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준의 안보 레이더] 칼 빈슨 같은 정치가를 기다린다

미국이 보유한 10여척의 항공모함은 주로 위대한 대통령이나 해전사에 빛나는 전공을 세운 제독의 이름을 따라 명명된다. 일본 요코스카를 모항으로 하는 제7함대 소속 항모 로널드 레이건이나 2024년 취역 예정인 존 F. 케네디가 그렇다. 현존 최대 항모인 니미츠도 해전사상 빛나는 수훈을 세운 동명의 제독을 기린 것이다. 그런 점에서 최근 인도·태평양 해역에서 활발하게 활약하는 항모 칼 빈슨은 예외적이다.

대통령도 아니고 전쟁사상 용명을 날린 해군 제독도 아닌데 왜 미국은 1982년 취역한 네 번째 원자력 추진 항모에 상대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정치인의 이름을 헌정했을까. 칼 빈슨은 조지아주 출신 정치인으로 1930년대 하원 해군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한 인물이다. 1930년대 초반 미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선택한 국제고립주의 기조 속에 대공황 극복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그러한 시기 칼 빈슨 의원은 1920년대 초반 영국 및 일본 등과 합의했던 워싱턴 군축조약의 상한선에도 미달하는 해군 전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특히 장래 일본의 위협에 대응하고 조선업 분야 고용증대를 위해 사회 인프라 건설에 배정된 예산에 해군 전력 증강 항목을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당시 격한 비난 여론에 조우했다. 종교계 지도자들은 칼 빈슨의 주장이 당시 국제평화 및 군비축소 조류에 어긋나는 위험한 주장이라고 공개 비판하기까지 했다.

그러한 여론의 반발 속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칼 빈슨의 주장에 주목했다. 이 결과 루스벨트 정부는 1933년 2억3000만달러 규모의 해군 전력 증강 예산을 배정해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호네트 등을 건조했고, 1934년과 1938년에도 칼 빈슨이 주도한 대규모 해군 전력 증강 사업을 승인했다. 만약 이 시기 미국이 해군 전력 증강 사업에 착수하지 않았다면 10년이 채 지나지 않아 발발한 아시아·태평양 전쟁에서 대일전 승리는 결코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칼 빈슨이 일본과의 전쟁 가능성을 정확하게 예상하고 있었는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의 판단과 정책추진이 없었다면 10여년 후 미국이 암담한 전쟁을 겪었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지금 인도·태평양 해역을 항행하는 항모 칼 빈슨은 비록 여론의 역풍을 맞더라도 미래를 내다보며 안보태세를 강화하려 했던 한 정치가의 혜안과 정책추진에 대한 미국 국민들의 존경을 상징하는 표상에 다름 아니다.

대선국면을 맞아 여야 정치인들이 저마다 공약을 제시하고 있다. 마치 소비자 취향에 맞춰 상품을 생산하고 진열하듯 대선후보들은 각 분야 전문가들을 경쟁적으로 캠프에 불러모아 관련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여론의 지지를 얻지 못해도 10여년 후 대한민국이 직면할 경제나 안보의 모습을 전망하면서 대응하는 정책구상들이 마련되고 있을까. 미중 간 전략적 경쟁에 대응해 10여년 후 우리 경제와 안보를 굳건하게 유지하기 위해 어떤 준비와 정책적 선택이 필요한 것인가. 핵·미사일 전력증강을 지속해온 북한에 대해 과연 10여년 후 우리가 바라는 평화공존을 구축하려면 어떤 대북정책을 준비해야 하는가.

각 후보들의 발언과 공약 속에 10년은커녕 1~2년 뒤를 내다보며 국가전략을 고민한 흔적들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 것은 필자가 과문한 탓일까. 여론이 뜨겁게 호응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응하는 정책구상을 누군가로부터 듣고 싶다. 새롭게 건조되는 우리 해군 함정들에도 역사상 위인이나 지역명뿐 아니라 미래 국가전략을 제시한 현대 위인들의 이름이 명명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박영준 국방대학교 안보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