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성·이성범 포머티브 건축사사무소장
제주에서만 40개 프로젝트 ‘제주 건축가’
건축주와 가족·가치관에 대해 깊은 대화
땅·주변이야기 풀어 감성있는 공간 조성
건축물마다 다른 ‘일관된 독특함’ 가져
제주 서귀포시 무릉리 인적이 드문 마을길 끝으로 밭담이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삼각집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다. 뾰족하게 솟은 세모 지붕은 지면과 거의 맞닿아 있다. 마치 땅 위를 부유하는 듯하다. 그래서인지 견고하지만 결코 투박하지 않다.
회색빛 천연 석재로 촘촘하게 쌓아 올린 입면은 성벽처럼 내부를 꼭꼭 숨긴다. 지붕 아래 낮게 깔린 창만이 제주의 자연을 집 안으로 들여보낸다. 좁다란 통로 끝 작은 문 뒤로 어떤 공간이 펼쳐질지 쉬이 상상할 수 없는 곳, 바로 ‘트믐’이다.
지난달 31일 서울 종로구 동숭길 사무실에서 만난 고영성·이성범 포머티브 건축사사무소 공동대표는 자타가 공인하는 ‘제주 건축가’다. 두 사람 모두 제주 출신은 아니지만 제주에서만 벌써 40개가 넘는 프로젝트를, 그것도 성공적으로 해냈다. 특히 최근 ‘공간 소비’라는 개념에서 주목받고 있는 스테이를 많이 지었다.
“초창기 돌집 리노베이션에 참여했는데 이슈가 되면서 알음알음으로 하다 보니 여기까지 왔네요. 저희가 공간적으로 재미있게 풀어나가는 게 제주와 맞았던 것 같아요.”
스테이 트믐은 포머티브가 가장 최근에 완성한 작품이다. ‘쉼을 통해 균형을 이루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펼쳐 달라”는 건축주의 주문에 맞춰 포머티브가 그야말로 ‘하고 싶은 건축’을 했다.
이성범 대표는 “너른 대지의 땅만 딱 주어졌다”고 당시를 회고하며 “땅과 주변의 콘텍스트(context·관계성)를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가며 독특한 공간을 만들려고 노력했다”고 말했다. 경험해보지 못한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 모든 시간을 오롯이 그 안에서 보낼 수 있게끔 만드는 게 포머티브가 생각하는 ‘스테이 건축’의 기본이다.
디자인은 궁금증을 자아내는 것에 주안점을 뒀다. 입면을 삼각형으로 풀어내고 외장재로 많이 쓰지 않는 천연 슬레이트를 바른 것도 외부에서 봤을 때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형태와 소재, 느낌을 담아내기 위해서였다.
특히 입면을 바닥에서 띄운 것은 트믐의 키포인트가 됐다. “땅에 박혀 있으면 육중한 느낌에서 끝나버리잖아요. 살짝 띄워 제주의 풍경과 조경이 실내 공간으로 그대로 들어오도록 했어요.” 건물 안에 있어도 외부 공간과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싶었다고 이 대표는 설명했다. 이는 창이나 벽을 통해 안과 밖으로 나뉘는 공간의 경계를 느슨하게 허무는 작업이었다.
좁은 공간에서 극적인 공간을 연출하기 위해 중앙에는 나선형 계단을 뒀다. 나선형 계단은 좁고 불편하지만 탐험하는 느낌을 준다. 공간의 흐름에 긴장감을 주는 장치 역할을 톡톡히 했다. 2층에 올라가기 전까지는 위층 공간구조를 인지하지 못하고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비로소 바깥 전경이 눈 앞에 펼쳐지도록 했다. 스테이의 필수요소가 된 수공간도 2층 야외 데크에 놨다.
이 대표는 “원경으로 펼쳐지는 제주의 자연을 담고자 했지만 공간에 들어가자마자 한눈에 보이는 것은 시시하고 재미없다”면서 “공간의 위계와 함께 시퀀스를 공간별로 담아내려고 한 것이 트믐의 가장 큰 설계 콘셉트”라고 설명했다.
트믐은 포머티브가 그간 선보인 건축물과는 또 다르다. 형태도 색감도 질감도 어느 하나 비슷하지 않다. 다만 새롭고 특색 있다는 점에서는 일맥상통해 보인다. 두 대표는 이를 ‘일관된 독특함’이라고 표현했다.
고영성 대표는 “각 땅이 가지고 있는 특성을 잘 살리기 위해선 건축물마다 각각의 표정이 있어야 한다”며 “한 가지 색보다는 다양성을 가져가려고 노력한다”고 말했다. 이 대표도 “건축주가 다르고 땅이 다르고 그 속의 이야기가 다르니 건축물은 제각각일 수밖에 없다”고 맞장구를 쳤다.
“독특함을 담아내려고 노력하죠. 초창기 저희를 찾아오는 분들은 다들 ‘제각각이어서 좋다’고 했어요. 그런데 요즘 들어 ‘너희 작품 같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독특함 속에서도 약간의 무언가가 보이나 봐요. 이제 우리만의 ‘아이덴티티’가 생기고 있는 것 같아요.” 두 대표는 함께 웃었다.
포머티브(formative·조형적인)라는 사무소 이름에서도 드러나듯 두 대표는 조형성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름의 형태를 기하학적으로 표현한 ‘삼달오름’이나 비정형적 별채 온두막(원두막+오두막)을 품은 ‘의귀소담’, 엇갈린 삼각기둥 3개동으로 이뤄진 ‘더스테어’ 등 대표작만 봐도 독특한 형태부터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그들이 조형성만큼이나 중요히 여기는 것이 감성이다. 건축에는 삶이 담겨야 한다는 게 두 대표의 공통된 믿음이다. 사고의 과정에 초점을 맞춘 건축을 추구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 대표는 “제일 처음 건축주를 만나면 일단 숙제부터 내준다”면서 설문지 한 부를 꺼내 보였다. ‘당신은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집에 살고 싶습니까’라는 제목의 설문지에는 건축 공간 경험부터 집에 대한 생각, 가족이나 삶에 대한 가치관을 묻는 문항이 가득했다. 평범한 하루의 일기를 나눠달라는 주문도 있었다. 말하자면 건축주가 진짜로 원하는 건축이 무엇인지를 숙고하며 찾아가는 과정이다.
“건축주가 며칠 동안 고민해오면 그걸 가지고 설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 이건 첫 단계에요. 설계 중간중간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죠. 결국 그분들의 삶이나 집, 가족에 대한 생각이 반영된 공간을 저희가 디자인하고 그려내야 하는 것이니까요.” 고 대표의 말에 이 대표도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선 감성의 공유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두 사람은 믿고 있다. 이 대표는 “설계만 6~7개월, 시공까지는 1년 반 이상의 시간을 투자해 만드는 결과물이기 때문에 애정을 쏟을 수밖에 없다”며 “완성되고 나면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는 감정이 들기도 한다”고 했다.
유튜브 채널 ‘포머티V’ 속 유쾌하고 재치 넘치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두 사람은 진지했다. “건축이 보다 가깝고 편안하고 쉬워야 한다는 차원에서 재밌게 표현했지만 실제 건축할 때는 저희 엄청 치열합니다.” 이 대표는 선을 분명히 그었다.
차별화된 공간 설계로 스테이 건축을 선도하고 있는 포머티브지만 이제는 공공건축, 현상설계 등으로도 스펙트럼을 넓혀보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이 대표는 “스테이 건축을 지속적으로 하면서 규모를 키워보고 싶고 다른 건축에도 스테이에서 시도해보는 재미있는 공간을 담아보고 싶다”며 “앞으로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하려고 한다”고 힘줘 말했다.
“사실 최고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해봤는데 문득 꾸준히 해서 언젠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사 중 한 팀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포머티브의 야망은 이제 막 첫 걸음을 뗐다.
김은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