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진, 베를린필과 대타로 인연 시작
번스타인도 발터 대신 무대 서 주목받아
대타, 신예 발탁보다 가능성 확인 기회
부담도 공존…극도의 긴장감·위험 감수
실력·명성·섭외 네트워크 갖춰야 기회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2022년 2월, 미국 뉴욕 카네기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 지휘자 발레리 게르기예프와 피아니스트 데니스 마추예프가 전격 하차하며 빈 필하모닉 무대에 예기치 못한 위기가 닥쳤다. 공연은 몇 시간 남지 않았는데, 지휘자와 협연자 모두 공석이 된 것이었다.
이 같은 긴박한 상황에 급파된 구원투수는 대체 지휘자 야닉 네제 세겡과 피아니스트 조성진. 공연 전날 연락을 받은 조성진은 호텔 로비에서 밤늦게까지 연습한 후 아침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무대에서 연주할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은 그가 2019년 이후 무대에서 연주한 적이 없는 곡이었다. 샌드위치 하나로 버틴 그에게 주어진 리허설 시간은 턱없이 짧았다. 그럼에도 조성진은 악보 없이 연주를 마쳤다.
클래식 음악계에서 누군가의 부재는 누군가의 기회다. 하지만 이른바 ‘점프인(Jump-in)’으로 불리는 긴급 대체 출연은 세계적인 연주자에게도 피를 말리는 도전이다. 조성진의 극적인 서사가 보여주는 것은 사실 초인적인 준비 과정과 천재적 음악성만은 아니다.
위기의 순간, 과연 누가 어떤 경로를 거쳐 호명될까. 이미 궤도에 오른 연주자에게 대타는 또 다른 도약의 발판일 수 있지만, 무대를 지켜야 하는 기획자에게는 공연 취소에 따른 손실을 줄이기 위한 현실적인 안전판이다.
국내 한 음악계 관계자는 “대체 연주자를 찾아야 하는 상황은 늘 긴급하게 다가온다”며 “아티스트의 일정과 명성, 관객의 기대치, 취소 표 발생 여부 등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장의 빈자리는 어떻게 기회가 될까
2015년 쇼팽 콩쿠르 최초의 한국인 우승자로 클래식 음악계의 스타가 된 조성진에게는 또 다른 결정적인 대타 이력이 있다. 2017년 베를린 필하모닉의 아시아 투어다. 당초 협연 예정이던 랑랑이 왼팔 건염으로 무대에 설 수 없게 되자, 당시 23세였던 조성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조성진의 베를린 필하모닉 데뷔 무대였다.
이날의 섭외 과정은 긴급 대체 출연이 단순한 일정 대체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성진이 이 무대에 설 수 있었던 배경에는 거장의 추천이 있었다.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이자 피아니스트 크리스티안 지메르만이 지휘자 사이먼 래틀에게 조성진을 추천한 것이다.
실제로 한 국내 오케스트라 관계자는 “대체 연주자를 찾아야 할 때는 악단과 지휘자, 음악감독의 네트워크가 총동원된다”며 “특히 음악감독의 인맥과 신뢰가 작동한다”고 귀띔했다.
쇼팽 콩쿠르 우승으로 이미 국제적 신뢰를 쌓은 상태였기에 조성진의 무대는 무명 연주자를 발굴한 사례는 아니었다. 오히려 축적된 실력과 평판이 긴급한 상황에서 실제 무대로 연결된, 모범(?) 사례라 할 만하다.
베를린필과의 만남은 해프닝으로만 끝나지 않았다. 조성진은 베를린필과 2020년 온라인 공연, 2023년 서울 공연 등 굵직한 협업을 함께 했다. 2017년의 대타 사건 덕분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긴박한 상황에서 연주자의 진가를 확인한 무대가 이후 관계를 쌓는 계기가 됐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심지어 조성진은 2024~2025 시즌 베를린필의 상주 음악가로도 활동했다. 악단 단원들과의 관계도 이어져, 지난여름에는 베를린필 단원들과 함께 실내악 무대를 꾸렸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관객들이 만족할 만한 대체 연주자를 찾지 못하면 대규모 취소 사태가 빚어질 수 있다”며 “흥행 실패를 막는 티켓 파워와 같은 방어력이 대체 연주자를 찾는 강력한 동인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대타가 연주자의 경력을 크게 바꿔놓은 사례는 역사 속에 숱하다. 1943년 카네기홀에서는 훗날 20세기 미국 음악계를 상징하는 인물이 될 25세의 레너드 번스타인이 무대에 올랐다. 몸이 좋지 않았던 브루노 발터를 대신해 뉴욕 필하모닉을 지휘한 이날의 공연은 라디오로 미국 전역에 중계됐다. 이튿날 뉴욕타임스는 번스타인의 지휘를 주요하게 다뤘다. 번스타인은 이 공연을 계기로 주목받았고, 1958년부터 1969년까지 뉴욕 필하모닉 음악감독을 맡았다.
이 극적인 서사는 무명 청년의 우연한 벼락출세 신화가 아니었다. 번스타인은 이미 뉴욕 필하모닉의 부지휘자로서 오케스트라의 생리를 꿰뚫고 있는 내부자였다. 긴급한 무대는 텅 빈 들판에 번개가 내리친 게 아니었다. 치밀하게 준비해 온 역량에 불이 붙은 순간이었다.
1999년의 랑랑 역시 그렇다. 당시 17세였던 그는 라비니아 페스티벌에서 앙드레 와츠를 대신해 크리스토프 에셴바흐가 지휘하는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차이콥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연주했다. 2007년에는 20세의 유자 왕이 마르타 아르헤리치의 대타로 샤를 뒤투아가 이끄는 보스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무대에 섰다.
두 피아니스트 모두 이제 막 등장한 신예는 아니었다. 묵묵히 훈련과 무대 경험을 쌓아온 이들에게 대타는 그동안 축적한 역량을 강렬하게 드러낼 기회였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대체 연주자로 무대에 설 기회는 이미 쌓아온 커리어에 대중적 인지도를 더해주기도 하고, 국제 활동을 위한 러브콜이 늘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대타가 장기적인 예술적 파트너십으로 이어진 사례도 있다. 스코틀랜드 체임버 오케스트라는 2018년 로빈 티치아티를 대신해 지휘한 막심 에멜랴니체프를 2019~2020 시즌 수석지휘자로 발탁했다. 이후 투어와 음반 작업을 함께하며 협업은 이어졌고, 계약은 2031년까지 연장됐다.
에사 페카 살로넨 역시 1983년 마이클 틸슨 토마스를 대신해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말러 교향곡 3번을 지휘하며 국제적 도약의 계기를 마련했다. 이후 2008년부터 2021년까지 이 악단의 수석 지휘자 겸 예술 고문을 맡았다. 다만 지휘를 시작한 것은 1979년으로, 런던 무대 이전에도 이미 지휘자로서 경력을 쌓고 있었다. 대타는 경력의 출발점이라기보다 국제적 도약의 계기였다.
위기 상황에서의 한 차례 만남이 곧바로 장기 계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타 무대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낯선 지휘자의 실전 대처 능력과 리더십을 직접 경험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가능성을 확인하는 자리이자, 이후의 협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 첫 만남인 셈이다.
무대에 오르는 순간, 감당해야 하는 것들
스포트라이트가 늘 화려한 성공담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포르투갈 피아니스트 마리아 주앙 피르스가 1999년 암스테르담 콘세르트헤바우에서 겪은 일화는 대타가 짊어져야 하는 부담을 보여준다.
피르스는 파리에 머물던 중 밤늦게 연락을 받고 이튿날 공연에 대체 출연하게 됐다. 자신이 연주할 곡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 K.488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무대에 오르자 오케스트라가 예상과 다른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0번 K.466이었다. 약 2000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공개 리허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피르스가 이 곡을 마지막으로 연주한 것은 약 10~11개월 전이었다. 지휘자 리카르도 샤이는 연주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독려했고, 음악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날의 연주를 천재적 피아니스트의 초인적 훈련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악보를 기억하는 능력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듣고 상황을 파악하며, 예상과 다른 상황에서도 연주를 이어갈 판단력이 요구되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대타는 돌발 상황에서 음악가가 감당해야 하는 역량을 시험하는 무대가 될 수 있다.
2022년 12월, 서울시립교향악단에서는 음악감독 오스모 벤스케의 낙상 사고 직후 또 다른 긴급 대타가 이뤄졌다. 벤스케가 골절상으로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을 지휘할 수 없게 되자 지휘자 김선욱이 그 자리에 섰다.
공연을 일주일가량 앞둔 그해 12월 7일. 김선욱은 독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던 중 서울시향의 연락을 받았다. 고심 끝에 제안을 수락한 그는 베토벤 9번을 지휘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고 밝혔다. 공항에서 발길을 돌린 뒤 남은 시간은 길지 않았다. 김선욱은 나흘 동안 악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며 무대를 준비했다.
이미 지휘 경험을 쌓아가던 그였지만, 갑작스러운 제안은 준비해 온 경력에 새로운 무대를 더했다. 이후 그는 2024년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예술감독 겸 상임지휘자로 취임했다. 다만 이 임명을 서울시향 대타 공연의 직접적인 결과로 단정할 수는 없다.
대타는 영광과 부담이 공존하는 시험대다. 예정된 공연보다 준비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연주자는 수면 부족과 극도의 긴장감을 견디며 무대의 완성도를 책임져야 한다.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는 “예정된 공연보다 준비 시간이 부족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대체 연주자는 감당해야 한다”며 “잘해도 본전이라는 부담을 안고 서는 무대”라고 말했다.
대타의 기회, 누구에게나 열려있지 않다
그렇다고 모두에게 유명 오케스트라의 대타 기회가 주어지는건 아니다. 긴급 상황에서 무대 기획자가 가장 먼저 연락하는 연주자는 누구일까. 한 공연기획사 관계자는 “대체 연주자를 찾기 위해서는 여러 관계자의 인맥이 총동원된다”며 “매니지먼트 네트워크 안에 있고, 낯선 환경에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실력과 흥행력을 기대할 수 있는 연주자가 후보에 오르게 된다”고 말했다.
지난 2025년 11월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건강 문제로 하차한 예브게니 키신을 대신해 안드레이 보레이코가 지휘한 무대에 선 주인공은 바로 피아니스트 율리우스 아살이었다. 그날 무대가 그에게 볼로냐 데뷔이긴 했지만, 그는 이미 도이치 그라모폰과 음반 활동을 하고 BBC 뉴 제너레이션 아티스트로도 선정된 유명 연주자였다.
명성뿐 아니라 정해진 곡을 얼마나 잘 소화할 수 있는지도 중요하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이라면 해당 레퍼토리에 익숙한 연주자나 관련 경험이 풍부한 음악가가 후보에 오를 수 있다. 그러나 촉박한 일정에서는 대체 연주자의 기존 공연 일정과 이동 가능성도 조율 대상이다. 예산 역시 고려해야 할 조건이다. 대체 연주자를 찾더라도 곡목을 조정해야 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음악계의 설명이다.
실력이 출중하더라도 음악계의 섭외 네트워크 바깥에 있는 연주자에게 ‘거장의 빈자리’는 쉽게 허락되지 않는다. 긴급한 상황일수록 역량과 일정, 신뢰를 확인할 수 있는 연주자가 우선적으로 검토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대타가 인재 발굴의 통로가 될 수 있지만, 그 기회가 모든 연주자에게 동등하게 열려 있다고 보기는 어려운 이유다.
대타 공연은 연주자뿐 아니라 오케스트라와 기획사에도 위험 부담이 크다. 이미 티켓이 판매된 상황에서 출연자나 프로그램이 바뀌면 관객의 기대와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다. 기획사 측은 변경 내용을 안내하고, 적용되는 기준에 따라 환불 절차를 마련해야 한다. 앞서 조성진으로 협연자가 바뀐 베를린 필하모닉의 홍콩 공연에서도 관객에게 환불 선택권이 안내됐다.
국내에서도 중요한 출연자 교체 등 공연 내용이 당초 계약과 달라진 경우 소비자분쟁해결기준에 따라 입장료 환급 및 입장료의 10%를 배상해야 한다. 다만 실제 적용은 변경 내용과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기획사 입장에선 환불 위험을 줄이기 위해 관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대체 연주자를 찾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기존 출연자와 비슷하거나 더 높은 인지도를 지닌 연주자가 검토될 수 있다. 실제로 2024년 5월 서울시립교향악단과 손열음의 협연 무대는 리허설 중 출연자가 바뀌었는데, 바로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힐러리 한이 대신 왔다. 얍 판 츠베덴 음악감독의 인맥 덕에 손열음의 빈자리를 힐러리 한이 채울 수 있었던 것. 피아노 협연이 예정됐던 무대에 바이올리니스트가 대신 나선 것도 이례적이다.
이렇듯 대체 연주자를 찾아 무대에 세우는 과정은 단순히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는 일이 아니다. 관객의 기대와 환불 가능성, 기획사와 악단의 신뢰, 연주자의 일정과 역량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위기관리의 과정이다.
조성진과 세계 정상급 오케스트라의 만남은 대타가 일회성 출연으로 끝나지 않고 이후의 협업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2022년 카네기홀에서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 조성진은 2024년 서울 공연에서도 이 악단과 호흡을 맞췄고, 오는 25일 다시 빈 필하모닉과 협연한다. 한 번의 긴급 섭외가 이후의 모든 협업을 만들어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대타가 새로운 관계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한 음악계 관계자는 “대체 연주자를 찾아 무대에 세우는 과정은 관객의 마음을 돌리고 소비자 보호 기준을 살피는 한편, 기획사와 악단의 신뢰까지 고려해야 하는 위기관리의 과정”이라며 “단순히 빈자리를 메우는 일이 아니라 복잡하고 신중한 판단을 거쳐 이뤄진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