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문재인 대통령이 일본에 발신한 메시지에는 양국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강조하는 대목이 눈에 띄게 늘어났다. 3·1절 기념사는 과거에 발목 잡혀 있을 수 없다면서 “양국의 협력과 미래 발전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도 양국이 국교정상화 이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라는 공통 가치를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함께 이뤄왔다고 평가하면서 “양국 현안은 물론 코로나와 기후위기 등 세계가 직면한 위협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대화의 문을 항상 열어두고” 있다고 언급했다.
불과 2, 3년 전만 해도 대통령 연설에 나타난 대일 인식은 비판적이거나 공격적이라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일 관계가 악화되던 2019년 광복절 경축사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를 국가목표로 제시하면서 일본의 부당한 수출 규제에 맞서 책임 있는 경제강국을 향한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2020년 1월 신년사도 양국 간 미래지향적 협력관계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도 조건으로 일본의 수출 규제 철회를 제시했다. 그런데 문 대통령이 최근 특별한 조건을 달지 않고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재구축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라고 생각한다. 악화된 한·일 관계가 한국의 안보나 외교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재인식한 결과의 소산일 수도 있고, 올해 출범한 조 바이든 미국 행정부가 여러 경로를 통해 한·미·일 협력관계 재구축 필요성을 전달한 것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문제는 문 대통령이 미래지향적 한·일 관계 재구축을 일관되게 강조하는데도 실질적인 진전이 보이질 않는다는 점이다. 외교부를 포함한 정부 당국자들이 일본 측 카운터파트들과 수차례 협의를 가졌으나 상호 입장 차이와 불신이 쉽게 해소되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한·일 관계가 악화 상태로 방치된다면 한국 외교와 안보정책에 가해지는 부담이 만만치 않을 것이다. 연례적으로 개최해온 한·중·일 정상회의 및 각료 간 협의도 최근 2~3년간 정체 상태다. 일본이 주도한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참가도 여의치 않을 것이고, 한반도 안보를 위해 가동돼온 한·미·일 안보회의 등 3국 간 협력에도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 요컨대 한·일 협력 부재는 마치 병목처럼 한국 외교와 안보정책의 발전을 가로막을 장벽이 될 수 있다.
각 정당의 책사들은 대선후보들이 봉착한 곤경을 타개하기 위해 몇 개씩의 비단주머니를 마련하곤 한다. 그런데 국가 전체의 안보와 외교를 위해 현재 한·일 관계의 곤경을 타개하기 위한 비단주머니가 무엇보다 필요하다. 일본과 신뢰도 회복하면서 한국 국익에도 도움되는 한·일 관계 타개의 방책은 무엇일까. 필자는 우리 정부가 해산을 결정했던 화해치유재단을 정상화하는 것이 하나의 실마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화해치유재단은 2015년 위안부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거출한 100억원 규모의 성금을 바탕으로 한·일 양국이 조성했다. 그간 위안부 피해자 34명과 유족 60여명에게 각 1억원과 2000만원 상당의 지원금을 제공한 것으로 안다. 그런데 우리 정부가 위안부 합의 재검증 과정에서 해산 결정을 내렸고, 이 같은 조치는 일본이 ‘국가 간 합의와 국제법을 위반’하는 나라라고 한국을 비판하고 불신하게 된 요인이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를 고려할 때 한·일 관계의 미래지향적 발전을 위한 첫걸음은 일본 측에 화해치유재단 재구축 방침을 제안하고 향후 운영을 위해 협의한다는 점을 밝히는 것이다. 이를 거쳐 60여억원에 달하는 재단 운용 잔액을 위안부피해자사업에 활용한다면 대통령이 강조하는 ‘피해자 중심주의’에도 부합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법원 판결과 관련된 강제징용공 문제와 달리 행정부 차원에서 가능한 이 같은 조치를 통해 한·일 관계 재구축 수순을 찾는 것이 우리 외교의 고립을 탈피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박영준 국방대 안보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