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디메이드 : 열정의 탐험가
편집자주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이봐. 저걸 좀 보게."
191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항공 공학 전시회. 마르셀 뒤샹이 친구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어깨를 툭툭 쳤다. 뒤샹은 번쩍이는 금속 항공기, 육중한 프로펠러를 가리켰다. "회화는 이제 끝장났군." 뒤샹이 브랑쿠시에게 속삭였다. "저 프로펠러보다 나은 걸 누가, 어떻게 만들 수 있겠냐고." 뒤샹의 목소리는 떨렸다. 브랑쿠시도 강하게 반박하지 못했다. 브랑쿠시는 조각가였다. 그런 그가 봐도 항공기의 우아함, 프로펠러의 정교함은 놀라웠다. 뒤샹은 고개를 뒤로 젖혀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간의 모든 그림은, 씻겨 내려가는 걸까." 뒤샹은 느릿느릿 말했다.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이날 이후 뒤샹의 시선은 더욱 캔버스 끄트머리로 향했다. 저 비행기에 깔려 죽지 않을, 저 프로펠러에 감겨 죽지 않을 새로운 회화를 찾아 모험에 나섰다.
5년 후인 1917년, 미국 뉴욕 독립미술가협회 사무실.
곧 열릴 전시회에 앞서 출품작이 들어왔다. 보낸 이는 리처드 머트였다. 작품명은 '샘(Fountain)'이었다. 그런데 작품…? 그렇게 말하기엔 그저 뒤집힌 남성 소변기였다. "이 인간 누군지 아는 사람?" 사무실은 조용했다. "이걸 전시회에 내겠다고? 누가 이따위 장난질이야!" 직원이 소리쳤다. 불쑥 등장한 머트는 단숨에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았다. 그때 뒤샹은 사무실 한쪽에 있었다. 곁눈질로 분위기를 살펴봤다. 사실 머트의 정체는 뒤샹이었다. 뒤샹이 가명으로 사무실에 변기를 제출했다. 작품이랍시고 변기에 'R. Mutt 1917'이라는 서명까지 쓰고 냈다. 독립미술가협회는 뒤샹이 친구들과 같이 만든 협회였다. 즉 자기가 꾸린 협회에 자기가 가짜 이름을 단 후, 자기 작품이랍시고 이미 만들어진 변기를 출품한 것이다. 도대체 왜?
사연은 이랬다.
당시 협회가 기획한 전시는 특이했다. 이른바 '열린 전시'였다.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행사였다. 심사위원도, 상도 없는 '파격'이었다. "누구든 6달러만 내면 작품을 낼 수 있다!" 홍보의 핵심 문구였다. 뒤샹도 동료들과 함께 행사를 기획했다. 그런 그가 슬쩍 틈을 보더니 이탈했다. 동네 철물점에서 변기를 샀다. 그걸 그냥 가명으로 출품했다. 물감 한 번 칠하지 않고, 손톱자국 하나조차 내지도 않았다. 이름이자 서명인 'R. Mutt'란 말은 변기 제조사명에서 따온 장난 같은 문구였다.
협회는 날 것의 광기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이걸 받아야 해, 말아야 해?" 빙 둘러앉아 투표했다. 결과는 볼 것도 없었다. 받지 않기로 했다. "머트 씨의 샘은 원래 있어야 할 곳에서는 유용하게 쓰일텐데, 그곳이 최소한 미술 전시장은 아닐 겁니다. 일반적 규정상 샘은 예술 작품이 될 수 없습니다." 협회 사람들은 이런 논리를 냈다. 그간 사태를 모른 척한 뒤샹은 이쯤부터 움직였다. "어느 예술가든 6달러만 내면 전시회에 참여할 수 있다. 머트 씨는 '샘'을 출품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만 사라졌다. 이들은 왜 그를 배척했는가." 뒤샹은 자기가 출판을 주도하는 잡지 '더 블라인드 맨(The Blind Man)'에 머트를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다. "뒤샹, 왜 이 괴짜 자식을 옹호해?" 누군가 뒤샹을 타박했다. "다 받아주겠다는 약속은 거짓이야? 자네들이야말로 무슨 자격으로 막아? 이러니까 예술만 발전이 느린거야." 뒤샹은 기어코 분노를 표출했다. 뒤샹은 허울 뿐인 약속을 한, 예술 독립을 말하고도 여전히 검열을 이어가는 위선을 비난했다. "전시장 밖에선 프로펠러가 미친 듯 돌고, 모터가 불을 마구 뿜는데도!" 뒤샹은 금속 항공기를 본 그날처럼 안달 나 있었다. …우리만 계속 꽉 막혀있으면 되겠냐고. 뒤샹은 씁쓸하게 말을 덧붙였다. 세상 가장 개방적인 예술가가 모인 이곳마저 이딴 식이라는 데 절망했다.
머트, 그러니까 뒤샹의 '샘'은 전시장 구석에 놓였다.
정확히는 칸막이 뒤에 숨겨졌다. 뒤샹은 이런 수모에도 꺾이지 않았다. "…변기가 부도덕하지 않듯, 머트의 '샘'도 부도덕하지 않다. 그가 이를 직접 만들었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머트 씨는 변기를 선택했다. 일상 속 사물은 새로운 목적, 새로운 시각을 따라 새로운 생각으로 재탄생했다." 뒤샹의 잡지에는 이런 글도 올라왔다. 중요한 건 선택이라고! 뒤샹의 주장이었다. 그게 원래 있던 사물이라 해도 상관없다. 예술가가 이를 예술품으로 선택했다. 이때부터 예술가의 뜻이 담긴 새로운 개념, 새로운 정체성을 갖는다는 얘기였다. 뒤샹의 주장은 통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협회 이사직을 내려놨다. 그의 탐험은 해프닝으로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뒤샹이 남긴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기성품, 즉 레디메이드(ready-made)를 전시장에 내놓은 사건은 묻히지 않았다. 곧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은 폭풍우가 돼 요동친다. 예술계는 뒤샹의 변기를 타고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그렇다. 그의 탐험은 끝내 성공했다.
인상주의~미래파 ‘후루룩’…독창성 다지다
뒤샹은 1887년 프랑스 노르망디의 블랭빌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해운업자 겸 판화가였다. 아버지는 공증인(公證人)이었다.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큰형은 화가, 작은형은 조각가였다. 거실에는 음악이 늘 있었다. 밤이면 돌아가며 체스를 뒀다.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 뒤샹은 루앙에 있는 학교로 갔다. 그는 수학에 두각을 보였다. 상도 2개나 탔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우등생은 되지 못했다. 될 생각도 없었다. 온통 예술가인 집안 탓일까. 뒤샹은 화가가 되고 싶었다. 졸업식에 앞서 그토록 갈망한 미술상을 타내 소질을 증명했다. "너는 왜 또 예술을 하겠다고 해? 여기가 쉬워보여?" 뒤샹의 친형들이 들뜬 그를 타박했다. 염려 반, 놀림 반이었다. 뒤샹은 그 말에도 기죽지 않았다. 남들과는 다른 예술을 해야겠군. 형들을 넘어서는 참신한 걸 만들겠어. 이 생각뿐이었다.
뒤샹은 1904년 파리 쥘리앙 아카데미에 입학했다.
뒤샹은 국립 순수예술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했다. 하지만 뒤샹은 곧 교육에 흥미를 잃었다. 그는 고루한 예술에 관심이 없었다. 판에 박힌 이론은 딱 질색이었다. 무슨 옛 이론, 무슨 고전 사조를 마주할 때마다 이런 걸 왜 배우나 싶었다. 뒤샹은 허구한 날 당구장에 갔다. 매일 당구봉으로 공이나 쳤다. 뭘 그려야 할 때는 만화나 그리며 놀았다. 내가 이런 옛날 그림이나 배우려고 붓을 든 게 아닌데…. 슬슬 자괴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방황하던 뒤샹은 입체파 사람들을 통해 구원받았다.
1911년, 뒤샹은 파리를 주 무대로 활동하는 입체파 모임 '퓌토(Puteaux)'에 가입했다. 프란시스 피카비아, 장 메챙제 등과 어울렸다. 뒤샹은 이들 또한 과거와의 결별을 생각한다는 걸 알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인간들이라는 점 또한 꿰뚫어봤다. 죽이 잘 맞은 이유였다. 뒤샹은 폴 세잔부터 공부했다. 그는 입체파의 우상이었다. 이어 입체파 창시자 파블로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을 참고해 '소나타'를 만들었다. 피카소가 거리 여인을 해체한 후 재편집했다면, 뒤샹은 악기를 쥔 어머니와 누이를 파편화해 다시 조합했다.
뒤샹은 입체파에만 매달리진 않았다.
그는 입체파 옆집 격인 야수파도 배웠다. 그 중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 관심을 쏟았다. 현실 전의 과거, 혹은 현실 너머 상상을 다룬 상징주의도 살펴봤다. 특히 오딜롱 르동의 판타지 소설 삽화 같은 작품에 감명받았다. 미래파도 건드렸다. 기계가 안긴 도시의 역동성을 미(美)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사조였다. 뒤샹은 그렇게 후기 인상주의(세잔)부터 입체파(피카소), 야수파(마티스), 상징주의(르동) 등 현대미술 문턱에 놓인 사조를 모두 경험했다. 훗날 그는 "이들이 어떤 그림을 어떻게 그렸는지 알고 싶었다"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여러 종류의 그림을 하나씩만 그렸다"고 회상했다.
…이게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라고? 어디가?
1912년, 뒤샹은 첫 번째 사고를 쳤다.
뒤샹은 그해 파리에서 열린 '입체주의 앵데팡당(Independant·독립미술)'전에 그림을 제출했다. 그런데 사람들 반응은… "마르셀, 대체 뭘 그린거야?" "아무리 그래도 이건 선을 넘었잖나." 이런 말뿐이었다. 그럴 만했다. 뒤샹의 그림은 난해함을 넘어섰다. 한 인물이 로봇 춤을 추는 듯 움직인다. 그 모습을 셔터 속도가 느린 카메라로 연속 촬영한 듯하다. 그게 다였다. 대상을 산산조각 낸 후 다시 맞췄다는 점에서 입체파, 기계 특유의 뚝뚝 끊기는 움직임을 힘 있게 그렸다는 점에서 미래파 작품 같았다. 입체파와 미래파의 특징을 마구 섞은, 따지고 보면 그간 없던 결과물이었다. 외려 회화가 아니라 영화 작업물 같기도 했다. 제목은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였다. 누드화라고 해놓곤 사실상 누드도 없는, 끝까지 도발적인 작품이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그건 핵심이 아니라고. 중요한 건 움직이는 것 그 자체야!" 뒤샹은 해설이랍시고 이런 말이나 하고 다녔다.
뒤샹의 그림은 문제아 취급을 받았다.
입체파 화가들이 속한 주최 측은 뒤샹의 작품이 입체파 정신을 어겼다고 봤다. 뒤샹은 그림 수정 요청문을 받았다. 하다못해 제목은 손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도 들었다. 이미 발 빠른 평론가들 사이에선 "추잡한 누드"라는 평이 나올 때였다. "우리가 보수주의자는 아니지만 말이야. 우리 요청을 따르지 않으면…." 뒤샹은 그 말에 잠자코 있었다. "그림을 전시할 수 없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어." 뒤샹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끝이었다. 뒤샹은 작품을 챙겨 나왔다. 문을 쾅 닫았다. 제기랄! 그놈의 입체파 정신은 또 뭐야. 변화를 외치던 녀석들이 벌써 틀에 갇혀서는…. 열받은 뒤샹은 출품을 취소했다. 입체파 모임에서 탈퇴했다. "내 그림은 그들이 이미 그어 놓은 선 안에 들어가지 못했다. (…) 그들은 분명하고 정확한 노선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게 순진하고 어리석은 일로 보였다." 훗날 뒤샹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상한다.
뒤샹은 이쯤 우연히 레이몽 루셀의 연극 '아프리카의 인상'을 접할 수 있었다.
이 특이한 공연은 분노와 어수선함에 휩싸인 뒤샹의 심금을 울렸다. 공연은 유럽인들이 배를 타고 가던 중 표류하는 이야기 등을 다뤘다. 죽을 뻔한 사람들은 우연히 가상 아프리카 왕국 땅을 밟는다. 그런데 어쩌다가 포로로 붙잡히고 만다. 기구한 운명 속 사람들은 왕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그래서 목숨을 건지기 위해) 공연을 선보인다. 그런 과정을 전후로 해 환상적인, 때로는 불가사의한 몇몇 사건을 마주한다는 내용이었다. 뒤샹은 루셀이 상상력을 발휘해 만든 공연 속 기상천외한 기계 소품, 동음이의어를 활용한 말장난(가령 ①고래 ②코르셋 받침살 ③도구의 받침대 등 여러 뜻을 갖는 프랑스어 baleines 같은 단어들을 작품에 전진 배치하는 등)에 감명을 받았다. "루셀은 나로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을 만들었다. 완전히 독립적이라는 게 내 찬탄을 끌어낸 유일한 이유였다. (…) 이게 예술이 가야 할 방향이었다" 뒤샹은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뒤샹은 루셀의 공연 덕에 '계단 누드화 사건' 이후 싱숭생숭함을 내버릴 수 있었다. 그는 '새로운 것'에 대한 탐험에 더 가열차게 나서기로 결심했다. 같은 해 항공 기술 전시회에서 프로펠러를 본 후 더욱 마음을 다잡았다. 그에게 때마침 이런 일이 없었다면, 그 또한 끝내 관성에 굴복했을지도 모른다.
뒤샹은 지도를 폈다.
그의 시선은 기어코 캔버스를 뚫어버렸다. 이제 그가 보는 곳은 회화 바깥 세계였다. 뒤샹은 회화를 버렸다. 회화 자체가 더는 새롭지 않았다. 회화에 매여있는 한 무슨 짓을 하든 새로운 것을 만들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뒤샹은 예술의 신항로를 개척하기로 했다. 그는 이제 소재와 매체, 오브제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선보인 게 바로… 자전거 바퀴나 변기 같은 레디메이드였다.
‘레디메이드’ 등장…기성품, 예술로 재탄생
레디메이드는 '이미 만들어진', '기성품' 등 사전적 의미가 있다.
뒤샹은 이 레디메이드에 아름다움을 입혔다. 뒤샹은 삽과 분무기 등 지천으로 널린 레디메이드를 유심히 살펴봤다. 가만. 이걸 우리가 아는 삽과 분무기가 아닌, 예술품 보듯 감상해보면 어떨까. 지구의 사정이라곤 하나도 모를 외계인이 돼 삽과 분무기를 본다고 하면 어떤 기분일까. 이 곡선과 마감 흔적을 봐. 아름…답다고 여기겠는데? 이런 식의 생각을 펼쳤다. 뒤샹은 개안(開眼)했다. 이제 그가 볼 때 삽과 분무기는 뭘 더 칠하거나 붙일 필요 없는 예술품이었다. 참신한 이름을 달아주면 훌륭한 전시품이 될 수 있었다. "예술가가 '저거다'라고 하는 순간, 그것은 예술이 될 수 있다." 뒤샹의 말이었다. 그가 창조한 레디메이드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문장이다. 즉, 예술가가 ①일상 속 기성품에서 새로운 관점을 발견한 후 ②나름의 이름을 붙이고 배치를 달리하는 등 아이디어를 첨가하면 ③기성품의 실용적 의미는 사라지고 ④그간 없던 예술품이 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더는 예술가가 뭘 만들 필요는 없고, 그냥 통통 튀는 아이디어(개념)만 있어도 된다는 얘기였다.
1913년, 뒤샹이 드디어 최초의 레디메이드를 선보였다.
자전거 바퀴였다. 정확히는 의자에 거꾸로 박힌 자전거 바퀴였다. 일상 속 자전거를 조각상처럼 바꾸려는 시도였다. 아무 관련 없는 두 기성품이 엉뚱하게 맞붙었다. 더는 '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더 이상 '앉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이렇게 기성품은 예술품으로 재탄생했다.
뒤샹은 신대륙을 찾았다.
지금껏 없던 세상을 발견했다. 닻을 쭉쭉 내렸다. 그런 그 덕에 예술의 상식도 통째로 흔들렸다. 여태 예술의 작품성은 들인 돈 내지 제작 기간 등과 정비례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령 얀 반 에이크가 그 시절 비싼 녹색 물감을 듬뿍 뿌려 그린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오귀스트 로댕이 죽을 때까지 빚은 '지옥의 문' 등이 사례다. 하지만 뒤샹 이후 예술의 작품성은 참신한 관점만으로도 얻을 수 있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견하는 게 어렵지, 도출해낸 이상 만드는 것이야 언제든 만들 수 있었다. 수천년간 '물질'에 의존한 예술품의 의미가 '정신'으로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관련 일화가 있다. 1915년, 뒤샹의 파리 작업실을 청소하던 여동생이 실수를 했다. 뒤샹의 '자전거 바퀴'가 쓰레기인 줄 알고 내다 버렸다. 물질(캔버스와 석고 등) 중심의 반 에이크나 로댕 작품이 버려졌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뒤샹 작품은 정신(아이디어) 중심이었다. 그렇기에 뒤샹은 상심한 여동생을 위로할 수 있었다. "괜찮아. (내 아이디어는 그대로 있으니)언제든 다시 만들 수 있어."
1915년, 뒤샹은 미국 뉴욕으로 움직였다.
미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미국은 프랑스가 인상주의를 어색해할 무렵부터 진작에 관심을 보일만큼 개방적이었다. 미국은 프랑스에서 조롱당한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누드 2'도 기발한 작품으로 인정할만큼 자유로웠다. 1917년, 뒤샹은 자신감을 얻었다. 친구들과 뉴욕 독립미술가협회를 꾸렸다. 누구든 6달러만 내면 전시 기회를 주는 행사도 기획했다. 그렇게 하고서 또 사고를 쳤다. '이름 : 리처드 머트, 작품명 : 샘'…. 가명을 달고선 변기를 작품으로 내고 만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변기는 레디메이드 측면에서 훌륭한 소재였다. 매끄러운 표면은 은은한 빛을 내뿜는다. 부드러운 곡선은 육감적인 볼륨감을 자아낸다. 입체적인 면, 오밀조밀하게 패인 홈은 우아함을 발산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 미국마저 이번에는 뒤샹의 행동에 경악했다. 뒤샹은 전시장 칸막이 뒤에 숨겨진 '샘'을 보고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문제작은 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가 찍은 사진으로만 볼 수 있다. '샘'은 전시 이후 사라졌다. 뒤샹 전기를 쓴 캘빈 톰킨스 등은 "누군가 쓰레기로 보고 버렸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 천둥벌거숭이들…. 신대륙에 첫발을 디딘 뒤샹은 뜻밖의 바리케이드 앞에서 당황했다.
모나리자에 수염 그리고…“엉덩이는 뜨거워”
그런 뒤샹 뒤에서 때마침 다다이즘의 돌풍이 몰아쳤다.
인류가 쌓아온 이성과 도덕, 예술이란 무엇인가. 20세기 들어서도 세계대전 등 화염과 파괴가 이어지면, 지금껏 다진 문명은 허구라고 봐야하지 않겠는가. 다다이즘은 그런 회의에서 탄생했다. 반(反)이성, 반도덕, 반예술을 내건 예술 사조였다. 기존의 규칙, 질서, 기법을 부정했다. 고매한 척 폼 잡더니 전쟁도, 학살도 막지 못했다며 조롱했다. 다다(Dada)라는 말도 반이성적이었다. 뜻을 모은 예술가들이 별생각 없이 프랑스·독일어 사전을 폈다. 우연히 나온 단어 중 하나를 골랐는데, 그게 다다였다는 설이 있다. 다다이스트(dadaist)들은 이렇게나 별종들이었다. 이들이 볼 때 뒤샹의 '샘'은 선구작 그 자체였다. 뒤샹도 다다이스트와 예술관을 교류해왔기에, 이들의 전폭 지지가 무척 반가웠다. 다다이즘은 1차 세계대전 불씨가 잦아든 1920년대 들어 전성기를 맞이했다. 뒤샹의 '샘'이 마스코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다다이즘의 돌풍만큼 뒤샹의 변기 또한 돌풍으로 돌아와 예술계를 강타했다. 뒤샹의 변기는 20세기 예술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런데 뒤샹은 그사이를 못 참고 또 한 번 일을 저지르고 있었다.
1919년, 뒤샹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가 그려진 싸구려 그림엽서를 한 장 샀다. 검은색 연필을 쥐었다. 모나리자의 얼굴에 콧수염과 턱수염을 그렸다. 그림 아래에 'L.H.O.O.Q'라고 썼다. 프랑스어로 발음하면 '그녀 엉덩이는 뜨거워'라는 뜻이었다. 엽서를 사고, 수염을 그리고, 제목을 붙인 게 전부였다. 그것만으로 새로운 화제작이 또 탄생했다. 마침 다 빈치가 타계하고 4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모두가 다 빈치를 띄우고 있을 때였다. 뒤샹은 이렇게 과거의 권위, 전통의 위엄을 다시 조롱했다.
뒤샹은 기행을 멈추지 않았다.
1921년, 뒤샹은 카메라 앞에 섰다. 여장한 채였다. 레디메이드에 심취한 영향일까. 뒤샹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를 재정의하고 싶어했다. 유대인이 돼볼까. 아니, 잠깐. 아예 유대인 여성이 돼버리면 나(가톨릭 남성)와 정반대의 인간이 될 수 있겠는걸? 그렇게 해 실행에 옮긴 일이었다. 화가 겸 사진작가 만 레이가 찍은 사진 속 뒤샹은 귀부인이 쓸 듯한 모자를 쓰고 있다. 눈화장을 한 채 렌즈 쪽을 아련하게 보고 있다. 반지 등 장신구도 잊지 않은 모습이다.
로즈 셀라비(Rose Sélavy).
뒤샹은 자신에게 우아한 이름을 붙였다. 이후 에로즈 셀라비(Rrose Sélavy)로 이름을 살짝 틀었다. 이는 '사랑, 그것은 인생이다'라는 뜻의 프랑스 말 '에르소, 세 라 비(Eros, c'est la vie)', 혹은 '삶을 위해 건배'라는 뜻의 '아로제 라 비(Arroser la vie)'로도 받아들여진다. 뒤샹은 당시 자신을 정말 여성으로 여겼다. 그는 뒤샹이 아니라 셀라비처럼 행동했다. 뒤샹은 그 기간 '발랄한 과부', '왜 로즈 셀라비는 재채기하지 않는가' 등 작품을 선보였다. 여장을 한 자기 흑백사진을 시판 향수병에 붙이기도 했다. 그는 작품 서명 칸에도 '마르셀 뒤샹'이 아닌 '로즈 셀라비'를 썼다. 비로소, 스스로를 레디메이드로 활용한 것이다.
돌연 체스선수로…“체스꾼은 모두 예술가”
1923년, 뒤샹은 이제 예술에 흥미를 잃은 것처럼 보였다.
초콜릿 과자를 한 움큼씩 씹어먹던 아이가 어느새 텅 빈 봉지를 보고 관심을 잃어가는 모습과 비슷했다. 당시 그는 36살이었다. 그림 한 점에 1만 달러를 주겠다는 주문이 밀려들 때였다. 뒤샹이 향한 곳은 체스장이었다. 그는 어릴 적 가족과의 추억을 품고 돌연 프로 체스선수의 길을 걸었다. 가족과 지인 입장에선 속 터지는 일이었지만, 늘 그랬듯 뒤샹은 또 제멋대로였다. 뒤샹은 1925년 제3회 프랑스 체스 챔피언십에서 분투한 결과 '고수' 호칭도 얻었다. 1928~1933년 사이 체스 챔피언십과 체스 올림피아드 등에 계속 출전했다. 뒤샹은 자기가 세계 챔피언이 될 수는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체스 기자, 체스 비평가로 방향을 또 바꿨다. 뒤샹은 죽을 때까지 체스를 놓지 않았다. 말년에는 누드모델과 게임을 하는 퍼포먼스를 보일 만큼 체스에는 늘 진심이었다. "모든 예술가가 진정한 예술가는 아니다. 하지만 체스꾼은 모두 진정한 예술가가 맞다." 왜 예술을 다시 하지 않느냐는 말에 뒤샹은 이렇게 답변하곤 했다.
뒤샹은 기상천외한 예술사만큼 남다른 연애사도 가졌다.
뒤샹은 이성에게 꽤 인기가 있었다. 그의 무기는 지적인 외모, 섬세한 성격, 냉소적인 태도 등이었다. 뒤샹은 1927년, 40살일 때 결혼도 했다. 다만 상대를 보곤 모두가 놀랐다. 뒤샹의 아내는 그가 5년간 사귀던 여자친구가 아니었다. 25살의 부유한 상속녀, 사라쟁 르바소였다. "외모, 성향, 취향 모두…. 둘은 암만 봐도 안 어울리는데?" 뜻밖의 신부에 결혼식장이 술렁였다. 실제로 둘은 잘 안 맞았다. 뒤샹이 만날 체스만 두고 있자 열받은 르바소가 아교를 체스판에 부어버렸다는 설이 있다. 두 사람은 반년도 안 돼 이혼했다. 뒤샹의 또 다른 해프닝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그런 뒤샹도 사랑의 열병에 걸린 적이 있다.
독신 생활을 이어가던 뒤샹은 1946년, '팜 파탈' 조각가 마리아 마틴스에게 푹 빠졌다. 뒤샹의 냉소는 스스로를 '메두사'로 칭한 그녀 앞에서 속절 없이 무너졌다. "내가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당신이 죽은 후에도 오랫동안, 당신을 고문하고 싶어요." 뒤샹은 마틴스의 이 편지를 받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러나 둘은 맺어지지 못했다. 마틴스는 이미 유부녀였다. 마틴스는 뒤샹과의 불장난 후 원래 가족에게 돌아갔다. 뒤샹은 1954년, 앙리 마티스의 며느리였던 알렉시나 새틀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새틀러는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무엇보다 체스를 즐길 줄 알았다. 뒤샹은 새틀러와 체스를 두며 생의 말년을 향유했다.
뒤샹은 1968년 10월2일 새벽, 프랑스 노이리쉬르센에 있는 자택에서 사망했다.
친구들과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후였다. 사인은 심장마비로 알려져 있다. "피곤하지 않소? 이것저것 그만 건드리고 정착해도 될 법한데." 누군가가 물었다. "내 취향이 굳어지는 걸 막기 위해 나 자신을 부정하고 있는 거요" 그때 뒤샹은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키네틱 아트, 행위 예술…. 뒤샹이 쉬지 않고 탐험해 준 덕에 현대미술은 마음 편히 가지를 뻗쳐갔다. 뒤샹의 상징 같은 '샘'은 전설로 군림했다. '샘'은 2004년 영국 올해의 터너상 시상식에 나선 미술계 인사 500여명 대상의 가장 영향력 있는 현대미술 설문에서 1위를 차지했다. 2위가 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3위가 앤디 워홀의 '마릴린 먼로 이면화'였다. 뒤샹은 끝내 자신이 가장 위대한 별종임을 증명하고 만 것이다.
〈참고 자료〉
마르셀 뒤샹, 김광우, 미술문화
The Duchamp Dictionary, Girst, Thomas, Thames & Hudson
요즘 미술은 진짜 모르겠더라, 정서연, 21세기북스
〈후암동 미술관 현대미술 편 읽는 순서〉
1)“나체女에 웬 아프리카 가면?” 얼빠졌다 조롱당한 그의 ‘반전’[후암동 미술관-파블로 피카소 편] - 희대의 반항아 (2023. 5. 20.)
2)“내 이름은 로즈” 여장남자된 30대男 전말…‘빅픽처’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르셀 뒤샹 편] - 열정의 탐험가 (2023. 6. 10.)
3)“죽일거야” 그녀가 쏜 3번째 총알이 몸 관통…죽다 살아났지만[후암동 미술관- 앤디 워홀 편] - 위대한 악동 (2023. 6. 3.)
4)“흑인의 삶 어때?” 무례한 공격들…마돈나도 반한 27살男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장 미쉘 바스키아 편] - 자유의 반군 (2023. 5. 27.)
〈후암동 미술관 이론 편 읽는 순서〉
1)천사가 이렇게까지 운다고? 무섭게 왜 그래[후암동 미술관-조토 편] - 르네상스 선구자(2022. 7. 2.)
2)뻥 아냐, 600년전인데 이 정도 ‘입체 그림’ 있었다[후암동 미술관-마사초 편] - 원근법 선구자(2022. 8. 27.)
3)세계서 가장 유명한 이 ‘레이저 눈빛’, 그것은 사랑?[후암동 미술관-얀 반 에이크 편] - 유화 선구자 (2022.5.21.)
4)‘레드벨벳’도 춤추게 한 이 화가의 정체…"악마의 아들? 나 원 참" [후암동 미술관-보스 편] -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5.28.)
5)아리따운 금발 여인, 외간남자 목을 베고 있는거야?[후암동 미술관-카라바조 편] - 바로크 선구자 (2022.6.11.)
6)아름다운 여인, 끌어안고 난리난 옆 커플이 부러워[후암동 미술관-와토 편] - 로코코 선구자(2022.10.8.)
7)맨몸 여인들, 전쟁 뛰어들어 “그만!” 사자후…싸움 막았다[후암동 미술관-다비드 편] - 신고전주의 선구자 (2022.10.15.)
8)표류 D+13, 왜 몰랐지? 뗏목 위 널린 게 먹을건데[후암동 미술관-테오도르 제리코 편] - 낭만주의 선구자 (2022.5.14.)
9)“천사요? 데려오면 그려드리죠” 이놈의 똥고집[후암동 미술관-귀스타브 쿠르베 편] - 사실주의 선구자 (2022.5.7.)
10)“관상가 양반 아니었어?” 조선의 ‘얼굴’, 몰랐던 사실[후암동 미술관-윤두서 편] - 사실주의 특별 편 (2022. 11. 19.)
11)벌거벗은 이 여자, 뭐 때문에 빤히 쳐다보나[후암동 미술관-에두아르 마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2022. 4. 23.)
12)“못 그렸는데 폼만 잡아” 욕먹던 이 그림, 3300억이요? [후암동 미술관-클로드 모네 편] - 인상주의 선구자⑵ (2022.4.30.)
13)‘점투성이’ 수상한 커플 정체는? [후암동 미술관-조르주 쇠라 편] - 신인상주의 선구자 (2022. 6. 25.)
14)반 고흐 최애작, 별밤·해바라기 아닌 ‘이 사람들’ [후암동 미술관-빈센트 반 고흐 편] - 표현주의 선구자 (2022.6.4.)
15)이 ‘사과’ 때문에 세상이 뒤집혔다, 도대체 왜?[후암동 미술관-폴 세잔 편] - 근대 회화 선구자(2022. 7.9.)
16)‘생각하는 사람’ 진짜 정체, 남모를 사정도 있었다[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로댕 편] - 근대 조각 선구자 (2022. 10. 22.)
17)화끈한 키스, ‘이 여성’ 사르르 녹아내리다[후암동 미술관-구스타프 클림트 편] - 분리파 선구자 (2022. 8. 13.)
18)나체 여인, 어쩌다 사자 득실대는 정글 한복판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루소 편] - 근대 초현실주의 선구자 (2022. 7. 30.)
19)헐크색 피부 갖게 된 ‘이 여성’…이 놈의 ‘남편’ 때문에[후암동 미술관-앙리 마티스 편] - 야수주의 선구자 (2022. 7. 16.)
20)잘생긴 법학 교수님, ‘이것’ 그렸더니 미술계 '발칵'[후암동 미술관-바실리 칸딘스키 편] - 추상회화 선구자 (2022.7. 23.)
21)“이건 나도 그리겠다!” 1순위 그림, 그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몬드리안 편] - 추상회화 선구자⑵ (2022. 8. 6.)
22)스파게티 면발? 1315억에 팔린 그림, 충격적 이유[후암동 미술관-잭슨 폴록 편] - 액션페인팅 선구자 (2022. 10. 29.)
23)몸 좋은 보디빌더, 거대 막대사탕 들고 ‘의문의 포즈’[후암동 미술관-리처드 해밀턴 편] - 팝아트 선구자 (2022.11.12.)
24)“동양서 ‘테러리스트’가 왔다” 피아노 다 때려부쉈다[후암동 미술관-백남준 편] - 비디오 아트 선구자 (2022.11.26.)
〈후암동 미술관 인물 편 읽는 순서〉
1)“이런 나체화는 뒷골목에 내걸어!” 꼬장한 천재 모욕한 자 최후는[후암동 미술관-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편] - 신의 예술가 (2023. 4. 7.)
2)“12살 어린 빵집女와 몰래 연애를?” 소름돋은 목격자, ‘증거인멸’해줬다[후암동 미술관-라파엘로 산치오 편] - 모든 화가의 왕자 (2023. 4. 15.)
3)“성폭행 피해자는 나야!” 고문도 견딘 그녀…복수는 우아했다[후암동 미술관-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편] - 영원한 복수자 (2023. 1. 28.)
4)“예쁜 내 금발 공주님”…‘딸바보’ 국왕 눈에선 꿀이 뚝뚝[후암동 미술관-디에고 벨라스케스 편] - 고결한 관찰자 (2023. 2. 24.)
5)“아내·자식·명예 다 잃었다”…그런데 왜 ‘빵’ 터지셨어요[후암동 미술관-렘브란트 편] - 빛의 마술사 (2023. 1. 7.)
6)‘이 그림’ 때문에 화형당할뻔…어느 야심가의 기구한 삶[후암동 미술관-프란시스코 고야 편] - 흑화한 사상가 (2023. 2. 4.)
7)“날 잊지마오” 가시덤불 ‘감옥’ 8년 갇혔다…그림에 펑펑 울었다[후암동 미술관-추사 김정희 편] - 조선의 품격 (2023. 3. 11.)
8)“6년 약혼女두고 바람…죽자 묘지까지 파헤쳤다” 이 남자, 변명 들어보니[후암동 미술관-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편] - 위험한 사랑꾼 (2023. 3. 18.)
9)“죄송해요, 엄마가 너무 싫어요” 효자 아니었어?…이 화가의 ‘반전’[후암동 미술관-제임스 휘슬러 편] - 모던한 이방인 (2023. 3. 4.)
10)“14살 소녀 이따위로 만들었어?” 평생 먹을 욕 다 먹었다[후암동 미술관-에드가 드가 편] - 무희의 화가 (2023. 3. 25.)
11)‘미녀 그리기’에 진심이었던 이 화가, 진짜 이유[후암동 미술관-오귀스트 르누아르 편] - 행복을 그린 화가 (2022. 12. 24.)
12)“고갱 그놈, 도대체 왜 그래?” 악마인지 ‘악마의 재능’인지[후암동 미술관-폴 고갱 편] - 고귀한 야만인 (2022. 12. 3.)
13)“나랑 6년 계약해” 유명 女배우의 파격제안…인생 달라졌다[후암동 미술관-알폰스 무하 편] -체코의 긍지 (2023. 2. 18.)
14)“백번은 넘게 봤겠다” 모두 아는 ‘이 절규’의 놀라운 비밀[후암동 미술관-에드바르 뭉크 편] - 노르웨이의 현자 (2022. 12. 31.)
15)“이놈의 짧은 다리 때문에” 카바레 스타의 영광과 몰락[후암동 미술관-툴루즈 로트레크 편] - 작은 거인 (2022. 12. 17.)
16)“로댕 아이를 뱄다” 폭탄선언 여성, 30년 수용소에 갇혔다[후암동 미술관-카미유 클로델 편] - 천재와 맞선 천재 (2022. 11. 5.)
17)눈동자 없는 기괴한 여자 그림, 알고 보니[후암동 미술관-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편] - 파리의 귀공자 (2022. 12. 10.)
18)숨참고 키스 다이브!…아내가 그렇게 좋으셨어요[후암동 미술관-마르크 샤갈 편] - 순수한 방랑자 (2023. 2. 11.)
19)“당신은 저질 누드화가야!” 격분한 판사, 면전서 그림 불태웠다[후암동 미술관-에곤 실레 편] - 영원한 아이 (2023. 4. 1.)
20)당신은 모르실거야, 키스하는 두 사람 왜 이 꼴인지[후암동 미술관-르네 마그리트 편] - ‘진짜’ 괴짜 (2022. 9. 3.)
21)피카소도 ‘이 그림’에 “대박!” 감탄, 각성했다는데[후암동 미술관-피카소·마티스 편] - 피·마 대전 (2022. 9. 10.)
22)3번 유산·35번 수술의 악몽…그럼에도, 인생이여 만세[후암동 미술관-프리다 칼로 편] - 고통의 여왕 (2023. 1. 14.)
23)“내 천사여” 편지 사방팔방에 ‘뽀뽀’…한 무연고자의 죽음[후암동 미술관-이중섭 편] - 아고리, 나의 아고리 (2023. 1. 21.)
24)권총도 채찍도 버텼는데, ‘이 남자’ 행동에 무너졌다[후암동 미술관-마리나 아브라모비치 편] - 우아한 전사 (2022. 8. 20.)
〈후암동 미술관 현장 편 읽는 순서〉
1)이건희 컬렉션, 이 ‘다섯 작품’ 놓치지 마시라[후암동 미술관-‘어느 수집가의 초대’ 출장 편] - 전시 특집 (2022. 6. 18.)
2)알코올 중독 ‘이 남자’, ‘파리’에 미치자 놀라운 일 터졌다[후암동 미술관-몽마르트 언덕 편] - 동행자 : 모리스 위트릴로 (2022. 9. 17.)
3)고흐 “슬픔은 왜 나한테만” 펑펑 울었다, 고작 2평 다락방에서[후암동 미술관-오베르 편] - 동행자 : 빈센트 반 고흐 (2022 9. 24.)
4)모네 “앞이 안 보여도 상관없어”…백내장도 못 막은 그의 ‘최후작’[후암동 미술관-지베르니 편] - 동행자 : 클로드 모네 (2022.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