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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토(Ditto·찬성)와 비토(Veto·반대)'로 갈등이 첨예한 세상 속 먹고 사는 이슈를 탐구합니다.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지난 10일 오후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하교하던 시각, 경기도 수원시 호매실동의 한 교차로에서 비극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우회전을 하던 버스가 학교를 파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던 초등학생 조은결 군을 친 것입니다.
버스는 우회전 신호가 빨간불임에도 진행했습니다. 사고가 난 것도 모르고 버스를 몰던 기사는 주변 사람들이 소리치고 나서야 사고를 인지했습니다. 그는 차에 깔린 아이를 보고는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습니다.
조 군은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숨졌습니다. 겨우 8살이었습니다.
당시 사고 현장 맞은 편에서는 조 군의 아버지가 아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아이가 버스에 깔리는 처참한 장면을 그대로 목격했습니다.
사고 소식을 전한 뉴스에는 '횡단보도의 위치를 교차로에서 멀리 옮기라'는 누리꾼들의 의견이 빗발쳤습니다.
조 군의 아버지 역시 며칠 뒤 국회에 청원을 올렸는데 "우회전을 하자마자 횡단보도가 나타나서 위험하다"며 '교차로 회전구간 거리를 확장해달라'고 하소연했습니다.
"보행자 안 보인다. 횡단보도 좀 옮기자"…운전자들 아우성
운전자들이 횡단보도를 교차로에서 조금만 먼 곳으로 옮겨달라는 이유는, 운전자에게는 차량의 오른쪽 측면이 잘 보이지 않는 사각지대이기 때문입니다. 횡단보도가 교차로에 가까이 붙어있으면, 차량이 우회전을 할 때 오른쪽에서 보행자가 건너올 경우 보행자를 보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운전자는 좌측에서 다른 차량이 오는지도 신경써야 하기 때문에 주의가 분산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특히 버스나 트럭 같은 대형차의 경우는 그 사각지대의 범위가 더 넓습니다. 도로교통공단에 따르면, 승용차의 우측 사각지대는 4.45m지만, 2.5톤 중형 화물차는 6.6m, 대형 화물차는 약 두 개 차선 거리인 7.2m나 됩니다. 대형 화물차는 전방 사각지대도 6.6m입니다. 오른쪽 앞에서 누가 다가와도 보이지 않는 거죠.
또 대형차는 회전반경이 크기 때문에 앞바퀴가 이미 회전을 마쳤더라도 뒤이어 회전하는 뒷바퀴에 보행자가 치이는 경우도 많다는 지적입니다.
실제 2018~2020년 차량이 우회전 중 보행자를 친 사고를 보면 승합차, 화물차, 건설기계차 등 대형차의 비중이 61.3%를 차지합니다. 전체 보행자 교통사고에서 이들 대형차의 비중이 36.2%에 그치는 것과 대조적입니다.
횡단보도를 교차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옮겨놓으면 운전자는 보행자를 차량 측면이 아니라, 전방에서 볼 수 있게 됩니다.
"우회전 일시정지 때문에 신호를 대체 몇번 받는 거야"
횡단보도를 교차로에서 다소 떨어진 곳으로 옮겨달라는 또 다른 이유는 차량 정체 때문입니다.
편도 1차로의 경우 직진 차량과 우회전 차량이 한 줄로 지나다니는데, 교차로에서 우회전 방향에 횡단보도가 가깝게 설치돼 있으면 우회전 차량이 보행자를 보호하기 위해 멈춰서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본의 아니게 길을 막아 뒤에 있는 직진 차량도 대기해야 하는 상황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보통 직진 신호시 우측 횡단보도도 파란불이 들어오고, 횡단보도 파란불이 끝나면 직진 신호도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우회전 차량이 보행자 신호 준수를 위해 앞을 막고 서 있으면, 한 발짝도 못 가보고 다음 신호를 기다려야 합니다.
해당 도로 사정을 잘 모르거나 성미 급한 운전자는 괜히 앞차 탓을 하며 경적을 울리기 일쑤입니다. 길을 막고 있는 우회전 차량 운전자라고 마음이 편할 리 없겠죠. 불필요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실제 지난 25일 서울 강서구의 한 교차로에서는 신호가 바뀔 때마다 그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신호는 2~3분 주기로 바뀌었는데, 우회전 차량이 횡단보도에 가로막혀 있어 파란불 한번에 지나가는 차량은 고작 4~5대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운전자들이 차량을 이리저리 틀어 차선 위반을 감수하며 틈새로 빠져나갔기에 그만큼의 통행이 가능했습니다. 다만 이는 언제 사고가 나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인거죠.
사실 이같은 문제는 꽤 오래전부터 지적돼 왔습니다만, 최근 유독 부각되고 있는 이유는 우회전 방법이 올해부터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차량은 우회전 시 마주하게 되는 횡단보도 앞에서 서행 혹은 일시정지 후 보행자가 횡단보도 상에 전혀 없는 경우에만 지나갈 수 있습니다. 즉 우회전을 위해 대기해야 하는 시간이 늘어난 것이죠. 우회전 운전자들은 그에 따라 직진 차량을 방해하지 않고 대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합니다. 횡단보도를 승용차 1대가 설 수 있는 5미터 만큼만 교차로에서 떨어진 곳으로 옮겨주면 그러한 공간이 나오지 않겠냐는 것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빨간불이면 우회전 금지…'일시정지'도 못참나
다만 이는 운전자 중심주의적인 시각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횡단보도를 교차로에서 멀리 옮기면 보행자는 그만큼 먼 거리를 걸어야 합니다. 걷는 거리를 줄이려고 횡단보도를 벗어나 걷는 무단횡단이 늘어나 오히려 사고를 늘릴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옵니다.
운전자가 우회전 후 횡단보도까지 벌어진 거리를 이용해 속도를 높이게 될 경우도 오히려 사고 위험을 높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최우선에 둬야 할 것은 보행자의 안전입니다. 운전자의 사각지대를 해소하면서도, 보행자에게 불편을 야기하지 않는 적정 범위에서 횡단보도의 위치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어입니다.
심재익 한국교통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횡단보도가 교차로 모서리 곡선부에 설치된 사례가 많은데, 그 경우 좌측에서 오는 차량을 신경 쓰느라 보행자까지 신경 쓰기 쉽지 않아요. 때문에 (모서리 곡선부를 지나) 운전자의 시야가 확보되는 직선부의 초입 정도로 위치를 옮기는 것은 타당하다고 봐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회전반경(곡선부)이 큰 교차로도 많은데, 가급적 곡선부를 좁혀야 직선부가 늘어나요. 그래야 보행자의 보행거리가 늘어나지 않고 운전자의 시야 사각지대를 해소할 수 있어요"라고 덧붙였습니다.
임채홍 삼성화재 교통안전문화연구소 수석연구원은 횡단보도를 교차로에 딱 붙일지, 다소 떨어뜨릴 지는 장단점이 극명하게 갈려 쉽게 결정하기 어려운 문제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지금은 웬만하면 횡단보도를 교차로에 딱 붙여서 설치해요. 그게 효율적이기 때문이에요. 보행자의 동선 상 유리하고, 교차로 면적을 지나가는 차들을 계산해서 신호시간을 책정하는데, 교차로 면적이 커지면 교차로를 지날 수 있는 최소시간이 늘어나기 때문에 신호시간도 늘어나게 돼요. 그럼 차들이 정차하는 시간이 늘어나죠. 이는 연료 소비, 시간 소비로 이어져요. 그걸 감수할 수 있느냐죠"라고 말했습니다.
이 연구원은 간단한 예시로 계산했습니다. "차량 한 대 정도 설 수 있는 5m를 미룬다치면, 교차로 네 방향에서 각각 2.4초씩 총 9.6초 교차로 통과시간이 늘어나요. 그러면 120초로 운영하는 신호시간이 129.6초로 늘어나고, 연료소비가 8% 늘어나죠."
이 연구원의 마지막 말은 우회전 정책에 뿔이 나 있는 운전자들도 한번 경청해볼만 합니다. "결국 중요한 건 사회적 합의예요. 우리는 지금 '우회전 시 일시정지' 하라는 것만으로도 반발이 있지만, 미국을 제외한 세계 거의 모든 나라에서 적색 신호 시에는 우회전을 못하도록 금지하고 있어요. 우리도 불과 20년 전만 해도 '우회전 시 일시정지', 빨간불 시 우회전 금지'라고 하면 기름 한 방울 안나는 나라에서 무슨 소리냐는 의견이 우세했어요. 근데 사람들이 점점 안전을 얘기하면서 바뀌어 왔죠. 지금은 과도기여서 앞차가 우회전을 위해 멈춰서 있으면, 뒤에 있는 직진차는 비켜서라도 직진해야 한다며 답답해 하는 경향이 있는 차들이 꽤 있어요. 시간이 좀 지나면 앞차가 우회전을 위해 대기 중이면 '나도 좀 기다려야지' 이렇게 바뀔 거라고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