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의 경쟁자는 넷플릭스와 백화점”
예술의전당 광장서재·사일런트 디스코
세종 무대 위 서재, 국립극장 북라운지
유휴공간 아닌 또 하나의 공연장 확장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음악분수 앞 잔디밭에 빈백이 깔렸다. 시민들은 그 위에 드러누워 출판사 김영사와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이 골라 놓은 책을 읽었다. 이달 18일까지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음악광장에서 열린 북 페스티벌 ‘광장서재’의 풍경. 지난 15일에는 이곳은 런웨이가 됐다. 전날 밤 아리랑국제방송 ‘아임 라이브’ 10주년 버스킹이 울려 퍼진 자리에 디자이너 지춘희의 ‘미스지 콜렉션’ 모델 30명이 나와 녹색 잔디를 걸었다.
공연장이 달라지고 있다. 정해진 시간, 티켓을 쥔 관객만이 묵언 수행하듯 무대를 바라보던 시대는 지났다. 세종문화회관은 지난 1월 3000석 객석을 비우고 관객을 무대 위로 올려 시집을 읽게 했다. 남산 자락 국립극장 해오름극장 2층 로비에선 티켓이 없는 시민도 책을 펼친다. 세 극장의 화두는 ‘문턱 낮추기’. 극장들은 지금 ‘경계’를 허물어 ‘무대와 객석’(세종문화회관), ‘공연장과 광장’(예술의전당), ‘관객과 시민’(국립극장)을 묶고 있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이러한 시도는) 이색적인 프로그램 자체가 목적이라기보다, 공연예술과 관객의 접점을 넓히고 극장에 대한 심리적 문턱을 낮추는 것에 의미가 있다”고 밝혔다. 티켓을 사지 않은 사람들도 극장에 들어와 머물게 하겠다는 것이다.
광장의 런웨이, 무대 위 서재
예술의전당의 변신은 파격적이다. 공연장을 오가는 사람들이 스쳐 지나기만 하던 분수대 앞 광장에 순수예술의 무거운 외투를 벗은 이벤트를 시작한 건 올여름부터다. 지난 8월 무선 헤드폰으로 클래식과 가요, EDM(Electronic Dance Music)을 들으며 제각기 춤추는 ‘사일런트 디스코’와 농부·요리사 85팀이 제철 먹거리를 들고나온 농부 시장 ‘마르쉐’가 열려 7000여 명이 다녀갔다. 관람 목적이 없는 시민까지 불러들이려는 기획이었다. 장한나 예술의전당 사장은 “(광장을) 일상 속 다채로운 경험의 장으로 열기 위해 시작한 새로운 시도”라고 귀띔했다.
변화는 매달 이어진다. 9월엔 40인조 서초교향악단의 연주에 맞춰 모델들이 런웨이를 걸었고, 주말 밤 계단광장은 공연 영상을 띄우는 야외 상영관 ‘계단극장’이 된다. 낮 시간 음악분수에선 K-팝이 흘러나온다. 예술의전당은 “단순한 유휴공간 활용으로 바라보지는 않는다”며 “예술의전당에 또 하나의 공연장, 전시장이 생겼다는 관점”이라고 답했다.
예술의전당이 극장 바깥을 무대로 삼았다면, 세종문화회관은 극장의 ‘안쪽’을 열었다. 올해 초 ‘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의 관객들은 대극장 무대 위 서가 앞에서 2026년 세종 시즌 27편의 음악을 듣고, 작품마다 짝지은 시집을 읽었다. 무대와 객석의 관계를 뒤집어 공연장을 ‘낯설게’ 경험하게 한 것이다.
‘리딩 & 리스닝 스테이지’는 티켓이 1시간 만에 동나 회당 50석을 80석으로 늘렸다. 세종문화회관에 따르면 지난해 ‘세종 인스피레이션’ 관객 만족도는 91.1점이었다. 지난 7월 ‘죽음과 소녀 콘서트’는 관객 120명을 대극장 계단과 로비, 평소 닫혀 있던 VIP룸으로 이끌며 서울시발레단 더블빌 ‘죽음과 소녀’를 미리 맛보게 했다. 이색 프로그램이 본공연의 예고편 역할을 하는 셈이다.
이달 15일 문을 연 야외 정원 ‘커튼 콜 가든’은 다음 달 8일까지 오후 5시~밤 11시 무료로 운영된다. 서울시 야간경제 활성화 사업의 하나로, 당일 공연 관람객에겐 식음료를 30% 할인해 준다.
세종문화회관 관계자는 “공연 전후 관객들의 체류를 유도하고 지역 상권과 연계해 광화문 일대의 야간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고자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공연을 보는 시간만이 아니라 공연장에 머무는 시간 자체를 문화 경험으로 만들겠다는 구상이다.
변화의 흐름을 가장 먼저 만든 곳은 국립극장이다. 2021년 11월 문화광장에서 시작한 장터 겸 축제 ‘아트 인 시리즈’는 올해 10월까지 57회 열려 약 15만5000명이 찾았다. 2023년 4월 해오름극장을 시민에게 전면 개방하면서는 2층 로비를 무료 독서 공간 ‘해오름 북라운지’로 꾸몄다. 공공성을 강화하는 동시에 복합문화공간으로서 국립극장의 정체성을 확장하려는 취지다.
국립극장 관계자는 “해오름 북라운지는 공연 관객의 대기 공간을 넘어 남산 등산객의 휴식 공간, 시민들의 독서 및 작업 공간으로 쓰임이 넓어졌다”고 설명했다. 지난 3월엔 국립극장 공연을 들을 수 있는 청음존도 들였다.
극장의 경쟁자는 ‘넷플릭스와 백화점’
60.2% vs 72.0%.
문화체육관광부의 ‘2025 국민문화예술활동조사’에 따르면 공연·전시·영화 등 문화예술을 현장에서 직접 본 국민은 60.2%다. 전년 조사보다 2.8%포인트 줄었다. 반면 스마트기기 등으로 보는 간접 관람률은 72.0%에 달했다. 현장보다 화면으로 예술을 만나는 사람이 더 많아진 것이다.
관람 의향은 순수예술에서 가파르게 꺾였다. 2016년과 비교해 연극은 20.1%에서 10.1%로, 무용은 3.2%에서 1.8%로 내려앉았다. 같은 기간 응답률이 오른 분야는 대중음악(23.5%→29.6%)뿐이었다. 예술의전당이 음악분수에 K-팝을 들이며 “젊은 세대를 비롯한 다양한 연령”을 겨냥한 것도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흥미로운 건 시장은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공연예술통합전산망(KOPIS)에 따르면, 올 상반기 공연 티켓 판매액은 약 8095억원으로 5년 연속 늘었다. 티켓 판매액을 끌어올린 건 비싸진 티켓과 소수 인기작이다. 티켓 한 장 평균 판매액은 7만963원으로 1년 새 1748원 올랐다. 연극은 상위 10개 작품이 장르 매출의 56.6%를 가져가 최근 5년 새 쏠림이 가장 심했다. 문화예술을 직접 보러 가는 관객의 비율은 줄어드는데, 공연 시장의 매출은 커지는 미스매치 현상이 두드러지는 셈이다. 이는 티켓 가격의 급등과 팬덤의 쏠림이 만든 기현상이다. 극장을 찾는 ‘새로운 관객’이 늘지 않는다면, 지금의 관객에만 기대 ‘나눠먹기’하는 시장이 될 수밖에 없다.
극장이 싸워야 하는 경쟁자도 달라졌다. 관객의 저녁 시간과 지갑은 한정돼 있다. 대형 뮤지컬 기준 20만원에 달하는 티켓을 구매할지 망설이는 사람에게 월 구독료 한 번에 집에서 보는 영화와 드라마는 손쉬운 대안이다. 안호상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앞서 “과거 세종문화회관의 경쟁자는 다른 극장뿐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며 “넷플릭스를 비롯한 디지털 플랫폼, 백화점이 극장의 경쟁자”라고 꾸준히 강조해 왔다.
세종문화회관이 누구보다 먼저 극장 밖으로 나간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2024년 5월엔 ‘팝업 성지’ 성수동에 공공 공연장으로는 처음 팝업스토어를 열었다. ‘세종문화회관 로고를 성수동에서 만나는 것만으로도 신선하지 않겠냐’는 판단도 있었다. 같은 해 9월엔 중고거래 플랫폼 번개장터와 손잡고 세종문화회관 곳곳 약 1316평을 플리마켓으로 내줬다. 이틀간 1만5000여 명이 찾았다.
문턱 넘은 시민, 객석까지 왔을까
공간 개방과 관객 개발은 사실 동의어는 아니다. 광장에서 책을 읽고 EDM을 들으러 온 시민이 공연장의 ‘충성 관객’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이후 공연·전시 관람으로의 연계 여부, 재방문율 등을 지속적으로 추적하는 데에는 현실적인 한계가 있다”고 했다. 다른 극장도 마찬가지다. 국립극장 역시 개방형 공간인 북라운지의 방문객 수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신 지난해 하반기부터 전속단체 청년교육단원을 ‘아트 인 시리즈’ 무대에 세워 방문객에게 국립극장 공연을 알리고 있다. ‘아트 인 시리즈’의 누적 방문객은 15만5000명에 이른다. 다만 이중 몇 명이 실제 공연 관객으로 이어졌는지는 아직 파악이 안된다. 극장들의 변신이 수익과 매출로 확장되는 것은 아닌 듯하다.
해외 공연장들은 한발 앞서 공간 자체를 바꿨다. 영국 런던 사우스뱅크센터의 로열 페스티벌 홀은 1983년 ‘오픈 포이어(Open Foyer)’ 정책을 도입해 공연 관객에게만 열던 로비를 누구에게나 열었다. 뉴욕 링컨센터 데이비드 게펜홀은 2022년 5억5000만 달러를 들여 재개관하며 객석을 2738석에서 2032석으로 줄이고, 로비를 두 배 가까이 넓혀 소파와 무료 와이파이를 갖춘 ‘거실’로 만들어 티켓 없는 시민에게 내줬다. 계절별 프로그램이 중심인 국내 공연장과는 결이 다르다. 예술의전당도 야외 공간엔 “계절과 날씨에 따른 제약”이 있다고 짚었다. ‘광장서재’의 지난 18일 운영은 비 예보로 취소됐다.
극장을 여는 데에도 비용이 든다. 독일 함부르크 엘프필하모니는 개관 이후 지난해 7월까지 2500만 명이 다녀간 무료 전망 광장 ‘플라자’를 이달 5일부터 유료(5유로)로 바꿨다. 무료 운영을 위해 해마다 360만 유로를 대 온 함부르크시가 문화 예산 압박에 방침을 틀었다. 극장 측은 방문객이 25~30% 줄 것으로 내다봤다. 열린 극장을 누구의 재원으로 지탱하고, 어떻게 관객 개발로 이을지는 국내 공연장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럼에도 국내 공연장의 시도는 계속된다. 국립극장은 지난 27일부터 해오름 북라운지 포토존에서 도서 ‘좋아서 그래’의 원화를 활용한 전시·체험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예술의전당은 이번 연말 크리스마스를 분위기를 담은 야외 행사를 기획 중이다. 국립극장은 “공연 및 문화예술 콘텐츠와 연계한 극장 공간의 다양한 활용 방안을 모색”하겠다고 했고, 세종문화회관은 이런 시도가 “단순히 색다른 행사에 그치지 않고 시민들이 문화예술을 일상에서 지속적으로 경험하는 계기”가 되길 기대했다.
결국 공연장들에 주어진 과제는 극장 문턱을 넘은 발걸음을 객석까지 잇는 일이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새로운 공간과 프로그램이 공연장과 전시장의 기능을 대체하거나 운영에 영향을 미치기보다는, 국민이 예술의전당을 친근하게 느끼고 자연스럽게 공연과 전시에 관심을 가질 수 있도록 연결하는 역할에 치중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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