쁘지 않다'는 평을 받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첫인상 탓에 내가 너무 나쁘게만 보는가. 그녀는 그 술꾼의 그림을 곱씹었다. 선은 거칠고 색도 투박했다. 돌아보니 야성(野性)은 있었다. 근육질 카우보이의 땀 냄새가 진하게 배어있는, 말하자면 미국의 정신 같은 게 있는 듯도 했다. 1년 뒤, 구겐하임은 그가 운영하는 '금세기 예술 갤러리'(The Art of This Century Gallery)에서 이 사내의 개인전을 열어줬다. 구겐하임의 후광을 업은 그는 꽤 주목받았다. 그림은 한 점도 팔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구겐하임은 이제야 이 자가 좋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누구든 달려들면 멱살을 잡아 올릴 듯한 난폭함이 물씬 묻어났다. 분명하다. 그는 곧 일을 낼 것이었다. 그의 이름은 잭슨 폴록이었다. 훗날 그는, '예술만은 삼류'라고 놀림당하던 미국을 현대미술의 주 무대로 만들어버린다. 정말로 대형 사고를 쳐버렸다.
태생적 불안…그는 항상 초조했다
잭슨 폴록은 1912년 미국 중서부의 와이오밍주 코디에서 출생했다.
다섯 형제 중 막내였다. 그쯤 가족은 안정을 찾아 미 서부를 전전했다.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지로 옮겨다녔다. 폴록의 어머니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다. 현실에 막혀 뜻을 접은 것이었다. 그런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그림을 권했다. 폴록 또한 이덕에 어수선한 와중에도 그림을 배울 수 있었다. 폴록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공예 미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하지만 그는 규칙적인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결과는 퇴학이었다. 1929년, 폴록은 여러 곳을 빙빙 돈 끝에 가장 트렌디(trendy)한 곳으로 왔다. 뉴욕이었다.
폴록은 다비드 알파로 시케이로스의 조수로 들어갔다.
당시 뉴욕은 멕시코에서 불어오는 벽화 운동의 열기를 느끼고 있었다. 그 시절 독재 타도를 내건 멕시코 혁명의 일부였다. 그때 벽화 운동을 이끈 화가가 화가 프리다 칼로의 남편 디에고 리베라, 또 한 명이 시케이로스였다. 그런 그가 때마침 뉴욕에 머물고 있었다. 폴록은 시케이로스의 조수로 두 가지를 익혔다. 하나는 기존 캔버스와는 견줄 수 없이 큰 화폭에서 그림을 그리는 법이었다. 또 하나는 물감을 바르는 걸 넘어 들이붓는 듯 색칠하는 기술이었다. 폴록은 시케이로스의 유산을 꿀꺽 집어삼켰다. 훗날 그는 이 방식을 자기만의 전매특허 기법으로 발전시켜 활용하게 된다. 1935년, 폴록은 미국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 미술 프로젝트에 나설 화가로 뽑혔다. 대륙 내 공공미술품을 만들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는 그 시절 대공황에 따른 실업 대책(뉴딜) 중 하나이기도 했다. 폴록에게 주어진 일은 때마침 벽화 그리기였다. 당연히 썩 괜찮다는 평을 받았다. 그는 이제 날개를 펼 준비를 했다.
사실 폴록에게 타고난 재능이 있다고 보긴 어려웠다.
초기 그림은 동시대 화가와 견주면 형편없었다. 자신도 "(나는)기교도 없고, 드로잉도 할 줄 모른다"고 했다. 그런 폴록이 어제보다 오늘 1㎝씩이나마 나아갈 수 있던 건 그의 격정적 성격 덕이었다. 무엇보다 폴록은 승부욕이 컸다. 맞붙으면 무조건 이겨야 했다. 지는 건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다. 처음에는 같은 길을 걷는 형을 이기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동료 화가들을 앞지르기 위해 내달렸다. 나아가선 동시대 거장들, 이를테면 피카소 같은 인간들의 콧대를 누르고 싶었다.
벽화 작업 등으로 이름을 알린 폴록은 웬만한 이들을 제치고 유망주로 꼽힐 만큼 성과를 얻었다.
그러나 이를 위해 엄청나게 혹사해야 했다. 범인(凡人)의 노력으로 천재의 소질을 쫓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폴록은 태생적 불안이 있었다. 그는 예민해도 너무 예민했다. 퇴학 사례에서 볼 수 있듯 폭력성이 있었다. 그런 그는 이제 우울증과 불안증도 겪었다. 매일 술을 마셔야 할 만큼 알코올 중독에도 시달렸다. 차에 기름을 넣고 도망치는가 하면, 술병을 든 채 길거리에서 배를 까고 잘 만큼 행동거지가 나빠졌다. 그의 실력이 쌓일수록 광기는 깊어졌다. 그는 툭하면 시비를 거는 싸움꾼이자, 아무 데나 소변을 갈기는 난봉꾼이었다. 폴록은 정신과 치료를 꽤 받았다. 하지만 그의 내면은 언제나 활화산 같았다. 폴록은 종종 벽에 머리를 처박는 등 내면을 폭발하지 않고선 견딜 수 없을 때를 겪었다. 그는 그때마다 고향의 거친 땅을 생각했다. 어릴 적 와이오밍주에서 본 장엄한 바위산을 떠올렸다. 드넓은 광야를 기억했다. 몇 안 되는 추억을 씹어먹으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니까, 구겐하임과 아파트에서 대면한 그때도 하필이면 그런 날이었다. 차에 치인 듯 예고 없이 울분에 뒤범벅이 된 날, 애써 바위산과 광야를 되새기며 마음을 붙잡던 날, 미친 듯 술을 마시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는 날이었다. 구겐하임과는 사실상 초면이었다. 그녀가 술 취해 비척대는 폴록의 상처나 속사정을 알 리 없었다. 다행히 실력과 잠재력으로 만회했지만.
피카소,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제기랄!"
또 분노가 물밀듯 덮쳐왔다. 폴록은 이젤을 걷어차버렸다. 캔버스가 요란하게 떨어졌다. 페인트가 사방에 낭자했다. 폴록은 구겐하임의 갤러리에서 연 개인전을 대실패로 여겼다. 그는 "입체파 거장 피카소를 흉내냈다"는 등 몇몇 평가에만 꽂혔다. 이겨 먹어야 할 스페인 출신의 잘난척쟁이 그 자식을 '뒤따르고 있다'는 말은 정말 참기 힘들었다. 나름 봐줄 만한 평도 있었지만 그런 건 제대로 읽지도, 듣지도 않았다. 구겐하임이 외려 그를 더 좋게 보기 시작했다는 점 또한 생각지도 못했다. "빌어먹을 피카소, 혼자서 다 해 처먹고 있어!" 폴록은 벽을 때렸다. 주먹에 피가 맺힐 만큼 격렬하게 내리쳤다. 사실 알고 있었다. 폴록은 피카소가 무서웠다. 그의 작품이 두려웠다. 무슨 짓을 해도 그 남자 손바닥 안일 게 분명해 보였다. 피카소 손끝에 모든 회화의 종점이 있는 것 같았다. 구겐하임을 등에 업고도 고작 이 정도니, 나는 내일이면 잊힐 테야. 폴록은 손으로 페인트 웅덩이가 된 바닥을 더듬었다. 색깔 범벅이 된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잡았다. 붓이 아닌 술이었다.
폴록이 지독한 열등감을 느낀 데는 이유가 있었다.
폴록은 첫 개인전에 당시 자기 대표작 '원을 자르는 달의 여인'을 내걸었다. 붓질은 강렬하고, 색채는 통통 튀는 그림이다. 언뜻 보면 무엇을 그린 건지 알 수 없다. 폴록이 인디언 문화에 대해 관심을 쏟았다는 점만 오른쪽 위 닭 볏 모양의 머리 장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바로 옆에 있는 건 칼인 듯하고, 그 주위로 물이 튄 양 퍼져있는 노란색은 달빛인 듯도 하다. 갖은 대상이 화폭에 골고루 펴 바르듯 배치돼 주제를 더 모호하게 만드는 모습이다. 누군가는 이 그림을 놓고 ▷여러 각도를 한 화폭에 담은 입체주의 ▷꿈속을 그린 듯한 초현실주의의 영리한 재조합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주 좋게 봐줬을 때야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폴록은 솔직히 인정해야 했다. 이 작품은 피카소가 내놓은 '게르니카'에서 진보한 점이 없다는걸.
뚝, 뚝.
폴록은 단상에 젖어있었다. 그런 그의 손가락 끝에서 페인트가 한 방울 떨어졌다. 때마침 비스듬히 깔린 화폭 위로 내려앉았다. 또르르…. 이 한 방울은 유리창에 맺힌 빗방울처럼 흔적을 남기며 움직였다. 두 번째 방울이 내려왔다. 세 번째, 네 번째….
폴록은 이 장면을 멍하니 쳐다봤다.
어? 갑자기 그의 눈이 일렁였다. 폴록은 술병을 내려놨다. 다시 바닥을 더듬었다. 이번에는 붓을 쥐었다. 붓을 페인트통에 푹 찍었다. 거칠게 빙글빙글 돌린 후 꺼냈다. 잘 씻지도 않아 빳빳해진 붓털 사이로 페인트가 또 후드득 떨어졌다. 폴록은 흠뻑 젖은 붓을 화폭 위에 올렸다. 검을 쥔 중세 기사처럼 붓을 마구 휘둘렀다. 당연히 캔버스에는 물감이 덕지덕지 뿌려졌다. 정신 차려보니 폴록은 숨을 가쁘게 헐떡이는 중이었다. 블랙아웃(Blackout)이 왔다 간 듯 드문드문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폴록은 캔버스를 봤다. 캔버스 위로는 세상에서 가장 독창적인 그림이 펼쳐졌다. 피카소는커녕, 라파엘로나 티치아노가 돌아와도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작품이 그려져있었다. 1947년, 폴록은 새로운 기법을 만들었다. 액션페인팅(Action painting)이었다. 그는 이를 통해 예술의 정의를 통째로 바꿨다.
‘액션페인팅’…단숨에 美대표 화가로
'잭슨 폴록은 미국의 가장 뛰어난 화가인가.'
1949년, 8월8일. 유명 잡지 라이프(Life)가 폴록을 한껏 띄웠다. 라이프는 폴록의 전면 화보를 실었다. 그를 위해 4페이지를 할애했다. 라이프가 한 화가에게 이렇게나 정성을 쏟는 건 그간 없던 일이었다. '피카소 아류' 말을 듣던 폴록은 갑자기 미국 최고의 화가로 떠올랐다. 톱스타 이상 인기, 소장 0순위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그 사이 무슨 일이 있었을까.
폴록은 이제 색을 칠하지 않았다.
그는 벽화만큼 거대한 캔버스를 질질 끌고 왔다. 바닥에 눕혔다. 그 위를 다니며 색을 뿌렸다. 붓을 내던지듯 휘둘렀다. 아예 페인트통을 들고서 콸콸 쏟아버렸다. 폴록의 예술은 이걸로 이미 시작된 것이었다. 마구 날뛰는 그 행위(액션·Action)부터가 예술의 막이 오른 것이었다. 물감을 마구 튀기고, 그걸로 모자라 모래와 유리 조각을 흩뿌렸다. 그는 캔버스 위에서 재즈 댄스를 추는 듯도 했다. 표정과 손짓, 발걸음 모두 예술의 과정이자 일부였다. "문자 그대로 (나는)그림 속에 있을 수 있었다. 그림과 더 가까이, (행위 그 자체로) 그림의 일부가 됐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폴록은 자기 행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비평가 해럴드 로젠버그가 여기에 꽂혔다. 그가 바로 폴록의 이런 행위를 놓고 '액션페인팅'이라는 말을 붙여줬다. 그는 폴록의 행위에서 이미 작품(페인팅·painting)을 마주한 듯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고 평가했다. 로젠버그는 폴록의 날뜀 끝에 탄생하는 그림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미 액션으로 만들어진 페인팅은 막을 내렸고, 결과물은 단지 흔적 내지 부산물뿐이라고 생각했다. 이렇듯 과정을 결과보다 중시하는 액션페인팅의 정신은 훗날 개념미술(conceptual art)에 영향을 준다. 개념미술 또한 예술의 비물질적 측면(개념), 즉 아이디어나 행위 자체를 물질적 측면(작품)보다 중요하게 여기게 된다.
폴록의 지원군은 또 있었다.
비평가 클레멘트 그린버그는 폴록의 결과물을 놓고 진정한 추상표현주의가 시작됐다는 취지의 주장을 펼쳤다. 그 대단한 피카소마저 피사체와 배경에 감히 이별 통보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의 폴록이 용기있게 이들과 결별했다는 말이었다. 비로소 순수한 2차원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었다. 폴록이 물꼬를 튼 추상표현주의는 그의 동료 화가들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그중 한 명이 마크 로스코였다.
그쯤 폴록은 운도 좋았다.
흰 민소매와 청바지만 입어도 태가 나는 근육질 몸, 카우보이 느낌의 터프한 기질, 야망 가득한 화끈한 성격…. 당시 미국은 조국의 얼굴이 될 예술가로 이런 남자를 찾았다. 미국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 등장하는 스탠리 같은, 위험하면서도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인간상이었다. (극 중 스탠리의 대사 : 행운이란 자신이 운이 좋다고 믿는 그 자체야. (…) 다섯 중 넷이 실패해도 나만은 성공할 것이라고 믿었어.) 미국은 애가 탔다. 세계대전 여파 등으로 경제력과 군사력은 최고였다. 딱 하나, 문화만은 정상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나치의 핍박을 피해 마르셀 뒤샹,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바실리 칸딘스키 등 유럽 대표 화가들이 미국으로 건너왔다. 고대 로마제국은 대륙의 패권을 잡았지만, 문화만큼은 그리스에 외려 휘둘렸다. 자칫하면 미국도 로마처럼 될 수 있었다. 빨리 미국만의 화가를 만들어야 했다. 딱 조건에 맞는 사내가 있었다. 그가 바로 폴록이었다. 미 정부와 구겐하임 등 미 예술계의 거물들, 라이프 등 언론이 폴록을 띄우기로 한 데는 이런 이유도 있었다. 잭 더 드리퍼(Jack the Dripper). 1956년, 타임지는 19세기 말 영국을 공포로 밀어넣은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Jack the Ripper)를 흉내내 폴록을 지칭했다. 폴록은 어느새 거부할 수 없는 대세가 됐다.
‘잭 더 드리퍼’의 분노…“혼돈은 무슨!”
"혼돈, 조화의 결여. 구조적 조직화의 전적인 결여. 기법의 완벽한 부재. 그리고 다시 한번 혼돈."
1950년, 폴록의 그림이 베니스 비엔날레에 처음 등장했다. 그곳의 한 평론가가 이렇게 평가했다. 타임지가 이 말을 인용했다. 폴록은 읽고 있던 타임지를 마구 구겨버렸다. 그는 타임지 편집장에게 편지를 썼다. 꾹꾹 눌러쓴 종이에는 신경질이 묻어나 있었다. "혼돈은 무슨. 빌어먹을!(No chaos. Damn it!)"
폴록은 이런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티끌만한 피사체도, 퍼뜩 떠오르는 주제 의식도 없다. 적어도 하나는 알 수 있다. 폴록이 캔버스에 대고 붓을 얼마나 많이 휘저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흰색과 베이지색, 녹색, 청색, 회색, 검은색이 보인다. 이 색들이 쌓이고 겹쳐 밝고도 탁한 화면을 만들었다. 보다보면 복잡하게 얽힌 그물, 수천마리 거미가 엮은 거미줄처럼 보이기도 한다. 생명력이 잔뜩 품은 선이 종횡무진하는 일 자체에서 통제 불가능한 야생성(野生性)도 느껴지는 듯하다. 어쨌든, 이 모든 건 갖다붙인 해석일 뿐이다. 제목은 '연보랏빛 안개 넘버 1'이다. 폴록이 붙인 게 아니었다. 비평가 그린버그의 제안을 받아들여 붙인 것이었다.
폴록은 억울했다.
우연으로 빚은 혼돈에 기대 이런 그림을 그린 게 아니었다. 폴록은 매번 결정을 내렸다. 매 순간 어디로 튀길지, 어떻게 튀길지, 얼마나 튀길지 등을 직관과 영감에 묻고 이에 따랐다. "나는 우연을 활용하지 않아. 나는 우연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이야!" 누구든 폴록 앞에서 우연의 파편이니, 혼돈의 결과물이니 입을 놀리면 그는 이렇게 받아치곤 했다. 나름의 증인도 있었다. 그 해 사진작가 한스 나무트는 폴록에게 "당신이 작업하는 모습을 찍고 싶다"고 제안했다. 나무트는 폴록의 작업실에 방문했다. 약간의 해프닝은 있었지만, 무리 없이 폴록의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폴록은 가만히 캔버스를 응시했다. 완전한 침묵이었다. 그런 그는 갑자기 붓과 페인트통을 든 채 캔버스 주위를 쏘다녔다. 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러다가 느려졌다. 그의 손짓은 거침없었다. 그러다가 또 한참을 망설였다. 나무트는 연신 셔터를 눌렀다. 확신에 찬 모습, 고뇌하는 모습, 살피고 모색하는 모습 등이 담겼다. "…그는 내가 거기에 있다는 걸 까맣고 잊고, 카메라 셔터의 소리마저 듣지 못하는 듯했다. (…) 폴록은 멈추지 않았다. 어떻게 이런 움직임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그는 마침내 '이거다'라고 말했다." 나무트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한편 폴록의 광기 어린 액션페인팅에 감명한 나무트는 그에게 다큐멘터리 영화를 제안했다.
실제로 촬영도 이뤄졌다. 나무트는 폴록에게 액션페인팅 '연기'를 주문했다. 폴록에게 이는 무척 힘든 일이었다. 가짜를 꾸민다고 생각하니 영감이 도통 찾아오질 않았다. 어느 날, 술에 잔뜩 취한 폴록이 테이블을 뒤엎었다. 그는 나무트에게 일갈했다. "나는 가짜가 아니야!"
허무한 말로(末路)…짧은 영광, 끝내 무너지다
폴록의 영광은 짧았다.
폴록은 최정상을 지키기 위해 죽도록 노력했다. 액션페인팅 이후 새로운 화풍도 찾아봤다. 봐줄만한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폴록은 여전히 괴로웠다. 언제 추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은 뒤룩뒤룩 살쪄갔다. 폴록의 다음 행보는 무엇일까. 그의 또 다른 충격적 작품은 언제 나오는가. 비평가들이 툭툭 던질 때마다 이들의 목을 꽉 누르고 싶었다. 피카소의 벽을 넘기 위해 날을 벼린 그는 이제 자기가 쌓아올린 벽 앞에 서있었다. 지금 볼 때 그 벽은 훨씬 더 높고, 더 단단해 보였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어릴 적 와이오밍주에서 본 바위산, 뒹굴면서 놀던 광야를 곱씹는 일은 더는 위로가 되지 못했다. 어머니와 함께 인디언 흉내를 내던 그 기억도 더 이상 눈물을 닦아주지 못했다. 그가 씹어먹고 살던 추억은 이미 단물이 다 빠진 채 너덜너덜해졌다.
1953년, 폴록은 작정하고 화폭을 흰색으로 물들였다.
화면에는 구름 내지 안개가 층층이 쌓인 듯 보인다. 태초(太初), 완전한 무의 세계가 떠오른다. 화면 가운데에서는 흰색이 점점 벌어진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나락 같다. 지하 세계 깊은 곳인 타르타로스가 입을 쩍 벌리는 듯도 하다. 이렇듯 폴록은 화폭에 다시 형상을 그려봤다. 배경도 넣어봤다. 다양한 시도의 일환이었다. 그가 표현하려는 건 화가의 영감에 만족을 모른 채 거듭 씹어대기나 하는 비평가들을 향한 일침일까. 뭘 해도 채워지지 않는 그의 뻥 뚫린 내면일까. 그림 제목은 '심연'(The Deep)이었다. 폴록의 상태는 이 그림을 전후로 해 급격하게 나빠졌다. 이를 그리다가 발을 헛디뎌 캔버스 속 심연에 정말 빠져버린 양.
불안정한 폴록을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연인 겸 동거인에서 아내가 된 리 크래스너였다. 망나니 같은 폴록도 크래스너 앞에선 어린애였다. "오늘 밤, 나랑 같이 있을까?" 치기 어린 시절 폴록의 말 같지도 않은 유혹에 따귀로 응징했던 그녀, 구겐하임과의 약속 전날 술을 들이붓고 뻗은 폴록을 질질 끌고 왔던 그녀, 원래 폴록보다 더 유명한 화가였지만 결혼 후 남편을 위해 붓을 버린 그녀만이 그 광기를 잠재울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이 또한 과거 일일 뿐이었다. 1955년쯤, 폴록은 스스로를 놔버렸다. 그는 계속 술을 마셨다. 울고, 토하고, 쓰러지길 반복했다. 젊은 여성과 바람도 피웠다. 크래스너조차 그런 폴록을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덩달아 쇠약해진 그녀는 폴록 곁을 떠나 파리에서 머물렀다. 1956년, 8월11일. 폴록은 새로 사귄 애인과 그녀 친구들을 차에 태웠다. 가속페달을 꾹 밟았다. 속도계에 시속 120㎞가 찍혔다. 140㎞, 160㎞…. 더, 더…. 폴록은 혼미했다. 만취 상태였던 그는 운전대를 이리저리 돌렸다. 폴록의 차는 그대로 길가의 자작나무를 들이받았다. 찢어지는 비명이 들렸다. 폴록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그의 나이는 고작 44살이었다.
폴록은 불안을 안고 세상 빛을 봤다.
폴록의 내면에는 늘 불안에 떠는 어린 애가 있었다. 미 서부를 전전한 유년 시절부터 피카소를 저주한 청년 시절, 최고의 자리에 올랐으나 끝내 모든 걸 잃은 중년 시절 모두 그 아이와 함께였다. 죽기 전 2년 반 동안 그림을 그리지 못한 일 또한 마음속 아이를 다독이기 위해서였다. 폴록은 이제야 쉴 수 있었다. 내려놓을 수 있었다. 다 끝났어, 마침내. 그의 죽음은 미련 없는 죽음이 아니었을까. 한편 미국은 죽은 폴록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미국은 폴록에게 '불안정한 천재 예술가의 요절'이란 스토리를 덧씌웠다. 폴록은 그렇게 미국의 신화가 됐다.
〈참고자료〉
잭슨 폴록, 캐럴라인 랜츠너, 알에이치코리아
잭슨 폴록(J. Pollock)의 '드리핑(dripping)' 작품에서 '대상 a'(object a)와 반복 강박적 이미지 분석, 장수덕, 한국조형교육학회
폴락(영화), 에드 해리스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 “벌거벗은 女로 우릴 조롱” 욕이란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최초의 모더니스트(모더니즘①) (2023. 6. 24.)
2)“11살 연하女와 비밀연애, 자식도 낳았다고?”…10년 숨겼다 ‘들통’[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현대미술 창시자(모더니즘②) (2023. 7. 1.)
3)“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입체파) (2023. 5. 20.)
4)“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레디메이드) (2023. 6. 10.)
5)“외간여성과 시속 120km 광란의 음주질주” 즉사한 男정체 보니[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미국의 신화(액션페인팅) (2023. 7. 15.)
6)시뻘건 내 피와 교감해보겠나…울든, 기절하든 그대 마음[후암동 미술관-마크 로스코 편] -교감의 마술사(추상표현주의) (2023. 6. 17.)
7)“관음男-노출女가 만났네요” 조롱…둘은 ‘환상의 짝꿍’이었다[후암동 미술관-살바도르 달리 편] - 위대한 쇼맨(초현실주의) (2023. 7. 8.)
8)“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팝아트) (2023. 6. 3.)
9)“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신표현주의) (2023. 5. 27.)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4)“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5)“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6)‘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7)“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8)“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9)“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