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창극단, ‘작창가 프로젝트’ 시연회
지난 2월 시작한 10개월의 여정
4명의 신진 작창가들의 도전과 실
동시대 창극·미래 창극의 가능성 발견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것은 삼행시다. “‘게’ 게에노무시키야, ‘우’ 우선 한 대 맞자, ‘사’ 사람 돼야지.” 쾌락만 탐하는 금수저 남편 ‘김무숙’에게 복수하기 위해 그의 처가 기생 ‘의양’으로 변신하려 의지를 다지는 장면. 사실 ‘게우사’는 ‘벗을 타이르는 말’이라는 뜻이다. ‘젊은 창극’은 제목부터 비틀고 뒤집어 객석으로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난데없이 ‘하나님 타령’을 하는 찬송가가 습격하고, ‘속사포 랩’의 화신 아웃사이더보다 정확한 발음으로 찰진 소리가 이어진다. 기생이 되겠다는 김무숙의 처에게 “잘 하는 것이 뭐냐”고 묻자 던진 말. 한 가지 주의할 점, 욕은 아니다. “중국어는 취팔러마, 일본어는 조토마테”. 관객은 또 한 대 얻어맞고, 어깨까지 들썩이며 웃음을 터뜨린다. MZ세대 신진 작창가 서의철과 극작가 이철희가 쌓아 올린 창극 ‘게우사’다.
새로운 시대의 창극(唱劇)이 등장했다. 전통을 성큼성큼 뛰어 넘어 직조한 기발한 세계. 국립창극단 60년 역사상 가장 파격적이고 명랑한 시도가 네 명의 젊은 작창가와 극작가를 통해 완성됐다.
국립창극단은 지난 2월 ‘작창가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에 중심을 두고 완성해온 ‘전통 창극’의 시대에서 ‘동시대 창극’으로 관객과 호흡하기 위해 새로운 창작진을 발굴하기 위한 프로젝트다. ‘작창’은 한국음악의 장단과 음계를 가지고 극의 흐름에 딱 맞는 새로운 소리를 짜는 일이다. 판소리를 바탕으로 하는 창극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작업이다.
허종열 국립창극단 예술감독 직무대리는 “기존 다섯 바탕의 창극을 넘어 글로벌 시대에 맞는 신진 작창가를 발굴하기 위한 미래지향적 프로젝트”라며 “극본 작업을 마친 이후 멘토들의 수업을 통해 네 명의 작창가를 육성하는 프로젝트를 이어왔다”고 말했다.
지난 10~11일 국립극장 달오름에서 열린 ‘국립창극단 작창가 프로젝트 시연회’는 지난 여정의 결실이다. 우리나라 창극의 역사는 국립창극단과 함께 진화를 거듭했다. 판소리 다섯 바탕을 넘어 서양의 고전과 그리스 로마 신화, 웹툰, 창작 창극에 이르기까지 새 시대의 현대적 창극을 무대에 올리며 우리 시대의 관객과 소통해왔다. 이번 작창가 프로젝트는 동시대와 더 가까이 호흡하기 위한 국립창극단의 시도이자, 새로운 세대의 작창가를 발굴해 ‘지속가능한 창극’을 만들기 위한 첫 걸음이었다.
네 명의 작창가 장서윤 유태평양 서의철 박정수는 지난 10개월 동안 각자의 창극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신진 작창가 네 사람은 중진 작가 김민정(옹처), 김풍년(강릉서캐타령), 이철희(게우사), 김민정(덴동어미 화전가)과 각각 팀을 이뤄 협업했다. 시연회에 올리기 위해 30분 분량으로 축약하고, 작창가들이 직접 국립창극단 단원을 캐스팅해 작품을 무대에 올렸다. 이 프로젝트는 ‘신진 작창가’를 발굴하는 작업이었지만, 시연회는 국립창극단의 저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궁무진한 소재 위에서 자유롭게 날아오른 신진 작창가들의 도전은 둘째 가라면 서러울 뛰어난 기량의 단원들이 완성했다. 단원들의 연기와 소리가 ‘화룡점정’이었다.
젊은 작창가들의 창극은 신선했다. 전통의 요소들이 중심을 잡으면서도 현대적 감각과 색다른 시도가 어우러졌다. 기존 창극에선 볼 수 없는 파격이 이어졌고, 영화 드라마 K팝의 인기 대사와 가사가 속속 녹아들었다.
‘옹고집타령’을 재해석한 ‘옹처’(작창 장서윤)는 ‘동시대 창극’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했다. 전통의 세계에서 비춰진 남녀의 역할과 위치에서 벗어나 주체적인 여성으로서의선택과 결정권을 강조한다. ‘진짜 옹고집’과 ‘가짜 옹고집’의 다툼이라는 황당무계한 설정을 ‘옹, 엥? 잉!’이라는 우리말의 묘미를 살린 의성어로 표현한 것도 재밌다. 이 세 단어가 ‘옹처’가 끌고 갈 이야기와 감정을 함축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옹처’의 작창은 무리 없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관객을 쥐락펴락하는 요소는 약해 다소 심심할 수 있지만, 몇몇 실험적 시도가 인상적이다. “어감이 잘 붙지 않아 기존 창극에선 들을 수 없었던 경기토리를 사용”(허종열 감독)한 점이다. 거기에 풍자 가득한 대사 사이로 “몰디브에서 모히토, 모히토에서 몰디브”라며 영화 ‘내부자들’의 대사를 차용한 것도 의외의 재미였다.
국립창극단의 간판스타 유태평양은 ‘강릉서캐타령’을 통해 창극 배우이자 소리꾼에서 작창가로 영역을 확장했다. 유태평양은 ‘명민한 작창가’였다. ‘강릉서캐타령’은 짧은 30분 안에 국립창극단이 그간 보여준 두 시간 짜리 창극의 모든 요소를 압축해 기승전결을 완성했다. 간결하고 깔끔하게 시작하는 이야기는 다채로운 음악, 변화무쌍한 작창으로 점차 세계를 확장한다. 관객과의 능수능란한 ‘밀당’(밀고 당기기)도 다년간의 창극 무대 경험이 만들어낸 장기다.
‘강릉서캐타령’은 일종의 판타지다. 강릉 명기 매화에게 버림받은 골생원이 매화와 강릉부사에게 복수하는 과정에서 그의 겨드랑이에 붙은 서캐 세 마리의 만남을 그린다. 동시대를 관통하는 거시적인 이야기는 아니나, 이 작품은 아기자기하고 귀엽다. 까슬까슬한 속곳 대신 뽀송한 속곳 한 장을 간절히 바라는 골생원과 속곳을 지어주는 서캐 가족. 대본을 완전히 간파한 유태평양의 작창은 이 단조로운 이야기를 무한히 확장해, 사랑스러운 이야기로 다시 만들었다. 특히 유태평양은 대본을 빛내고 관객을 사로잡는 요소, 관객들이 원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아는 작창가였다. 드라마틱하고 다이내믹하게 이어지는 장단(리듬)과 길(음계), 성음(악상)은 객석의 몰입도를 높이는 요소였다. 그간 국립창극단의 무수히 많은 인기 창극이 보여준 방식이자 유태평양 스스로가 무대 위에서 관객과 호흡한 시간의 결과였다.
가장 파격적인 작품은 ‘게우사’였다. 일단 악기 구성부터 남달랐다. 드럼 소리를 내는 북과 장고에 거칠고 요란한 기타와 베이스가 얹어지고, 그 위로 신시사이저가 경쾌하게 움직이자 단출한 2인 창극은 유난히 반짝거렸다. 유실된 판소리 일곱 바탕 중 ‘무숙이타령’이 다시 태어난 ‘게우사’는 도발과 의외성의 연속이다. 20대의 작창가, 20대의 창극단 단원이 능청스럽게 풀어낸 말맛과 소리와 연기의 향연이 쉴 새 없이 강약 펀치를 던진다. 다만 때때로 서양악기와 판소리의 흐름이 어우러지지 않고, 전자악기의 소리에 소리꾼의 발성이 묻혀버린 것은 아쉽다. 그럴지라도 2022년 창극계의 가장 인상적인 등장이다. 이번 프로젝트의 막내 작창가 박정수가 참여한 ‘덴동어미 화전가’는 음악과 소리의 아름다움이 잘 살아난 창극이다. 여성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통해 우리 모두의 봄날을 이야기하며 소리와 그 소리를 돋보이게 하는 음악에 집중했다. K팝 그룹 마마무의 히트곡 ‘나로 말할 것 같으면’이나, “현빈, 원빈, 김우빈보다 아매도 내 낭군이라”며 시공간을 넘나든 대목도 웃음 포인트였다. 기존 창극의 형식과 소리의 본질을 되살린 창극이었다.
소리를 만드는 것은 ‘짓는다’(작창, 作唱)고 표현한다. 집을 짓고, 밥을 짓고, 글을 짓는 것처럼 소리 역시 ‘짓는다’고 말한다. ‘빠른 속도’가 경쟁력인 시대에 ‘짓는다’는 것은 오랜 기다림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긴 시간 쌓아온 노력과 정성, 한 사람 한 사람의 역사가 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작창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 프로젝트에 멘토로 참여한 한승석 중앙대학교 교수는 “작창은 단시간에 완성되지 않는 고도로 전문화된 분야”며 “같은 국악인이라 하더라도 판소리의 복잡다단한 붙임새와 시김새, 음악적 변화를 온전히 꿰뚫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국립창극단의 작창가 프로젝트는 시간의 역사가 쌓아온 소리꾼들의 재능을 발굴해 새로운 작창가로 육성하는 일이다. 이 프로젝트 자체가 창극의 ‘새로운 미래’이자, 다음 세대를 가꾸는 ‘백년지대계’다. 국립창극단은 이를 통해 새로운 작창가 양성과 IP(지적재산권) 개발의 밑거름을 다지고, 신진 작창가들에겐 날개를 펼 수 있는 무대를 마련해준다. 허종열 감독은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우열을 가리기 힘든 네 명의 작창가와 작품을 발굴했다”며 “이 작품들 중 멘토들과 관객 평가를 종합해 국립창극단의 기획공연으로 선보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