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기(溫記): 따스함을 기록하다]

생명의전화 1기 상담원 이광자 씨

50년 가까이 자살 유족 상담·교육 헌신

“쌓인 이야기 털어놓아야 죄책감 사라져”

한국생명의전화 1기 상담원 이광자 씨를 22일 오전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났다. 임세준 기자
한국생명의전화 1기 상담원 이광자 씨를 22일 오전 서울 성북구 생명의전화종합사회복지관에서 만났다. 임세준 기자

[헤럴드경제=김도윤 기자] “아들은 더 이상 밥을 먹을 수 없는데 나는 여전히 때가 되면 배가 고프다는 사실이 괴로워요. 내가 가서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해줘야 하는데 우리 애가 전화를 안 받아요.”

김수진(가명) 씨에게 8월은 가장 잔인한 계절이다. 4년 전 여름 둘째 아들과 사별했다.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운 죽음 앞에 김씨는 아들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책망했다.

당시 20대 초반이던 둘째 아들은 게임 중독에 빠졌다. 엄마에게 계속해서 돈을 요구했다. 엄마는 아들을 더 중독의 늪으로 빠뜨리는 일이라고 여겨서 거절했다. 그러다 아들은 자살했다.

김씨는 ‘그날 돈을 주었더라면 아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어 깊은 죄책감에 시달렸다.

‘자살 예방 전문가’로 불리는 이광자(78)씨는 김씨의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일주일쯤 뒤에 이 일을 듣게 됐다. 사연을 듣자마자 김씨의 큰 아들을 떠올렸다. 연락처를 수소문해 전화했다. “딱 한 달 반 동안 어머니의 곁을 꼭 지켜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더불어 이광자씨는 김씨와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진행했다. 처음 만난 그는 ‘나도 아들을 따라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할 정도로 위태로운 상태였다.

“위기이론에 따르면 가까운 사람이 자살로 떠난 유가족은 초기 6주 동안 심리적으로 큰 고비를 겪습니다. 닥쳐오는 슬픔을 미리 알고 막을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그 슬픔을 어떻게 겪어내고 함께 나누느냐는 것이예요. 주변에 자살로 가족이나 지인을 잃은 사람이 있다면 적어도 그 시기만큼은 곁을 지켜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행히 김씨는 조금씩 마음의 건강을 회복해 나가고 있다. 한국생명의전화는 자살 유가족들을 위해 ‘새로운 희망이 움튼다’는 뜻의 ‘새움’이라는 자조 모임 공간을 운영하고 있다. 김씨 역시 이곳에서 비슷한 아픔을 겪은 유가족들과 함께 그들이 겪은 아픔을 나누며 일상을 회복해 나가고 있다.

“생명의전화입니다. 어떤 힘든 일로 전화하셨나요?”

이광자 씨는 생명의전화가 탄생한 그해에 1기 상담원으로 합류했다. 이화여대에서 정신간호학을 가르치던 때였다. 고등학교 시절 절친했던 친구의 자살 시도의 기억이 그를 생명의전화로 이끌었다. 누구보다 밝았던 친구가 어느 날 새벽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친구의 집에서 밤새 시험공부를 하기로 했다가 졸음을 이기지 못해 집으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이었다.

나중에서야 친구가 가족 관계로 힘들어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가장 가까운 친구의 아픔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피어났다. 그러면서 누군가의 사연을 그저 들어주기만 해도 생명을 구할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리에 자리잡았다. 그가 정신간호학을 전공하고 생명 상담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다.

1976년 9월 한국에서 최초로 등장한 전화상담 사회복지법인인 ‘생명의전화’(1588-9191)는 잘 들어주기만 해도 자살을 막을 수 있단 믿음으로 시작됐다. 2평(6.6㎡) 남짓한 작은 방에서 책상과 전화기 한 대로 시작한 일이, 50년 이어지면서 400만건의 ‘위기 전화’를 받았다. 지금은 약 230명의 자원봉사 상담원이 교대로 24시간 상담전화를 지킨다. 청소년들을 위해 소셜미디어(SNS) 채널을 활용한 상담도 운영한다. 보건복지부가 운영하는 자살예방상담전화 109와 함께 연계 상담체계도 갖췄다.

“애도한다는 것은 충분히 울고, 떠난 사람과의 추억을 되새기며 마음속에 쌓인 이야기를 꺼내놓는 일이에요. 그 이야기를 털어놓을 곳도, 들어줄 사람도 없다면 슬픔을 계속 안고 살아가게 돼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섣부른 위로나 충고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조금씩 받아들이고 무거운 죄책감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는 일이죠.”

그는 생명의전화 전화상담 봉사를 하면서 37년간 이화여대에서 교편을 잡았고 2013년 퇴임했다. 지금은 생명의전화 교육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상담원 양성 사업을 책임진다. 자살 유가족·교정시설 수용자 등을 위한 상담 활동도 여전히 하고 있다.

한국생명의전화 1기 상담원 이광자 씨. 임세준 기자
한국생명의전화 1기 상담원 이광자 씨. 임세준 기자

한국에서 자살은 여전히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국가데이터처에 따르면 2011년 31.7명이던 자살률(인구 10만명당 자살자 수)은 이후 20명대로 줄었지만 여전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가장 많다. 지난해 국내 자살 사망자는 1만4144명으로, 하루 평균 38.8명이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여전히 생명의전화와 같은 상담의 역할이 필요하다.

이씨는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에도 실은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고 강조했다.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이 시소처럼 오갈 때 그 마음을 붙잡아 주는 것은 결국 누군가의 작은 관심과 대화라고 했다. 이씨는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은 절대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거듭 강조했다.

“죽고 싶은 마음이 51%라면 살고 싶은 마음도 49%는 남아 있어요. 누군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이야기를 충분히 들어준다면 그 비율이 뒤바뀔 수 있습니다. 그 작은 2%의 차이가 다시 살아갈 힘이 되는 거죠. ‘잘 잤어?’, ‘밥은 먹었어?’, ‘일은 할 만해?’ 같은 일상의 짧은 안부와 관심이 자살로 인한 죽음을 막는 첫걸음이 될 수 있습니다.” 인터뷰 마지막 그가 건넨 조언은 삶의 끝에서 힘겨워하는 또 다른 누군가의 새 삶의 자양분이 되고 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 · 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 또는 SNS상담 마들랜(마음을 들어주는 랜선친구)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