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또 한 번 한국의 뒤통수를 쳤다. 이번엔 반도체다. 앞서 미국은 한국산 전기차에 대한 보조금(7500달러)을 쏙 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을 발표했다. 미 행정부와 의회가 극비리에 진행해 한국 정부와 현대차그룹은 손쓸 겨를이 없었다. 정부가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지만 보조금 지급 대상 상업용 판매차량에 리스차를 넣는 수준에 그쳤다. 배터리 부품과 핵심 광물 요건이 남아 있지만 주도권을 쥔 미국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다.
이런 와중에 지난주 국내 반도체산업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미국 상무부가 미국에 반도체공장을 짓는 기업에 주는 지원금에 대한 기준을 발표하면서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제조 생산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총 520억달러(약 68조원), 그중 반도체공장을 짓는 기업에 390억달러(약 51조7000억원)를 지원키로 했다.
하지만 조건이 가혹했다. 그중 독소 조항은 초과수익 공유와 첨단 칩 공정에 대한 접근, 중국 또는 관련 국가에서 10년간 반도체 생산능력 확대 금지다. 한 마디로 보조금을 줄 테니 더 벌면 이익을 미국에 토해내고, 핵심 공정은 공개하라는 의미다. 기술이 무기인 반도체산업 특성상 공장 내부를 슬쩍 한 번 보는 것만도 철저히 막고 있는데 핵심 공정을 공개하라는 것은 한 마디로 ‘손에 쥔 패를 다 보이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울러 중국 투자 제한은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중국에 메모리 생산기지가 있는 한국 기업에 ‘중국 사업을 접으라’는 메시지나 다름없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에서 낸드플래시의 40%를, SK하이닉스는 우시 D램공장에서 50%를 생산하고 있다. 공정 업그레이드가 되지 않으면 중장기적으로 반도체공장은 폐쇄 수순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우리로선 반도체가 한국 수출의 20%를 차지하는 핵심 업종이라는 점에서 메가톤급 악재다. 미 반도체산업협회(SIA)의 설명에 따르면, 미국에서 첨단 반도체공장을 건설해 10년간 유지하는 비용은 대만, 한국, 싱가포르보다 약 30%, 중국보다는 50% 많이 든다고 한다. 미국 정부도 이를 알기 때문에 보조금을 통해 투자를 유인한 것이다. 그런데 초과이익은 최대 75%까지 공유하고 핵심 기술까지 공개하라는 조건은 당혹스럽다. 월스트리트저널 등 미국 내 언론조차 과도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만약 미국이 조건을 먼저 제시했다면 국내 기업 어느 곳도 미국에 투자하겠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에선 “이럴 바엔 미국 보조금을 받지 않는 게 더 낫다”는 말까지 나온다. 면밀히 따져봐야겠지만 향후 이익과 세계 시장 확장성을 제한하는 조건이 확정되면 우리로선 득보다는 실이 훨씬 커 보인다.
한국 정부는 아직 세부적인 조건이 나오지 않은 만큼 미국 관계당국에 최대한 우리 입장을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이창양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은 6일 정부 세종청사에서 기자들과 만나 반도체지원법의 세부 지원 조건에 대해 “국내 기업들에 불확실성을 안겨주고 있다”며 “기업에 부담이 되는 조항들이 상당 부분 완화되도록 미국 정부와 적극적으로 협의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큰 흐름을 바꾸긴 쉽지 않아 보인다. 미국은 자국 일자리 유치와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에서 중국을 배제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한국 정부와 기업도 한·미 간 경제안보동맹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어 쉽사리 미 공장 투자를 철회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미국, 일본, 대만과의 ‘칩 4 동맹’ 이슈까지 맞물려 있다.
그렇다고 미국의 지나친 ‘자국 우선주의’에 그냥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 마지막 기회는 남아 있다. 오는 4월에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국빈방문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통상적으로 양국 정상회담에 앞서 서로간의 이슈에 대한 실무 협상이 이뤄질 것이다. 이를 계기로 한국에 유리한 조건을 최대한 이끌어내야 한다. 협상을 위해선 “이런 조건이면 차라리 한국에 공장을 짓겠다”며 맞받아쳐야 한다. 특히 ‘생큐’를 외치며 한국 기업들을 치켜세웠던 미국의 반전된 모습에 대해 신뢰성을 언급하며 강하게 항의해야 한다.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다고 하지만 너무 비싼 값에 점심을 먹을 이유도 없다.
권남근 뉴스콘텐츠부문장 겸 산업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