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식을 통해 세상을 봅니다. 안녕하세요, 맛있는 이야기 '미담(味談)'입니다.
[헤럴드경제=채상우 기자] 서울에서 1만원으로 점심 한 끼도 사 먹기 힘든 시절이다.
냉면 한 그릇이 평균 1만원(1만692원)을 넘었고, '국민메뉴' 비빔밥도 1만원을 기록했다. 밥 한 끼 잘 먹어보겠다고 고른 삼계탕 한 그릇은 1만6000원, 삼겹살 200g은 2만원(1만9031원)에 육박한다(한국소비자원 참가격, 서울 지역 기준).
살인 물가 속에 1인 가구는 장보기조차 겁난다. 요리를 해보려고 재료를 샀다가 먹는 것보다 버리는 게 더 많으면 속까지 쓰려온다. 그렇다고 '초라한' 지갑에 외식을 나서기란 언감생심이다.
정녕, 서울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맛있는 밥 한끼 차려주는 '착한 식당'은 없는 걸까. 헤럴드경제가 서울 종로, 서대문, 성북구 일대를 직접 발품 팔아 '착한 식당들'을 찾아 나섰다. 서울에서 1만원으로 삼시세끼를 해결하고 그 다음날 아침까지 든든하게 먹을 수 있는 비결! 기자가 직접 맛본 식당들의 이야기를 취업난 속 배고픈 청년의 하루에 빗대어 풀어봤다.
'팍팍한 현실, 그렇다고 굶을 순 없다'…1만원 들고 거리로
"이민성 님께서는 OO그룹 대졸 신입사원 공개채용 1차면접/인정성검사에 불합격하셨습니다."
잠에서 깬 민성은 둥그렇게 부은 눈을 억지로 비벼가며, 어제 온 문자메시지를 다시 확인했다. 꿈이길 바랬는데, 역시나 현실이다.
'이번이 몇 번째냐. 손가락 발가락 몇번을 왕복해도 못 세겠네.'
무뎌질 때도 됐지만, 쉽지 않다. 하필 오늘이 민성의 생일이라는 것도 그를 더 서글프게 만들었다. 지난 밤 먹은 깡소주에 배고픔까지 더해져, 속이 쓰려온다.
'궁상 떨어봤자 누가 알아주냐. 내 생일 내가 챙겨야지.'
민성은 고시원방을 샅샅이 뒤져 모은 '1만원'을 쥐고 거리로 나섰다.
쓰린 속을 풀어주는 '하얀 순두부'…종로 '고향집'
고시원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종로 낙원상가 굴다리 밑을 지나 백반집 '고향집'에 도착했다. 하얀 가격판에 빨간 글씨로 '선지해장국', '순두부', '버섯콩나물' 3000원이라고 선명하게 적힌 메뉴가 눈에 띈다.
주변 순대국밥집들이 몇년새 2000원 이상 올랐지만, 여기만큼은 한결같이 3000원을 유지하고 있다. 그나마 부추전 가격을 재료비 상승으로 인해 지난해 3000원에서 4000원으로 올린 게 전부다.
"순두부 백반 주세요."
주문한 지 5분 정도 지나자, 뚝배기에 바글바글 끓는 하얀 순두부찌개가 나왔다. 김가루와 파로 맛을 내고, 화룡정점으로 계란 한 알이 떠 있는 순두부 찌개는 아침밥으로 더할나위 없다. 반찬으로는 김치가 전부지만, 이보다 더 좋은 반찬이 있으랴.
한입 뜨자 뜨뜻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와 쓰린 속을 달래준다. 부드러운 순두부가 전날 과음으로 잃었던 입맛을 살려놨다. 달걀이 완전히 익기 전 숟갈로 푹 떠 먹었다. 묵직하고 고소한 달걀이 자칫 가볍게 느껴지는 순두부 찌개를 완벽히 보완해준다.
입이 심심해질 때 쯤, 빨간 다대기로 맛의 변화를 줬다. 이제는 우리가 다 아는 그 매콤한 순두부찌개다. 이제부터는 함께 나온 뽀얀 쌀밥이 빛을 발한다. 매콤한 순두부찌개에 밥까지 말아 국밥처럼 든든히 먹으면, 오늘 하루도 화이팅할 수 있는 '에너지 풀 충전' 완료다.
보고도 믿기지 않은 3000원짜리 '돈까스', 신촌 '꼬숑돈까스'
오후 2시 신촌에서 취업 스터티모임을 마치고 나니 또 속이 허해온다. 생일인데, 오랜만에 뱃속에 기름칠을 하고픈 기분이다.
대학 동기 녀석과 함께 향한 곳은 연세로 뒷골목에 위치한 '꼬숑돈까스'. 이곳은 신촌 터줏대감인 '형제갈비'에서 돈 없어 끼니를 챙기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는 '착한 식당'이다.
메뉴는 단 3가지. '꼬숑돈까스 3000원', '트루꾜숑돈까스 5000원', '레알꼬숑돈까스 7000원'이 전부다. 기준은 모두 양 차이다. 트루꼬숑돈까스는 꼬숑돈까스의 2배, 레알돈까스는 3배 많다.
민성은 꼬숑돈까스, 친구 정환은 레알꼬숑돈까스를 시켰다.
"3000원에 진짜 이게 말이 돼?"
감탄이 절로 나왔다. 바삭하게 튀겨낸 돈까스는 손가락 한마디 이상의 두께로 고기는 옅은 핑크빛 자태를 뽐낸다. 곁에는 가늘게 채썬 양배추가 한 웅큼 자리를 잡고 있다. 도자기절구에 깨를 곱게 갈아 돈까스 소스를 듬뿍넣고 섞고 있자니, 고급 일식 돈까스집에 온 기분마저 든다.
'파삭' 잘 튀겨진 돈까스를 한입 물었다. 담백한 부위의 고기를 썼는지 육즙이 나오는 맛은 아니지만, 결대로 부드럽게 씹히는 맛이 별미다. 돈까스 소스에 푹 찍어 먹으니, 자칫 뻑뻑하게 느껴질뻔한 고기 맛이 완벽히 보완된다. 흰밥에 된장국으로 입가심을 하니 얼마든지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야, 생일인데 그거가지고 되냐.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어."
친구 정환이 자기 돈까스의 절반 정도를 덜어 민성의 그릇에 올려 놓는다. '그래서 레알돈가스를 시켰구나' 민성의 눈이 감동으로 반짝인다. 거한 돈까스 생일상으로 불뚝 올라온 배를 두드리니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다.
마음을 보듬어 주는 엄마 손맛 '김치찌개', 연신내 '따뜻한 밥상'
"누나 이런거 안 챙겨줘도 된다니까."
"너 굶는 거 엄마가 알면 나만 혼나. 생일인데 애 때문에 저녁 챙겨주기도 어렵고, 이거라도 가져가."
연신내에 사는 첫째 누나네 집에 들른 민성의 양손이 김치와 장아찌 등 반찬으로 무겁다. 9살 차이 나는 누나는 서울살이하는 민성에게 엄마같은 존재다. 얼마 전 태어난 조카 때문에 정신없는 와중에 민성의 생일이라고 반찬을 따로 챙겨준 누나에게 쑥스러워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했다.
점심은 돈까스였으니 저녁은 개운한 김치찌개로 택했다. 연신내역 인근에 있는 김치찌개집 '따뜻한 밥상'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최운형 목사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2019년 문을 연 식당이다. 메뉴는 3000원짜리 김치찌개가 전부다. 밥은 무료로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퍼다 먹을 수 있다. 사리도 라면 반쪽 500원, 두부 반모 500원 등 저렴하다. 고기는 1000원만 내면 추가를 할 수 있다.
"김치찌개 나왔습니다."
보글보글 끓고 있는 묵은지 돼지고기 김치찌개 냄새에 입에 침이 고였다. 묵은지에 돼지고기 두부까지 김치찌개 한 냄비가 푸짐하다. 매콤 새콤, 감칠맛으로 똘똘뭉친 묵은지 맛이 일품이다. 돼지고기도 큼직한 크기로 꽤나 들어있어 든든하다. 국물을 떠다 먹으니 느끼했던 속이 개운하게 내려가는 게 느껴진다.
허기가 가시고 나니 주변이 눈에 들어온다.
'하루를 살아도 온 세상이 평화롭게. 이틀을 살더라도 사흘을 살더라도 평화롭게. 그런 날들이 그날들이 영원토록 평화롭게'
가게 곳곳에 붙여 있는 시와 글귀들이 지친 마음을 위로한다.
새로운 희망을 열어주는 '1000원 아침 학식'
'남은 돈 1000원'
다음날 오전 7시40분. 민성은 학식을 먹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교에 갔다. 강의는 몇 시간 뒤에 있었음에도, 민성이 일찍 학교를 간 이유는 '1000원 학식'을 먹기 위해서다.
민성이 다니는 학교는 이번 학기부터 아침에 '1000원 학식'을 운영하고 있다. 재학생은 누구나 1000원에 아침을 먹을 수 있다. 인기가 많아 8시 배식시간에 맞춰 가면 늦는다. 30분 전에는 줄을 서야 한다. 20분 전에 도착했음에도 식당은 학생들로 가득찼다.
이날 반찬은 돼지불고기에 된장국, 배추김치다. 흰밥도 야무지게 고봉으로 퍼담았다.
'이 정도면 이른 아침 부랴부랴 뛰어온 보람이 있지.'
따뜻한 아침밥을 먹고 나니 취업의 근심도 잠시나마 잊혀진다. 민성의 얼굴에도 웃음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