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영국 정부가 모든 가정에 최소 사흘을 버틸 수 있는 식량과 생필품을 비축하라고 권고했다. 전쟁이나 사이버 공격으로 전력망과 통신망이 마비되는 상황까지 대비하라는 것이다. 러시아의 대유럽 위협이 고조되는 가운데 영국이 냉전시대 이후 보기 드문 대규모 국민 비상 대비 캠페인에 나서면서 현지에서는 생존용품 구매가 급증하고 있다.
26일 영국 가디언과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영국 정부는 지난 22일 전국 가정을 대상으로 72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비상물자를 준비하도록 하는 ‘비 레디(Be Ready)’ 캠페인을 공식 발표했다.
정부가 제시한 준비물에는 식수와 통조림뿐 아니라 현금, 손전등, 여분의 배터리, 태엽식 라디오까지 포함됐다. 대규모 정전으로 카드 결제와 인터넷, 휴대전화 등 일상적인 서비스가 중단되는 상황을 가정한 것이다.
정부는 이번 캠페인을 앞으로 3년간 이어가며 비상사태에 대한 국민의 대응 능력을 높일 계획이다.
“1인당 물 9L 준비하라”…냉전시대 핵전쟁 대비 캠페인 연상
영국 정부가 공개한 2쪽 분량의 비상 대비 지침은 각 가정이 최소 72시간 동안 외부 지원 없이 기본적인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가장 기본적인 준비물은 물과 식량이다.
식수는 1인당 하루 3L씩 사흘 동안 총 9L를 확보하도록 권고했다. 이는 마시는 물을 기준으로 한 양으로, 조리와 위생 관리에 필요한 물은 별도로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했다.
식량은 전기나 가스 공급이 중단돼도 섭취할 수 있는 통조림과 건조식품 등 상온 보관이 가능한 제품을 중심으로 구성하도록 했다.
이 밖에도 구급상자와 담요, 손전등, 보조배터리, 위생용품, 중요한 신분증과 서류의 사본 등을 준비하도록 권고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준비물은 현금과 태엽식 FM 라디오다.
전력망이나 통신망에 문제가 발생하면 신용카드와 모바일 결제가 중단될 수 있어 일정 금액의 현금을 보유하도록 한 것이다. 태엽식 라디오는 전력 공급이나 인터넷 연결 없이도 당국의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비상용품에 포함됐다.
영국 정부는 비상물자를 한꺼번에 구매하기보다 평소 장을 볼 때 조금씩 확보하라고 안내했다. 사재기를 유발하거나 가계에 과도한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취지다.
이번 캠페인은 냉전시대 영국의 핵전쟁 대비 운동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 정부는 1980년 ‘보호와 생존(Protect and Survive)’이라는 대국민 캠페인을 통해 핵공격 발생 시 가정에서 대피시설을 마련하고 식량을 비축하는 방법 등을 안내했다.
당시에는 핵전쟁 이후의 방사능 낙진을 피할 공간을 확보하고 14일분의 식량을 준비하도록 하는 내용이 포함됐다.
영국은 2024년 5월부터도 가정용 비상 대비 지침을 제공해 왔다. 이번 캠페인은 기존 안내를 확대해 전국적으로 적극적인 홍보에 나선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정부가 대규모 캠페인을 추진하는 배경에는 국민들의 낮은 비상 대응 준비 수준도 있다.
영국 정부가 발표한 올해 조사에서 가구가 비상사태에 충분히 대비돼 있다고 느낀 응답자는 13%에 그쳤다. 반면 정부가 위기 대응 방법에 대한 정보를 더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한 비율은 84%에 달했다.
정부는 프랑스와 아일랜드, 네덜란드 등 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가정용 비상 대비 체계를 운영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러시아 공격에 전력망·결제망 마비 우려…“위협은 이미 현실”
이번 캠페인은 러시아의 하이브리드전 위협이 커지는 상황에서 발표돼 주목받고 있다.
하이브리드전은 재래식 군사작전뿐 아니라 사이버 공격과 정보전, 시설 파괴 공작 등을 결합해 상대국의 안보와 사회 기능을 약화시키는 전쟁 방식이다.
웨스 스트리팅 영국 국방장관은 지난 22일 웨스트미들랜즈주 텔퍼드의 방산공장 개소 행사에서 러시아 등 적대국이 영국의 주요 기반시설을 위협하고 있다고 경고했다.
스트리팅 장관은 이러한 위협을 ‘하이브리드전’이나 ‘회색지대 위협’이라는 표현보다 ‘국가가 후원하는 테러’로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위협이 가상적인 상황이나 먼 나라의 일이 아니라 영국에서도 점차 현실화하고 있다며 국가 방위와 함께 사회 전반의 위기 대응 능력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 정부가 우려하는 공격 대상에는 전력망과 통신망, 금융 결제시스템, 물류 공급망 등이 포함된다.
발전시설이나 송전망에 문제가 발생하면 대규모 정전이 일어날 수 있고, 통신망과 결제시스템이 마비되면 은행 거래와 물품 구매 등 일상적인 경제활동에도 차질이 발생한다.
해저 통신케이블과 에너지 수송시설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도 경계 대상이다.
영국 해군은 유럽 대륙과 영국을 연결하는 해저 케이블 및 송유관 주변에서 활동하는 러시아 정보수집함을 추적해 왔다. 유사시 이러한 시설이 공격받을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다.
실제 유럽에서는 기반시설 마비로 대규모 혼란이 발생한 사례도 있다.
지난해 4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는 전력망의 전압 불안정으로 광범위한 정전이 발생했다. 약 5500만명이 영향을 받았으며 교통과 통신, 상업시설 운영 등에 차질이 빚어졌다.
영국에서도 올해 1월 폭풍 ‘고레티’로 수만 가구가 정전을 겪었다. 일부 지역에서는 전력 공급이 정상화되기까지 사흘 이상 걸렸다.
사이버 보안 위험도 커지고 있다.
최근 널리 사용되는 프로그래밍 언어 PHP의 보안 취약점이 발견되면서 영국 정부 웹사이트 32곳이 예방 차원에서 일시 중단됐다. 영국 국가사이버보안센터는 영향을 받을 수 있는 기관들에 약 5만건의 경고를 발송했다.
이 사건은 확인된 적대국의 공격 사례와는 구분되지만, 디지털 시스템의 취약성이 공공서비스 중단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줬다.
영국 정부는 러시아의 위협과 별개로 극단적인 기상현상과 자연재해에 대한 대응 능력을 높이는 것도 이번 캠페인의 주요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하루 만에 한 달 치 주문”…사재기 우려 속 정부 책임론도
영국 정부의 발표 이후 실제로 비상식량과 생존용품 구매가 늘어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영국의 비상용품 판매업체 ‘서전트 프리퍼 샵(Sgt Prepper Shop)’의 공동대표 잭 브라운은 가디언에 캠페인이 시작된 뒤 24시간 동안 평소 한 달에 해당하는 주문이 들어왔다고 밝혔다.
그는 주문이 갑자기 몰리면서 휴대전화에 문제가 생기거나 해킹당한 줄 알았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비상용품 판매업체 ‘스타트 프레핑 UK(Start Prepping UK)’의 운영자 댄 고스는 지난 8월 정부의 캠페인 추진 계획이 알려진 이후 웹사이트 방문량이 700% 증가했다고 밝혔다.
다만 현지에서는 일부 비상용품 업체의 주문이 급증했을 뿐, 식료품을 사재기하는 대규모 혼란은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전문가들은 사흘 분량의 비상물자 준비가 현실적인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영국 랭커셔대 심리학과의 사리타 로빈슨 박사는 정부가 위기 상황을 정확하게 설명하면 시민들이 적극적으로 대비할 수 있으며, 이러한 안내가 반드시 공포를 유발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했다.
정치권에서는 정부가 국민에게 비상사태 대비 책임을 떠넘기고 있다는 비판도 나왔다.
제1야당인 보수당의 케미 베이드녹 대표는 영국 정부가 물자 비축을 권고하기에 앞서 국가 기반시설과 국경, 군대의 안전을 확보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시골 주민들은 평소에도 정전이나 상점 접근의 어려움에 대비하고 있다며 정부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한 본연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앤디 버넘 영국 총리는 이 같은 비판에 반박했다.
버넘 총리는 지난 23일 BBC 라디오 인터뷰에서 예상하지 못한 사건들이 점점 빈번해지고 있다며 시민들이 기본적인 대비를 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위기 상황에서는 침착한 판단이 중요하다면서 자신은 비상용품으로 콩과 수프 통조림 등을 준비하겠다고 밝혔다.
정부는 이번 캠페인이 국민에게 위기 대응 책임을 전가하려는 조치가 아니라 긴급 구조 인력을 가장 취약한 계층에 우선 투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영국 내각부에 따르면 500개 이상의 공공기관과 기업, 자선단체 등이 캠페인 홍보에 참여하기로 했다.
정부는 앞으로 라디오와 SNS 등을 통해 비상 대비 지침을 알리고 어린 자녀가 있는 가정과 고령층 등 재난에 취약한 국민을 대상으로 홍보를 강화할 계획이다.
또 수도·전기·가스 공급업체가 비상시 우선적으로 지원해야 할 가구를 파악할 수 있도록 관련 등록제도 이용도 장려하고 있다.
영국 정부의 이번 조치는 전쟁과 사이버 공격, 기후재난이 전력과 통신에 의존하는 현대사회의 일상적인 기능까지 중단시킬 수 있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국가 기반시설에 대한 위협이 커지는 가운데 정부가 국민에게 어느 수준까지 비상 대비를 요구할 수 있는지, 위기 상황에서 국가와 개인이 각각 어떤 역할을 맡아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의도 이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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