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대 3척중 라핀타호 바요나 귀환
콜럼버스 태운 산타마리아호는 침몰
비고·바요나,아메리카 교류 가장 활발
원정기념조각옆, 아메리카 노예 동상도
바요나요새옆 대서양 순례길 멋진 운치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산티아고 순례길 포르투갈 코스 길목, 매서운 바람과 파도가 몰아치는 대서양 해변 과르다 산꼭대기, 켈트인들의 2000여년 전 ‘동그라미’ 마을(카르스토 셀타)에서 대서양을 내려다보는 것은 뿌듯함 말고도, 아찔함, 아련함, 모종의 상념을 한꺼번에 제공한다. ▶기사 하단, 헤럴드경제 리오프닝 특별기획 ‘산티아고 순례길’ 전체기사 목록
▶성깔 있는 대서양= 불과 600여년 전까지만 해도 대서양은 ‘죽음의 바다’이고, 건너편 땅은 이승이 아니라는 맹신이 있었음을 생각해보면, 지상의 높은 곳, 하늘과 더 가까운 곳, 죽음의 대서양 바다에 더 근접한 곳에 정착한 켈트인들의 뜻이 예사롭지 않다. 여행자도 ‘내 발 아래 대서양이 있다’는 오만을 부릴 겨를이 없었던 것 같다.
육지와 가까워지면 점점 온순해지는 태평양과는 달리, 한없이 거칠기만 한 대서양의 성깔을 목도하면서, 인문지리가 생활문화와 사람의 성향을 규정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 가까이에 있는 태평양이 좀 더 푸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카르스토 셀타 마을에서 일직선 대서양 해변길을 따라 30㎞가량 북쪽으로 가면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원정대 귀환 성지, 바요나를 만난다.
세르히오 스페인 가이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492년 콜럼버스 무장 함선 3척이 아메리카에 상륙해 원주민을 굴복시키는데 성공한 뒤, 3척 중 가장 먼저 라핀타호가 1493년 3월 1일 바요나에 귀환했다.
▶감추고 싶은 콜럼버스의 실체= 그래서 바요나 사람들은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원정 성공 사실을 유럽 최초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 라닝야호가 리스본으로 귀환했고, 콜럼버스를 태운 산타마리아호는 거친 풍랑에 침몰해 끝내 귀환하지 못했다고 전했다. 그의 설명엔 전하고 싶은 것만 전하려는 마을주민의 마음이 깃들여있는 듯 하다.
그러나 고증된 역사적 사실은 다르다. 처절했고, 초라했으며, 비정했고 한편으론 미화를 통한 대중조작도 있었다. 1차 3척 원정은 맞으나 모두 귀환했고, 2차 17척 원정, 3차 8척 원정, 마지막 4차 4척 원정이 이어졌다.
그리고 콜럼버스는 목표로 했던 '아시아에서의 금 찾기'가 실패하자 아메리카 땅의 주인인 토착민들을 유럽에 인신매매하는 노예상으로 전락했으며, 실망감을 가진 투자자와 왕실 앞에 떳떳이 나서지 못하다가 이사벨라 여왕이 죽은 지 2년만에 자신도 쓸쓸히 생을 마감한다.
가이드의 설명은 바요나 주민들이 믿고 싶은 것을 그대로 전한 것이지, 고증된 역사적 사실을 전한 것은 아니다.
▶역사를 바꾼 현장= 콜럼버스에 대한 미화, 우상화는 이후 아메리카의 어원이 된 후배 원정대 아메리고 베스푸치 등이 미주대륙에 대한 식민지화를 공고히 한 이후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콜럼버스가 미주대륙을 아시아로 착각했음을 밝혀냈고, 그 후 스페인 사람들은 콜럼버스가 실제 갔던 곳을 베스푸치의 이름을 따 아메리카로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콜럼버스가 죽은 이후 후배 원정대들의 무력 정복이 속속 성공하면서, 아메리카는 이베리아 반도를 필두로 상당수 유럽인들에게 ‘약속의 땅’이 된다. 원정은 바다와의 싸움, 기존 토착민들과의 전쟁이고, 승패에 따라 역사는 갈렸다.
바요나 항구에는 라핀타호 복제 선박이 사시사철 정박해있고, 아메리카 원정을 상징하는 500주년 기념작품, 야외조각 군상이 라핀타호를 내려다본다. 작품 제목은 스페인 입장에서, ‘신세계+구세계의 만남(엔카운터)’이다.
엄밀히 따지면, 아메리카는 원주민들이 수십만년 살며 잉카, 마야, 아즈텍 문명 등 유럽 못지 않게 찬란한 문명을 이미 일궜던 구대륙이다. 콜럼버스 원정대에게 초기 매우 우호적이었다가 학살당하고 그들이 옮긴 몹쓸 병까지 걸린 원주민들에게 죄가 있다면, 사람을 살육할 목적의 총칼이 없던 것.
▶아메리칸 노예의 동상= ‘만남’ 조각상 인근엔 인디언 금속조각상이 설치돼 있다. 원정 간 곳이 아시아 인 줄 알았는데 아메리카였으니, 동상의 주인은 아메리칸이다. 그는 노예였다. 콜럼버스는 금과 향신료 매매를 구실로 나섰지만, 결국 인신매매 하는 노예 장삿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원주민에 대한 학살도 이어졌다. 후배 원정대들의 방법도 평화롭지 못했고, 결국 수백년이 지나서야 노예는 형제의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4개주로 구성된 갈리시아 지방의 5번째 주는 남아메리카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라는 말이 있다. 바요나과 인근 대도시 비고는 남미와 상호 인적교류가 가장 많았던 도시다.
나중에라도 남미 출신 이민자들을 기억하며 인디언동상을 세워준 후세 시민들의 마음은 따뜻하다. 비고 시민들도 시간이 지나면서 상생의 자세(크로스 릴레이션십)로 적응을 도왔다고 세르히오 가이드는 전했다.
항구와 ‘만남’ 조각상 사이 파빌리온들은 매년 3월 열리는 ‘도착 축제’(아리바다 페스타)의 포장마차 역할을 한다. 도착의 의미가 늘 축제 같지는 않았다. 4차에 걸친 아메리카 무력 원정에서 영예롭지 못한 귀환이 더 많았다. 콜럼버스는 말년에 학살자, 사기꾼이라는 힐책 속에 살아야만 했다. 나중에 유럽의 남북아메리카 대륙의 무력 지배가 성공하지 못했거나, 유럽 역사가들이 미화시켜주지 않았다면, 콜럼버스는 희대의 사기꾼으로 어느 야사에 쓸쓸히 기록돼 있을지도 모른다.
최근 포르투갈 언론이 콜럼버스가 갈리시안 사람인 100가지 이유를 재야사학자들의 분석을 인용해 보도한 적이 있어 화제가 됐다.
▶바요나 골목 중세 시간여행= 바요나 골목안 걷기는 중세 시간여행이다. 바요나 미세리코르디아(자비) 성당은 왕립인증교회이다. 골목마다 전통이 묻어나는 공방과 가게가 있다. 콜롬버스의 원정을 재가하고 지원한 이사벨라여왕과 추후 도시건설을 전폭적으로 도운 알폰소 9세왕이 인증한 왕립 강소도시다.
해안가로 툭 튀어나온 곶(串)에 지어진 바요나 요새 역시 몬트 ‘레알’ 즉 왕립이다. 스페인, 포르투갈 대서양 연안은 영국의 프란시스 드레이크 원정대 등 해적의 침탈을 받아 방어벽을 굳건히 세웠는데, 바요나의 몬트레알 요새, 비고의 몬트 도 카스트로 등도 다 그런 목적으로 구축됐다.
요새 건너편 해안 산꼭대기엔 십자가를 머리에 인 거대 성모상 석당이 마치 양양 낙산사 해수관음상처럼 바다를 지키고 있다. 순례자와 시민들은 이런 호위 속에 S라인 해안산책로를 마음 놓고 활보하고 있었다.
바요나 알폰소9세 왕의 동상, 바요나 마을을 일구는데 기여한 어촌계장 호메나세 석상도 세워져 있고, 많은 자전거 순례자들이 이 길을 지나간다.
▶자정에 여인의 배에 물을 붓는다?= 바요나와 북쪽 니그랑 마을을 연결하는 자그마한 로만스타일 중세시대 다리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다.
임신 못한 여인이 자정 넘어 처음 만나는 남자에게 “배에 물을 부어달라”고 요구해 그 남자가 응하면 임신할 수 있다는 속설이 전해진다. 하필이면 배에.. 이 다리 위에도 어김없이 갈리시아주 최남단 투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을 개척한 어부 출신 성인 산텔모의 석상이 서 있다. 산 텔모에 경배하는 이 일대 일부 채플에선 배에 물을 부어주는 의식을 실제로 한다고 한다.
바요나에서 북서쪽 베이 해안선을 따라 조금만 더 가면 만나는 비고는 갈리시아 최다인구를 가진 ‘일 하는 도시’이다. 라 리가 프로축구단 셀타비고 스타디움 인근에 시트로엥 공장이 있다. 항만에는 물류시설이 빼곡하다. 산업도시 속에 센트럴파크 기능을 하는 그린존도 두었다.
바요나 부터 땅끝 피스테라 까지의 지형을 보면 리아스식 해안이다. 신(神)이 오른손바닥을 눌러서 다섯손가락 모양의 만(灣:bay)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덕분에 베이 안에서는 높지 않은 파도로 굴 등 다양한 수산물 양식이 이뤄진다. 바테야(Batea)라고 불리는 양식장은 유칼립투스 나무로 만든다. 내륙에서도 유칼립투스 나무는 계획적으로 조림돼 제지산업 등에 쓰이는데, 1800년대 살바도르 라는 사람이 호주에서 들여왔다고 한다.
▶시민,여행자 놀이터가 된 셀타 비고 요새= 비고의 서쪽 해안 절벽 위의 몬트 도 카스트로 요새는 영국 프란시스 드레이크 함대에 한 번 침탈 당한 후 구축한 방어시스템이다. 드레이크는 이곳에서 ‘해적’으로 불린다. 포르투갈 독립전쟁 즉 스페인-포르투갈 전쟁 때에도 방어 요새의 중심적 역할을 했다.
이곳의 ‘성(城)을 들어 올리는 남성군상’ 청동상은 국토수호의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시내 중심 로터리엔 말 여러 마리가 엉킨 대형 조각상이 우뚝 서 있다. 말과 바다의 축제가 유명한데, “말이 왜 거기서 나와” 할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외적을 막아낸 기병을 숭상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지금 비고 요새 카스트로는 연인들과 가족, 시민들의 데이트 산책을 위한 시민공간이 되었다.
갈리시아주에서 ‘일 하는 도시’로 불리며 상업에 능한 비고에는 스페인 전역에 걸쳐 최고의 백화점 중 하나로 꼽히는 엘 꼬르테 잉글레스, 유럽 최대 수산시장이 있다. 또, 교통약자들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한 시내 오르막길 무빙워크, 까다로운 식생의 동백꽃 가로수길이 있어 눈길을 끈다.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살리고, 약자를 도우며 자연과 상생하려는 마음이 읽힌다. 앞바다엔 스페인판 알카트라즈, 즉 교도소로 쓰이던 샌시몬섬과 샌안토니섬이 있다.
높은 데서 내려다 볼 때엔 줄 지어 몰려오는 거친 파도가 장쾌할지 몰라도, 대서양 위에 있다는 것은 매우 위태롭기에 거기엔 목숨을 건 도전도 있고, 절망의 감옥도 있었던 모양이다. 지금도 수백년 대서양 침몰선의 보물은 계속 출수되고 있다. (계속)
◆산티아고 순례길 헤럴드경제 인터넷판 글 싣는 순서 ▶3월8일자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걸으면, 왜 성인군자가 될까 ▶3월15일자 ▷스페인 갈리시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 ▷산티아고는 제주 올레의 어머니..상호 우정 구간 조성 ▶3월22일자 ▷산티아고 대서양길①땅끝끼리 한국-스페인 우정, 순례길의 감동들 ▷산티아고 대서양길②임진강과 다른 미뇨강, 발렌사,투이,과르다 켈트마을 ▷산티아고 순례길, 대서양을 발아래 두고…신의 손길을 느끼다 ▷산티아고 순례지 맛집①매콤 문어,농어회..완전 한국맛 ▷산티아고 순례지 맛집②파니니,해물볶음밥..거북손도 ▷산티아고 순례길 마을식당서 만나는 바지락·대구·감자·우거지…우리집에서 먹던 ‘한국맛’ ▶3월29일자 ▷산티아고 대서양길③콜럼버스에 대한 애증, 바요나·비고(수정) ▷산티아고 대서양길④스페인 동백아가씨와 폰테베드라, 레돈델라, 파드론 ▷산티아고 대서양길⑤(피스테라-무시아) 땅끝은 희망..행운·해산물 득템 ▷산티아고 프랑스길①순례길의 교과서, 세브리로 성배 앞 한글기도문 뭉클 ▶4월5일자 ▷산티아고 프랑스길②사모스,사리아,포르토마린,아르수아 ▷산티아고 프랑스길③종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의 매력들 ▷산티아고 영국길..코루냐,페롤,폰테데움,베탄소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