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은 사실이 아니라 단지 관념 영역
고대 그리스, 인종개념 없고 지리 중시
전쟁 피난민·바이킹 약탈로 노예 전락
근대 이전 서구에서 노예는 주로 백인
인종시험대 된 미국, 아일랜드인 경멸
우월·권력의 동의어 백인은 실체 없어
“인종은 사실이 아니라 관념이다. 따라서 인종을 둘러싼 물음은 사실의 영역이 아니라 관념의 영역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한다.”
넬 어빈 페인터 프린스턴대 미국사 명예교수는 ‘백인의 역사’(해리북스)에서 좀 낯선 주장을 편다. 인종은 과학이 아니라 만들어진 허구라는 얘기다.
그의 말대로 2천년 전 고대 그리스 시대엔 백인이라는 범주도, 인종이라는 개념도 존재하지 않았다.피부색이 중요하지 않았고 오직 지리적으로 어디에 사느냐가 관심사였다. 당시에는 스키타이인, 켈트인, 갈리아인, 게르만인 등 부족명으로 불렸다.
저자는 서구 2천년 역사, 정치사, 과학사, 경제사, 문화사를 가로지르며 인종 차별의 기준인 백인이란 누구인지를 규명해나간다.
고대 사회에서 노예제는 일반적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기원전 4,5세기에는 노예가 자유민보다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테네에서만 8만~10만 명에 달했다.
이 시기, 노예 공급은 주로 흑해 주변에서 무역을 통해 이뤄졌다. 끝없는 전쟁으로 내몰린 피난민들이 노예로 팔려갔다. 족장들은 이들을 그리스 노예 상인에게 팔고 포도주와 옷감 같은 사치품을 받았다. 소금이나 필수품을 원한 부모가 자식을 파는 일도 흔했다. 이스탄불과 에페스는 그런 노예시장의 중심지였다.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5세기에서 11세기까지 중세 암흑기 동안 노예 공급은 바이킹이 맡았다. 바다의 약탈자이자 뛰어난 노예 상인인 바이킹은 북부 유럽과 러시아를 수백 차례 습격, 가는 곳마다 약탈하고 수천 명씩 노예를 잡아들였다. 노브고로드 같은 정착지 주변과 브리스톨과 더블린에 노예 상설 시장이 섰으며, 그 중 더블린은 11세기 유럽 최대의 노예 시장이었다.
저자는 노예의 피부색에 대한 고정관념이 4세기에 형성된 것으로 본다. 웨일스인과 켈트인이 대개 햇빛에 노출돼 머리와 피부가 가무잡잡하다는 관념이 노예에 색깔을 입히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널리 퍼졌다는 것이다.
중세에는 누구도 노예무역을 피할 수 없었다. 바이킹과 이탈리아 상인, 오스만제국 상인은 붙잡아 온 자들을 먼 곳으로 데려가 팔았다. 특히 부유한 이탈리아로 많은 노예가 들어왔는데, 타타르인이라고 뭉뚱그려 불렸던 그들은 러시아인이나 캅카스인, 그리스인, 무어인, 에디오피아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예 거래의 중심에는 설탕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1300년대 중반 흑사병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지중해와 십자군 왕국들은 발칸반도에서 차츰 많은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된다. 슬라브(Slav)라는 말이 노예(slave)로 바뀐 연유다.
국제적인 상업중심지인 베네치아는 15세기 중반까지 노예를 포함해 모든 동방 산물의 시장을 통제했으며,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노예무역을 장악했다. 베네치아는 시장에서 판매되는 모든 노예에 인두세를 부과했다.
그러나 16세기 노예가격이 상승하고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이 쇠락하면서 사실상 노예무역에서 사라졌다. 그때쯤 오스만제국의 흑해 점령으로 이탈리아 상인들은 노예 공급처에 닿을 수 없었고 가격이 올라 노예는 사치품이 된다.
노예제는 브리튼 영국 경제에 깊이 침투해 있었다. 잡혀온 노예 뿐 아니라 브리튼의 빈민은 자신과 자녀를 노예로 팔았다.11세기 브리튼 주민의 10분의 1 가량이 노예가 된 것으로 추산된다. .
백인 노예는 17세기까지 번성했다. 영국과 포르투갈은 부랑아, 기결수, 가난한 여성들을 아메리카로 보내 노예처럼 부렸고 가재도구처럼 팔았다. 17세기 브리튼인 남녀는 미국 담배농장에서 아프리카인보다 많았다.
근대 이전 서구에서 노예는 주로 백인이었다는 얘기다.
미국은 서유럽 지식인들에게 인류를 시험하는 장으로 관심을 모았다. 미국땅을 밟은 첫 이민자 앵글로아메리칸은 당시 유럽 지식인들 사이에 퍼져있던 인종적 의미가 깃든 독일 이론과 고대 그리스에서 완벽한 아름다움을 찾던 관념을 통합, 이어갔다.
따라서 백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이 아니었다. 우월한 인종에 대한 열망은 백인 안에서도 위계를 만들어냈다. 특히 기근으로 미국으로 엄청나게 많은 수가 이민을 온 가난한 가톨릭교도 아일랜드인들을 경멸했다. 백인은 게르만인-스칸디나비아인 혈통에 뿌리를 둔 튜턴인, 색슨족, 앵글로색슨족에 한정했다.
당시 지식인들은 이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19세기 미국 지성 랠프 월도 에머슨은 아일랜드인을 코케이션 인종, 즉 백인에서 배제했으며, 칼라일 역시 아일랜드인을 “인간돼지”라고 불렀다.
상황은 남북전쟁을 계기로 이민자들이 연방군에 참여해 싸우면서 바뀐다. 미국에 더 많은 이민자가 들어오는 20세기에 들어설 무렵엔 아일랜드인 가톨릭교도와 독일인은 상층으로 이동하고 남유럽과 동유럽에서 온 새로운 이민자들이 하층민을 이루게 된다.
같은 백인이지만 떠돌이, 빈민, 범죄자, 정신박약자 등 열등한 이들은 ‘퇴화한 가족’으로 불리며 강제불임시술을 당했다.1917년엔 이민국이 지능검사법을 도입, 열등 인종을 배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유대인의 83퍼센트, 헝가리인의 80퍼센트, 이탈리아인의 79퍼센트, 러시아인의 87퍼센트가 정신박약자”였다.
저자가 우월성과 아름다움, 권력의 동의어로 여겨지는 백인이란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여정에서 만나게 되는 건 그런 백인의 실체는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종 차별의 근거 역시 없다. 미국의 이민과정에서 보여준 인종차별을 통해 한국적 상황을 대비시켜 볼 수도 있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백인의 역사/넬 어빈 페인터 지음,조행복 옮김/해리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