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산재보험의 업무상 질병 처리 지연 문제가 논란이다. 근로복지공단의 작년 통계에 따르면 근골격계 질병의 산재 판정에 평균 121.4일, 뇌심혈관계질병은 132.4일이 소요됐다. 무엇 때문에 업무상 질병 처리에 시간이 소요되는 것일까. 가장 주된 원인은 ‘발병 원인’규명. 건강보험은 상병 원인보다 진단이 중요해 상병 확인 시 즉각적인 보험 적용에 무리가 없다. 그러나 산재보험은 업무로 인해 상병이 발생했다는 인과관계 확인 없이 적용이 불가하다.
신속·공정한 산재 판정을 위해서도 구체적 사실 조사는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질병 발생은 취미·생활습관 및 가족력·기저질환 등 개인적 요인이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객관적 근거보다 일방적 진술, 주관적 판단에 의존한 산재 승인이 이어질수록 당사자는 결과에 수긍하기 어렵다. 이에 공단에서 관련 자료를 확인하고 필요 시 고도의 전문성을 갖춘 역학조사를 실시함으로써 판정 수용도 제고를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산재보험법령은 공단 조사기간 등을 처리기한 산입범위에서 제외하고 있다. 해외 선진국의 업무상 질병 처리현황도 우리와 유사하다. 근로복지공단 자료에 의하면 독일은 2014년 기준 평균 5.2개월의 기간이 소요됐다. 또한 일본·오스트리아·스페인 등 대다수 국가의 법정 처리기한이 6개월이다. 업무상 질병 여부 판단을 위한 최소한의 검토기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반면 노동계는 문제개선을 위해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자료조사의 대폭 생략, 일정 수준의 유해·위험요인 노출 시 추가조사 없이 산재로 인정하는 ‘추정의 원칙’ 적용 확대, 공단 심의기구인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질판위) 심의 없이 산재로 바로 인정하는 질병 확대를 주장한다. 나아가 산재신청인에게 우선 보험급여를 지급하고, 산재 불승인될 경우 지급된 급여를 환수하는(선지급 후정산) 급진적 방안까지 거론되고 있다.
그러나 처리기간 단축에 초점을 둔 요구안은 기대보다 우려가 앞선다. 부실한 재해조사는 판정의 신뢰도 저해를 야기해 재심 청구와 법적 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현행 추정의 원칙 기준도 역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고, 반드시 적용 대상 직종·업종의 합의가 필요해 단기간 내 적용 확대는 무리다. 질판위 심의 없는 산재 인정 역시 처리기간 단축을 위한 조치일 뿐 판정의 공정성 확보 측면에서는 합리적 이유를 찾기 어렵다. 보험급여 선지급 후정산은 산재 불승인된 신청인에게 지급된 급여의 온전한 회수를 장담하기 어려운 현실에서 보험재정에 미칠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노사정은 과거부터 치열한 논의를 통해 균형 있는 산재보험 제도 운용과 발전을 이끌어왔다. 2006년 총 42개 과제에 이르는 산재보험 제도 개선 합의가 대표적이며, 현행 질판위와 조사·판정 절차 등은 당시 합의문 이행의 결과물이다. 합의문 발표 후 15년이 지난 지금, 산재보험 처리 지연을 비롯한 제도 개선을 위해 노사정이 다시 한번 지혜를 모을 시점이 됐다. 노동계가 이제는 투쟁보다는 정부 및 경영계와의 협력에 힘써주기를 기대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라고 했다. 노사정이 인내심을 갖고 함께 고민한다면 합리적 개선 방안을 찾지 못할 이유가 없다.
임우택 한국경영자총협회 안전보건본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