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디토(Ditto·찬성)와 비토(Veto·반대)'로 갈등이 첨예한 먹고 사는 이슈를 탐구합니다.
[헤럴드경제=김성훈 기자] #. '상품권 교환하는 날'. A 씨는 이 달 19일에 이렇게 휴대폰 알람을 설정해 뒀습니다. 직장에서 한 달 전 설 선물로 받은 모바일 마트 상품권을 지류(종이) 마트 상품권으로 교환하는 날로요. 모바일 상품권 유효기간이 30일밖에 안 돼 19일까지 바꾸지 않으면 휴지 조각이 돼 버리기 때문이죠.
A 씨가 알람까지 맞춰둔 이유는 지난해 회사에서 20만원 상품권을 선물 받았다가 제때 안 바꿔 고스란히 날려버린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쁜 생활 속에 문자메시지로 받은 상품권을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몇 달 뒤 바꾸려 보니 이미 쓸 수 없는 상태가 됐죠. 상품권 판매업체에 문의했지만, 환불도 기한 연장도 안된다는 말만 돌아왔습니다.
B 씨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집에 IPTV와 인터넷을 설치하면서 경품으로 30만원 어치 모바일 상품권을 받고는 당장 쓸 곳이 없어 놔뒀더니, 유효기간이 60일 밖에 안돼 못쓰게 돼버린 거죠. 30만원을 받으면 조금 비싼 요금제를 써도 이익이겠거니 생각했는데, 날려버렸으니 손해가 막심합니다.
'상품권'과 '상품권 교환권' 구분할 수 있나요?
소비자들이 혼동하는 이유는 이런 모바일 상품권 상당수가 '상품권으로 교환하기 위한 상품권'이라는 형식을 갖고 있다는 것 때문입니다. 가령 카카오톡에서 판매하는 A 백화점 상품권 기프티콘을 보면 'A 백화점상품권 모바일 교환권'이라고 쓰여 있어요. 이는 A 백화점이 발행한 상품권이 아니라, 카카오가 발행한 별도의 상품권이죠. 모바일 플랫폼에서 쉽게 구매할 수 있도록 이런 형식을 취한 거죠.
이렇게 할 경우 A 백화점의 상품권 약관이 아닌 카카오의 상품권 약관이 적용됩니다. A 백화점은 얼마 전부터 상품권의 유효기간을 무기한으로 해서 몇년이 지나도 교환이나 환불이 가능하도록 하고 있는데요, 카카오는 이와 별개로 유효기간을 1년으로 설정해두고 있습니다. 대신 유효기간을 연장할 수는 있습니다.
카카오도 많은 비판을 받기는 했지만, 더 큰 문제는 이같은 방식의 '상품권으로 교환하기 위한 상품권'을 발행하는 다른 여러 개의 중소업체들입니다. 카카오는 유효기간이 그나마 1년은 되고, 유효기간이 임박하면 카카오톡으로 알려주기도 하고, 기간을 연장할 수가 있는데, 다른 중소업체들은 그렇지 않거든요.
'상품권'과 '상품권 교환권'을 구분할 수 있는 일반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한 금융권 관계자는 "과거에는 상품권 판매업자들이 신세계, 롯데 등으로부터 상품권을 대량 매입해 이를 직접 팔았지만, 이제는 '상품권 교환권'이라는 이름의 또다른 '파생 상품권'을 만들어 팔고 있다"면서 "이 경우 유효기한, 환불 등의 판매정책을 자체적으로 세울 수 있어 소비자 보호망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10만원짜리 상품권을 9만원에… 상품권 시장 급팽창
모바일 상품권의 짧은 유효기간으로 인한 피해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습니다. 한국소비자원에 따르면, 9~10월만 집계했을 때 2021년 피해구제신청은 495건으로, 2019년(228건)이나 2020년(298건)보다 두 배 가량 늘었습니다. 그 중 70% 가량인 346건이 유효기간이 지나 못쓰게 된 거였죠. 단순히 소비자 상담만 받거나, 상담도 받지 않고 포기한 사례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해가 늘어나는 이유는 상품권을 선물로 선호하면서 시장도 크게 확대됐기 때문입니다. 온라인 조사 전문기관인 피앰아이가 전국 만 20~69세 남녀 3000명을 대상으로 1월 여론조사한 바에 따르면, 명절 선물로 가장 선호하는 것은 '현금/상품권'이었습니다. 지난해 추석 때 조사에서는 30.6%가 '현금/상품권'을 꼽았는데, 이번 설에는 39.8%로 더욱 늘어났습니다. 이에 2021년 모바일 상품권 시장 규모는 6조원에 육박할 정도로 커졌습니다.
게다가 상당수 상품권 판매업체는 상품권 액면가보다 많게는 10% 이상 낮은 금액으로 상품권을 판매하고 있으니 선물을 하면서 비용도 절감할 수 있는 거죠.
반면 모바일 상품권 확산 속도에 비해 이 상품의 문제점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이나 법규의 정비 속도가 늦기 때문에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는 겁니다. 선물로 받은 상품권을 고작 30일이나 60일 밖에 못쓴다고 누가 상상이나 했겠어요. 피해를 겪고 나서야 '이런 거였어?' 하고 조심하게 되는 거죠.
정부도 '이것'까지 보호해주기는 어렵다는데…
정부가 손놓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공정거래위원회는 2020년 '신유형 상품권 표준약관'이라는 것을 만들어 업체들이 따르도록 유도하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 상품권의 유효기한은 최소 1년 이상이어야 하고, 연장 요청도 가능해야 하고, 유효기한이 지나면 발행 후 5년까지는 90%를 환불해줘야 합니다. 권고사항일 뿐이라 지키지 않아도 상관 없지만 B2C(일반소비자가 구매하는 것) 방식으로 구매하는 상품권은 대체로 지켜지고 있다고 하네요.
그러나 서두에 사례로 들었던 A 씨나 B 씨 같은 경우는 여전히 보호를 받기 어렵습니다. 최종 이용자가 일반개인소비자이기는 하지만, 상품권을 구매한 건 A 씨의 회사 등 기업인 B2B(기업이 상품권 업체에서 구매한 것) 방식의 거래이기 때문이죠.
일반소비자는 기업(상품권 업체)에 비해 협상력이 약하고 전문성도 없는 '을'이기 때문에 정부가 보호해주지만, 기업과 기업 간 거래는 굳이 어느 한 쪽을 약자라 구분할 수 없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계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취지입니다.
내가 못 쓰고 당해야만 다른 누군가가 쓸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상황이 문제라 여겨 정부가 규제를 하면 어떻게 될까요? 실제 규제를 위한 법안이 제출되기도 했습니다.
전문가와 업계 관계자들은 규제를 하면 '누가 그런 상품을 팔겠냐'고 말합니다.
노골적으로 말해 이런 모바일 상품권은 처음부터 사용자가 깜빡하고 못쓰기를 바라고 기획됐다는 것이죠. 이용자가 구매한 상품을 다 못써서 기업이 취하는 수입을 '낙전수입'이라고 하는데요, 이러한 낙전수입이 발생할 것을 전제로 상품권을 할인판매한다는 것입니다. 규제로 낙전수입을 거두지 못하게 막아버린다면 업체는 상품권을 더 이상 할인판매할 수도 없는 거죠. 누군가 잊어버리고 못 쓰는 사람이 있어야만, 다른 누군가가 쓸 수 있는 '제로섬 게임'입니다.
그렇다고 무조건 나쁘게 보기는 어렵습니다. 한 업계 관계자는 "5만원짜리 상품권을 산다고 했을 때, 기간제한 없는 것을 액면가 그대로 5만원에 살 것인지, 유효기간이 30일로 제한돼 있는 것을 5% 할인받아 살 것인지의 문제다"라고 했습니다.
전자와 후자 중 어떤 것이 더 좋은가요? 정답은 없습니다. 30일 내에 쓸 수 있으면 후자가 좋고, 그렇지 않으면 전자가 좋은 거죠. 소비자는 선택지가 있기 때문에 유리합니다.
또 다른 관계자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선물을 한 회사는 10만원짜리 상품권을 선물했다는 명분은 챙기고 비용은 절감하기 위해 유효기간이 짧은 상품권을 선물했을 거예요. 선물받을 사람에게 '유효기간이 짧으니 주의하라'는 당부 같은 건 괜히 체면 구기니 하지도 않았겠죠. 받는 사람이 쓰건 말건 선물 줬다는 명분은 챙겼으니까요. 받는 사람이 이런 상품권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면 그냥 날리는 거죠. 선물받을 사람에게 유효기간을 명확히 알려주지 않을 거라면, 유효기간이 긴 제대로 된 상품권을 선물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싼 건 이유가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