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창기 개인 프라이버시 절대성 강조
민주주의와 대타협시기 전성기 구가
20세기 초 인권운동 거치며 더욱 굳건
‘자유·개인·권리·평등’가치 구현 안돼
강경 우파 득세-영미·유럽 분열로 흔들
자유민주주의 반드시 성공도 실패도 없어
“잘 이해되고 옹호되어야 존속” 강조
최근 들어 ‘민주주의의 역행’‘자유주의의 후퇴’라는 우려가 적지 않게 들린다. 영국과 미국, 독일, 프랑스 등 자유민주주의의 종주국들도 예외가 아니다. 자유주의가 내건 자유와 개인, 권리, 평등의 가치가 제대로 구현되지 않는 구조적 취약성과 그에 대한 불신이 커진 까닭이다. 비자유적·비민주적 강경 우파의 득세, 경제난, 영미와 유럽의 분열, 지정학적 고립 등도 지반을 흔들고 있다. 그렇다면 자유민주주의는 실패한 걸까?
영국의 정치 전문 저널리스트 에드먼드 포셋은 역저 ‘자유주의’(글항아리)에서 자유민주주의가 옹호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긴다면 자유주의를 제대로 살펴보자고 제안한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그의 탐색은 1830년 자유주의의 탄생부터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씨름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이끌어내고 좌우파로 갈려 21세기 혼란스런 모습까지 200여 년의 자유주의의 성장과 위기의 일대기를 섬세하게 그려낸다.
자유주의는 19세기 산업화와 혁명의 와중에 싹을 틔웠다. 유럽은 구질서가 무너지고 새로운 질서에 대한 요구로 요동쳤다. 변화를 거부하고 구질서로 복귀하려는 보수적 시도들이 저항을 받았고 언론,출판, 여행, 거주, 결사, 종교 활동에 대한 제약들이 도전을 받았다. 신생 아메리카에선 자유라는 기치 아래 과거의 제약들이 사라지고 있었는데, 이를 추종하는 당파가 자유주의자라는 이름을 내걸고 활동하기 시작했다.
자유주의의 초기엔 공인된 이론가도 신앙을 전파할 신도도 없었고, 딱히 자유주의 이념을 대변하는 철학도 없었다. 관점은 느슨하고 해석의 여지가 많았고 이는 계속 논란거리가 됐다. 최초의 자유주의자들은 초기 산업 자본주의의 격동과 18세기 후반 두 혁명 이후의 사회적 혼란 속에서 윤리적·정치적 안정을 확보할 지속 가능한 새로운 정치질서를 꿈꿨다.
자유주의자들이 내세운 이념들은 저마다 달랐지만 이들이 내건 가치는 갈등의 불가피성, 권력에의 저항, 진보에 대한 믿음, 시민의 존중으로 수렴된다.
이들은 사회의 도덕적 물질적 갈등은 결코 제거될 수 없고 그저 억제되거나 어쩌면 유익한 방향으로 길들여질 수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또한 정치적이든 경제적인 것이든 사회적인 것이든 견제되지 않는 권력에 반대했으며 인간의 삶과 사회적 병폐는 개선될 수 있다는 진보적 관점을 유지했다. 또한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하거나 어떤 존재이던 간에 그들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자유주의의 가치는 19세기 보수주의와 사회주의, 20세기의 파시즘과 공산주의, 21세기 권위주의와 좌우 포퓰리즘, 신정주의, 일당 국가 자본주의와도 구별된다.
저자는 초기 자유주의 선구자들의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는데, 인간 능력의 무한함에 초점을 맞춘 훔볼트, 개인의 프라이버시의 절대성을 강조한 콩스탕, 견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을 반대한 기조, 대중 민주주의의 압력에 대한 균형추를 찾고자한 토크빌, 사회진보를 전망하며 정부의 중앙집중화를 강조한 체드윅, 시장을 사회정의의 조정자로 다룬 스펜서, 자유주의의 상충하는 신조를 하나로 아우른 존 스튜어트 밀 등을 소개하며 이들의 주장이 자유주의의 역사 내에 어떤 모습으로 변주되는지 조명한다.
자유주의의 성숙기(1880~1945년)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대타협”을 통해 꽃을 피운다.
1880년대 이후 몇십 년간 계급 갈등의 압력 속에서 정부에 새로운 임무가 부여된 가운데, 신흥 엘리트인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적· 경제적·윤리적 측면에서의 독점적 위치를 포기하고 인민주권을 수용한 반면 대중 세력은 절차에 대한 자유주의적 규칙, 소유권 보호, 개인의 선택에 대한 존중을 받아들이며 자유민주주의는 하나가 된다.
이 시기는 제국주의 시대로,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자”라는 자기 모순을 드러내기도 한데, 저자는 제국주의가 근대성과 개인존중의 사상을 전파한 것 또한 사실이라고 지적한다.
20세기 초에 이르면 사회는 다양성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시민적 존중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면서 자유민주주의가 더욱 힘을 얻게 된다. 특히 1945년 이후 인권운동에서 성과가 두드러진다. 반면 무역과 경제에선 자유주의적 제국주의적 경쟁을 야기했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이후로부터 1989년까지를 자유민주주의의 두번째 성공시대로 본다. 복지국가에 의해 승인된 자유민주주의는 서구의 규범이 되고 소비에트와 대비, 자유민주주의 사회는 살고 싶은 곳으로 매력을 얻게 된다. 하지만 사회적 요구와 분쟁이 갈수록 다면화되면서 자유주의 정치는 복잡해지고 이를 해결할 대안으로 세계화가 진행된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여정을 집짓기에 비유, 1830~1880년에 자유주의자들은 청사진을 그렸고, 1880~1945년 집을 지었지만 그 집을 다 태워 먹었다. 1945년 두 번째 기회를 잡았고 1989년에 이르러선 자유주의가 동네의 자랑거리가 됐지만 이젠 옛일이 돼버렸다고 설명한다.
저자는 자유주의의 종말이 왔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민주주의적 자유주의가 반드시 실패한다고 혹은 반드시 성공한다고 보장한다는 식의 그 기만적인 이야기들에 저항하라”며 “자유민주주의가 얼마나 잘 이해되고 옹호되는지에 따라 자유민주주의가 존속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고 강조한다.
책은 자유주의자들의 연대기라 할 만큼 200년 역사의 각 페이지를 장식한 수많은 정치사상가들의 궤적을 폭넓은 시야와 통찰, 활달한 필체로 한 코로 꿰어내 길을 잃지 않게 안내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p.com
자유주의/에드먼드 포셋 지음, 신재성 옮김/글항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