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주년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
하와이 이주 이후 120여년 42개 이야기로 구성
백남준·박서보·이강소·김윤신 등 60여명 참여
[헤럴드경제=김현경 기자] 50년의 세월을 화려한 연대기적 기념비로 포장하는 대신 시계를 ‘0’으로 돌려세운 미술관이 있다. 국내 최초의 사립 현대미술관인 토탈미술관이다.
1976년 동숭동의 갤러리에서 출발해 장흥의 야외조각공원 형태의 미술관을 거쳐 평창동에 자리잡기까지, 한국 현대 미술의 다양한 실험과 함께해 온 토탈미술관이 개관 50주년을 마주하는 태도는 차분하고 결연하다.
토탈미술관이 내년 2월 28일까지 개최하는 개관 50주년 특별전 ‘한국미술 0년: 42개의 이야기’는 지나온 성과를 정리하는 회고전이 아니다. 오히려 한국 미술을 설명해 온 익숙한 질서에서 벗어나, 예술이 시대의 변화와 어떻게 관계 맺어 왔는지를 근본에서부터 다시 묻는다.
이영철 큐레이터가 기획한 이번 전시에는 백남준, 박서보, 이강소, 이승택, 김구림, 이건용, 곽인식, 차학경, 박이소, 김범, 성능경, 김윤신 등 6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한다. 미술관을 8개 영역으로 나눠 42개의 이야기로 채웠다.
전시 제목의 ‘0년’은 백지 상태나 역사의 부정을 뜻하지 않는다. 완결된 역사를 박제하는 대신, 다음 50년을 향해 도약하기 위한 가능성의 ‘그라운드 제로’다.
이러한 전시의 문제의식은 곽덕준 작가의 저울 작업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묵직한 돌덩이가 저울을 짓누르고 있지만 바늘은 꿈쩍도 하지 않고 ‘0’을 가리키고 있다. 돌의 무게가 사라진 것인지, 무게를 측정하는 시스템 자체가 고장 난 것인지 혼란을 일으키는 이 역설적 장면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해 온 기존의 척도에 의문을 제기한다.
미술관 정원에서는 홍명섭이 스테인리스 선과 다채로운 색의 줄을 이용해 허공을 가로지르는 공간 드로잉으로 감각을 일깨우고, 그 곁에서 김구림은 일상적 재료로 만든 비닐 오브제와 함께 ‘Art냐, Mart냐, Arty냐(예술이냐, 시장이냐, 예술가인 체 하는 것이냐)’라는 날 선 질문을 던지며 예술과 시장의 경계를 도마 위에 올린다. 전시의 마침표를 찍는 김범의 작품 ‘노란 비명’은 50주년을 상징하는 황금빛 기념비 대신, 색채와 붓질 사이로 터져 나오는 비명을 통해 상실과 재생의 감각을 드러낸다.
이번 전시는 1903년 하와이 이주에서 2026년 현재까지 120여 년의 시간을 시야에 둔다. 하지만 이 오랜 시간을 연대기로 나열하지 않는다. 이주와 디아스포라를 비롯해 전쟁과 분단, 산업화와 도시, 민주화와 사회 운동, 기술의 변화 역시 특정한 시대에만 속한 문제가 아니라 서로 다른 모습으로 오늘의 삶과 예술 안에서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전시는 작품들을 42개의 ‘스토어프런트(Storefront)’로 재구성한다. 이질적인 작품들이 만날 때 발생하는 질문과 긴장에 주목한 구성으로, 관객은 정해진 순서나 해석을 따르기보다 각각의 이야기 사이를 이동하며 자신만의 연결을 발견하게 된다.
‘42’라는 숫자는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가져왔다. 소설에서 슈퍼컴퓨터가 우주의 궁극적 해답으로 내놓은 숫자가 ‘42’였으나, 정작 그에 해당하는 질문이 무엇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이번 전시 역시 한국 미술에 대한 하나의 정답을 제시하기보다, 무엇을 다시 질문해야 하는가에 주목한다.
이도영의 시사만화부터 곽인식, 그리고 동시대 3040 작가들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른 시대의 작품과 파편들이 42개의 상점 창문처럼 교차 배치되어, 관객 스스로가 예상치 못한 관계를 맺고 새로운 질문을 길어 올리도록 유도한다.
지난 120여 년간 한국 사회는 식민지, 전쟁, 분단, 이주, 산업화 등 격동을 겪어 왔다. 전시는 이러한 난세에서 예술가들이 현실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응해 왔는지를 ‘애도’의 실천으로 읽어낸다.
여기서 애도는 개인적 슬픔에 국한되지 않는다. 사라져가는 것을 기억하고, 시대의 상처와 대면하며, 그 위에서 다시 시작할 가능성을 발견하는 적극적 태도이다.
토탈미술관의 ‘0년’은 종착점이 아니라, 아직 오지 않은 이야기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 전시는 무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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