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정계 복귀 시사…조기 퇴진
정계 복귀 행보에 중앙은행 독립성 훼손 비판도
후임엔 네덜란드·스페인 중앙은행 총재 물망
수석 이코노미스트 두고 佛·獨 신경전 시작
[헤럴드경제=도현정 기자] ‘조기퇴진설’이 끊이지 않았던 크리스틴 라가르드(70)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임기를 8개월여 남긴 시점인 다음해 2월 사임하기로 했다.
ECB는 29일(현지시간) 성명에서 “라가르드 총재가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이사회 의장(다음해 2월 7일 사임하겠다고 안토니우 코스타 유럽이사회 의장(유럽연합 정상회의 상임의장)에게 통보했다”고 밝혔다. ECB는 유럽연합(EU) 기능조약에 규정된 절차에 따라 유럽이사회가 후임자를 임명할 것이라고 전했다. 코스타 의장은 후임 총재 선정 절차가 이날부터 시작돼 지체 없이 진행될 것이라 강조하기도 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프랑스 재무장관과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를 지낸 인물로, 2019년 11월 ECB 총재로 취임했다. ECB 총재는 임기가 8년이어서 라가르드의 임기는 다음해 10월말에 끝난다. 그러나 라가르드 총재를 둘러싸고 조기 사임한 뒤 세계경제포럼(WEF) 의장으로 옮긴다거나 다음해 4월 대통령 선거가 있는 프랑스 정치권에 복귀한다는 등의 소문이 숱하게 나왔다.
특히 대선 국면의 프랑스 정치권에서 라가르드를 수혈한다는 소문은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의 대선 후보 마린 르펜이 여론조사 지지율 선두를 꾸준히 지키면서 증폭됐다. 유로존(유로화 사용 21개국)을 비롯한 유럽통합에 부정적인 르펜을 견제하기 위해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퇴임하기 전에 후임 총재 임명을 해놔야 한다는 것이다.
한 소식통은 로이터통신에 그가 프랑스와 전 세계의 정치 현안에 목소리를 내기 위해 사임했다고 말했다. 라가르드 총재는 평소 유럽통합주의자를 자처해왔다.
라가르드 총재는 이날 남긴 영상 메시지에서 “이 기관에 근무한 건 큰 자부심이자 영광이었다”며 “잘 해냈다는 생각과 미래에 대비하는 ECB를 뒤로 하고 떠난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ECB 통화정책회의를 마친 뒤 기자회견에서 조기 사임에 대해 “통화정책과 무관한 발언, 표현, 참여의 자유를 갖고 싶기 때문이다. 내 목소리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프랑스 정계 복귀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라가르드 총재의 모국인 프랑스가 재정 위기를 겪어, ECB의 개입 가능성까지 거론되는 와중에 자국의 정치 일정을 고려해 중도 퇴진하는 것 자체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마르쿠스 페버 유럽의회 의원은 이날 “국내 선거 일정에 맞춰 사임한다는 인상을 준다면 어떤 정치적 계산도 초월해야 할 기관의 신뢰를 훼손할 것”이라고 말했다. 반론도 있다. 마르셀 프라트처 독일경제연구소(DIW) 소장은 “조기 사임으로 각국 정부와 기관에 유럽의 가치와 ECB의 독립성을 보호할 후임자 임명 기회를 줬다”고 말했다.
ECB 총재를 비롯한 유럽 정가 최고위직은 EU 회원국 추천을 거쳐 15개국의 찬성과, 해당 회원국 인구가 EU 전체의 65%를 넘으면 되는 식으로 결정된다. 실질적으로는 EU 양대 축인 독일과 프랑스 정상의 합의가 결정적으로 작용한다.
후임 물망에는 클라스 크놋 전 네덜란드 중앙은행 총재와 파블로 에르난데스 데코스 전 스페인 중앙은행 총재가 오르고 있다.
독일 경제지 한델스블라트는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가 최근 두 사람을 따로 만나 면접을 봤다고 전했다. 마크롱 대통령은 프랑스가 ECB 수석이코노미스트 자리를 가져가는 조건으로 크놋 전 총재를 지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ECB의 요직인 수석이코노미스트는 독일도 원하고 있어, 수석이코노미스트 자리를 두고 독일과 프랑스가 신경전을 벌이는 형국이다.
두 나라의 신경전에 따라 예상 밖 인사가 선임될 수도 있다. 2019년 ECB와 EU 수장을 동시에 교체할 때에도 프랑스와 독일의 신경전으로 인해, 애초 유력 후보로 거론되지 않던 라가르드 총재와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이 각각 자리에 앉았던 사례도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파비오 파네타 이탈리아 중앙은행 총재와 스페인 부총리 출신인 나디아 칼비노 유럽투자은행(EIB) 총재도 ECB 총재 후보로 언급된다고 보도했다.
라가르드 총재가 조기 퇴진을 결정하면서 보리스 부이치치 부총재(크로아티아)를 제외한 ECB 수뇌부도 대거 교체될 전망이다. 필리프 레인 수석이코노미스트(아일랜드)는 다음해 5월 말 임기 만료로 퇴임한다. ECB의 실세로 꼽히는 이자벨 슈나벨 집행이사(독일)는 다음해 1월부터 IMF 통화자본시장국장을 맡는다.
kate01@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