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송라이터 윤항기의 음악인생이 65주년을 맞았다. 아니 67년이다. 2년 전에 최백호, 조항조, 유현상이 모여 윤항기 선배의 65년 헌정공연을 열자는 의견을 내놨고, 차일피일 미루다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아예 3년 후 70주년 공연을 열자고 하자, 그 나이는 장담할 수 없다며 이번에 열게 된 것이다.
윤항기의 음악 인생 65주년을 기념하는 헌정 공연 ‘여러분 덕분에 나는 행복합니다’는 오는 10월 24일 서울 마포아트센터 아트홀맥에서 개최된다. 최근 헌정공연을 앞두고 가진 기자회견에서 윤항기는 과거 음악에 대해 많은 얘기를 털어놨다.
윤항기와 비슷한 시기에 신중현의 록밴드 ‘에드포’ 등이 활약했지만, 윤항기의 음악 인생을 살펴보면, 1960, 70년대의 대중음악의 역사와 뿌리, 토양뿐만 아니라 글로벌화된 K-팝의 초창기 지형도를 그려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윤항기는 1942년생 84세, 비틀즈 멤버 폴 매카트니와 동갑이다. 1959년 12월 로큰롤 가수로 데뷔한 그는 기타리스트이자 작곡가, 프로듀서인 김희갑으로부터 미8군 에이원쇼에서 연습생으로 음악을 시작했다. 데뷔무대는 미8군 일반인 클럽이다.
그래서인지 윤항기도 스승인 김희갑처럼 대중음악에 관한 한 만능 엔터테이너다. 작사, 작곡, 보컬리스트, 세션(드러머), 뮤지컬 기획 등을 두루 맡았다. 윤항기는 음악을 시작하면서 팝을 불렀다. 1956년에 발표된 미국의 전설적인 록앤롤 음악 ‘비밥어룰라’를 많이 불렀다고 했다.
윤항기는 음악의 기초를 알려준다는 말에 해병대 군악대에 자원입대했다. “군악대는 내가 배우지 못한 걸 가질 수 있었다. 화성악, 대위법 등을 다 가르쳐준다고 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남들이 군대 안가려고 할 때 나는 자원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한국 최초의 록밴드 ‘키보이스’ 결성
윤항기는 제대 후인 1963년에는 한국 최초의 록밴드 ‘키보이스’(Key Boys)를 결성해 드러머와 보컬로 활동하며 1960, 70년대 한국 록밴드 전성기의 씨를 뿌렸다. 멤버는 차중락(보컬), 차도균(베이스), 윤항기(드럼), 김홍탁(기타), 옥성빈(키보드)으로 구성되었고, 1964년 독집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발표했다.
“비틀즈 노래로 데뷔했지만(초기는 번안가요가 많았다) 가요를 해야 일반인에게 의미가 있었다. 그래서 김영광 작곡의 ‘정든 배’ 등이 있는 앨범 ‘그녀 입술은 달콤해’를 1964년 7월에 발표했다.”
윤항기는 한국 대중음악이 워낙 열악한 상태에서 음악을 시작하다보니 할 말이 많은 듯했다.
“60년대초만 해도 그룹사운드는 없었다. 아리랑 브라더스, 봉봉4중창단, 블루벨즈 등 남성 사중창단은 있었는데, 악기 다루는 그룹은 없었다. 통기타 하나로 미국 컨트리 음악을 부르는 중창단을 보고 연습을 시작했지만, 너무 단조로웠다. 고민하고 있을 때 남자 4명과 여자 1명으로 구성된 필리핀 그룹 ‘선스팟’의 내한공연을 서울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봤다. 악기를 다루고 노래하며, 코미디까지 보여주었다. 이거다 생각했다. 비틀즈의 본격 활동 전이었다. 악기를 다루며 연습을 했다. 레이 찰스의 기념비적인 히트곡 ‘What’d I Say’(왓 아이 세이)도 익혔다.”
밴드를 만드는 과정은 그야말로 척박하고 조악한 상태였다.
“드럼을 살 돈이 없어서 청계천 고물상에서 벤조를 달고, 심벌즈 대신 바라를 사서 세숫대 받침대에 용접해 붙였다. 그게 키보이스 첫 드럼이었다. 차도균의 베이스도 자기 사촌이 쓰고있던 첼로를 개조한 것이었다. 김홍탁의 기타가 들어오고, 차중락이 마지막으로 합류했다. 여가수 송영란 씨와 함께 미8군쇼에서 ‘락 앤 키’(여자와 남자라는 의미)라는 이름으로 패키지쇼를 펼쳐 더블 플러스 평가를 받았다. 키보이스 태동기는 비틀즈의 미국 제패 등과 함께 밴드뮤직 인기라는 운도 따랐다.”
윤항기는 이 대목에서 감정이 휘몰아치는 듯 했다. 자신에게 음악이 무엇이었냐고 묻자 “삶”이라고 말했다.
“어려서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동생(윤복희)과 함께 살아본 적이 거의 없다. 가슴 아픈 시절이다. 학업을 포기하고 미8군에 들어가 잡일도 맡아야 하는 ‘헬퍼’를 했다. 부모님을 원망하기에 앞서 우리에게 물러주신 재능, 유전자가 있었다.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도 없는데, 동생과 음악을 잘했다. 좋아서 한 게 아니라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돌아보니 그게 제 삶이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후 30년 가까이 성직자로 살아왔는데, 여기서도 음악목사였다. 음악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게 저의 삶이다.”
키보이스는 1960년대에는 부평 미군부대인 ‘애스컴’ 클럽 무대에도 자주 섰다. 한국 방송과 행사보다 매출이 훨씬 많이 나오는 무대가 미8군이었다. 이들은 미군들 앞에서 비틀즈와 비치보이스의 노래를 불렀다. 윤항기는 레이 찰스와 루이 암스트롱의 모창도 해 인기를 얻기도 했다.
미8군에서 반응이 좋아 미국 라스베이거스까지 진출한 김시스터즈가 자주 불렀던 노래 중 하나가 ‘찰리 브라운’인 것과 유사하다. 키보이스 결성 시기는 비틀즈의 활동시기와 겹친다. 1962년 리버풀에서 데뷔한 비틀즈는 영국을 떠나 독일의 항구도시 함부르크에서 공연하고 있었다. 지금도 함부르크에는 ‘비틀즈 광장’이 있다. 이후 1964년 2월 7일 비틀즈는 뉴욕 JFK 공항에 착륙, 구름처럼 몰려든 팬들을 발견했다. 이를 ‘브리티시 인베이전(영국의 침공)’이라 부르며, 대중음악사의 큰 현상으로 지칭하고 있다.
당시 미국은 솔로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가장 큰 인기를 구가하고 있었고, 로큰롤 밴드음악은 비틀즈가 완전히 접수해버렸다. 빌보드 차트 줄세우기의 원조는 비틀즈였다. 이는 미국의 로큰롤이 영국으로 건너가 새롭게 해석돼, 다시 미국에서 인기를 얻은 ‘문화역수출’ 현상을 야기시켰다. 실제로 비틀즈는 미국에서 활동하며 미국음악의 겉모양만 익힌 게 아니라, 밥 딜런을 만나 문학적인 가사에 관심을 가지며 팝을 좀 더 심오한 가사로 만들어 자신들의 화음에 실었다. 그렇게 해서 사랑 타령 위주의 ‘비주얼 밴드 아이돌’에 머무르지 않고, 세상에 이야기를 던지는 ‘아티스트’로 성장할 수 있었다.
윤항기는 키보이스가 당시 비틀즈의 활동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고 했다. 북미뿐만 아니라 세계 대중음악의 양상을 바꿔놓은 비틀즈는 로큰롤, 팝, 록, 포크 록, 사이키델릭 록, 하드 록, 아트 록까지 다양한 장르를 구사했다. 윤항기는 키보이스가 당시 비틀즈의 영향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오히려 비치보이스로부터도 힌트를 많이 얻었다고 했다.
미국의 록밴드인 비치보이스는 1961년 데뷔해 팝, 록, 서프 록, 바로크 팝, 사이키델릭 록, 사이키델릭 팝 장르를 두루 구사했으며, 우리에게는 1963년 발매된 로큰롤 ‘Surfin’ U.S.A(서핀 유에스에이)’와 ‘Fun, Fun, Fun’(펀,펀,펀)으로 잘 알려져있다. 1960년대 미국 서부 해안을 연상시키면서 전세계 청춘들에게는 무한한 청량감과 해방감을 안겨준 바 있다. “열심히 일한 자, 떠나라”라는 카피라이트의 원조는 비치보이스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Surfin’ U.S.A’는 흑인뮤지션 척 베리의 ‘스윗 리틀 식스틴(Sweet Little Sixteen, 1958)’의 표절곡으로, 척 베리가 고소를 해 1966년부터 저작권을 넘겨받았다.
질주감 있는 로큰롤을 구사하는 가수이자 기타리스트, 작곡가인 척 베리는 로큰롤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뮤지션이다. 존 레논은 “만약 로큰롤을 다른 이름으로 바꿔야 한다면 ‘척 베리’라고 바꿔야 한다”고 말했을 정도이며, 밥 딜런은 “척 베리는 로큰롤의 셰익스피어”라고까지 했다. 기타를 치며 한쪽 다리를 들고 오리걸음으로 걷는 퍼포먼스도 척 베리가 원조다. 척 베리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지만, 전성기에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사건으로 18개월간 복역한 전력 때문에 크게 빛이 바랬다.
키보이스는 초기에는 청량하고 경쾌한 서프 록(Surf Rock)과 로큰롤 사운드를 구사하며 번안곡 중심으로 활동하다, 한국형 소울과 사이키델릭록으로까지 범위를 넓히더니, 결국 우리 정서인 트로트와 접목한 트로트록으로 마무리된다.
이 때의 키보이스 대표곡은 ‘해변으로 가요’와 ‘바닷가의 추억’, ‘정든 배’다. 제목에서부터 ‘해변’과 ‘바닷가’가 포함돼 ‘여름’과 ‘바다’의 낭만적이고 시원한 정서를 표출한 것은 비치보이스에게 영향을 받은 것이다. 트로트 가락과의 접목은 생산자인 한국 뮤지션과 소비자인 한국 대중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생성된 것이라 봐야한다. 이 움직임은 키보이스의 음반 디렉터를 맡았고, 1964년 ‘정든 배’를 작곡한 작곡가이자 기타연주자인 김영광이 주도했다.
유람선을 타고 선상에서 뮤직비디오까지 찍은 이 노래에서는 윤항기가 키보드를 치며 노래를 부른다. 록과 트로트의 만남인 ‘정든 배’는 나훈아도 불렀다.
번안곡을 부르다 초기 ‘싱어송라이터’ 모델 확립
윤항기는 ‘키보이스’를 떠나 월남전 위문 공연을 가면서 ‘윤항기와 키브라더스’가 만들어졌다. 여기서는 싱어송라이터로 활약했다. 외국 밴드의 연주곡이나 번안곡에서 벗어나 직접 곡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됐다. 윤항기는 방송사나 신문사가 주최하는 음악경연대회때마다 자신이 만든 신곡을 출품하곤 했다.
1969년 ‘별이 빛나는 밤에’를 발표했고, 이어 ‘나는 어떡하라고’(1973)와 ‘노래하는 곳에’(1974), ‘장밋빛 스카프’(1975)를 발표했다. ‘별이 빛나는 밤에’는 펄 시스터즈 버전도 있다.
‘노래하는 곳에’는 1973년 미국의 ‘페리 코모(Perry Como)가 부른 ‘I Believe in Music’(아이 빌리브 인 뮤직)을 번안한 히트곡이다. 최근에는 가수 손태진이 맑고 경쾌하며 고급스러운 스타일로 리메이크해 현대적인 사운드와 어우러져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윤항기는 엄진 작곡가가 만든 스윙 템포의 경쾌한 노래 ‘이거야 정말’(1975)도 크게 히트시켜 솔로로서도 성공했다.
‘나는 어떡하라고’와 ‘장밋빛 스카프’는 록에 포크, 발라드, 트로트 등이 접목됐다. 윤항기의 호소력 깊은 보컬과 잘 어울리는 ‘장밋빛 스카프’의 가사는 윤항기의 실제 경험담이다.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어디선가 웃으면서 와줄 것만 같은데/차라리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들/이 고통 이 괴로움 나에겐 없을 걸/장미빛 장미빛 스카프만 보면은/내 눈은 빛나네 걸음이 멈춰지네’
떠나간 연인에 대한 그리움과 허전함을 장밋빛 스카프를 보며 달래는 이 노래는 보컬리스트의 실제 경험담이라 더욱 많은 공감을 얻었으며, 윤항기로 하여금 솔로가수의 입지를 확고히 다져주는 역할을 했다. 1979년 윤항기가 작사·작곡하고 동생 윤복희가 부른 ‘여러분’은 지금도 애창되는 국민송이다. ‘여러분’은 팝발라드에 가스펠 느낌이 난다. 윤항기가 동생 윤복희의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기 위해 쓴 곡이기도 하다. ‘여러분’은 발표된 지 30여년 후인 2011년 임재범이 MBC ‘나는 가수다’에서 불러 또 한번 크게 히트했다. CGN이 제작하는 K-CCM(Contemporary Christian Music, 현대 기독교 음악) 글로벌 오디션 프로그램인 ‘힐링보이스’에서도 불려졌다. 윤복희가 부른 원곡이 시원한 열창이 돋보였다면, 임재범의 리메이크는 상처받은 남자가 거칠고 허스키한 음색으로 위로받고 싶은 간절함을 극대화한 게 호소력을 높였다.
대한민국 팝발라드의 원조격
윤항기는 이밖에도 ‘내가 왜 이럴까’, ‘나는 행복합니다’, ‘다 그런 거지 뭐’, ‘친구야’, ‘이거야 정말’, ‘나를 두고 아리랑’ 등도 히트시켰다.
1976년 발표한 ‘친구야’는 우정과 위로를 담아냈다. 1980년 발표한 ‘나는 행복합니다’는 당시 우울한 사회분위기 속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주는 노래로 소비됐다. 하지만 그는 1986년 음악을 중단하고 목회자의 길을 걷기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윤항기가 만든 노래들은 서구적인 록과 팝에 한국적 서정성을 접목하면서 점점 정체성을 강화해나갔다. 장르적으로는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면서도 트로트와 세미발라드를 가미했고, 내용적으로는 시대와 사람들을 위로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이로써 윤항기의 음악들은 한국형 팝발라드의 원형을 제시했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윤항기 65주년 기념 헌정 공연 ‘여러분 덕분에 나는 행복합니다’에는 65년 동안 윤항기의 음악을 사랑해 준 팬들과 대중에게 전하는 감사와 고백을 담았다.
윤항기는 “뒤돌아보면 힘들고 어렵고 슬프고 후회스럽고 아픈 추억들이 많다. 그러나 오히려 그게 큰 행복이다. 그런 과정이 있었기에 이런 귀한 선물을 받게됐다. 85년 살아온 인생, 황혼의 들녘에서 여러분 덕분에 행복하다”고 소감을 전했다. “행복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나는 물리적인 부자는 아니지만 마음부자다. 진실한 행복은 남이 주는 게 아니다. 각자의 삶속에서 감사할 줄 아는 게 행복이다”고 답했다.
이번 헌정 공연에 함께 하는 조항조는 “한국 대중음악을 열어준 선배다. 참가 자체만으로도 영광스럽고 감사하다”고 말했다. 유현상도 “제가 1953년생, 미8군 무대의 막내다. 윤항기 같은 선배가 또 있을까 싶다. 65주년 헌정 공연을 성공하고 70주년도 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백호는 이번 공연을 위해 헌정곡 ‘이 나이에도’를 만들어 선물했다. 들어보니 툭툭 내뱉는 가사가 너무 솔직하게 들리며, 조금 듣기만 해도 눈물이 나올 것 같다.
미국의 유명 가수이자 배우로 ‘20세기 최고의 마당발 연예인’인 프랭크 시나트라가 54세때인 1969년 후배가수 폴 앵카와 저녁 식사중 은퇴기념곡이 있을지 묻자 폴 앵카가 샹송 ‘Comme d’habitude’(여느 때처럼)에 영어 가사를 새로 쓴 ‘마이 웨이’를 시나트라에게 헌정했다. ‘마이 웨이’는 프랭크 시나트라에게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주면서, 그의 은퇴도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윤항기에게도 최백호가 바치는 ‘이 나이에도’가 좋은 헌정곡이 되어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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