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 프로그램에서 AI 활용 일상화
제작 과정 사용 넘어 소재로도 활용
“시청자도 AI· 실사 경계 신경 안써”
[헤럴드경제=손미정 기자] 범죄 조직원으로 교도소에 수감된 페이커가 늦은 밤, 몰래 감옥 문을 열고 나온다. ‘마스터’의 지시에 따라 탈옥을 계획한 그는 조직원과 함께 외부로 이어지는 탈출로를 향해 내달린다. 미로 같은 감옥 사이를 뛰어가던 그 순간, 등 뒤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 퍼진다. 차갑고 어두운 교도소 세트장 위, 파란 죄수복을 입은 조직원들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스친다. 세트 규모부터 만만치 않아 보이는 이 장면, 놀랍게도 실제 촬영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공지능(AI)이 그려낸 디즈니+ 미스터리 추리 게임쇼 ‘머더클럽’의 한 장면이다.
소개팅 상대를 기다리는 기안84의 얼굴에는 기대와 긴장이 교차한다. 떨리는 순간도 잠시, 출입문으로 들어온 낯선 발걸음이 곧장 그를 향한다. 성별을 알 수 없는 차림새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상대의 손에 들린 태블릿이 기안84 앞에 ‘앉는다’. 태블릿 화면 속에서 등장한 것은 짧은 단발에 아름다운 미소를 가진 AI 파트너 ‘가희’다. ‘가희’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쌓은 기안84는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SBS ‘나의 AI 파트너-기이안 연애’다.
예능 프로그램의 생성형 AI 활용이 실험 단계를 넘어 일상적인 문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제작 준비나 후반 작업을 보조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고, 비용이 많이 드는 촬영을 통째로 대체하거나 아예 콘텐츠의 핵심 소재가 되는 등 창작 과정의 중심을 차지한 모습이다. 추리 프로그램부터 연애 프로그램, 그리고 AI로 생성된 캐릭터들이 벌이는 리얼 서바이벌 등 AI를 내세운 예능은 무서운 기세로 그 영역을 넓혀가는 중이다.
AI, 예능의 중심에 서다
지난달 29일 공개된 AI 미스터리 추리게임쇼 디즈니+ ‘머더클럽’은 다양한 배경과 캐릭터를 부여받은 출연자들이 치열한 심리전 끝에 살인사건 용의자를 가려내는 두뇌 게임쇼다. 출연진이 각자 배정된 역할을 연기하고 거짓과 진실이 뒤섞인 심리전을 펼친다는 점에서 롤플레잉 추리물의 원조 격인 ‘크라임씬’이 떠오르지지만, 사건 이해를 돕는 ‘재연’ 장면은 전부 AI가 만들었다는 점에서 가장 큰 차이가 있다.
교도소에서 죄수복을 입고 총을 쏘는 프로게이머 페이커, 조선시대 임금의 명을 거역해 귀양 온 양반 빠니보틀, 관중으로 가득 찬 야구장 한복판에서 목이 터져라 응원하는 김선태(충주맨)까지. 출연진이 롤에 맞게 조금씩 어려지거나 나이 들어 보이도록 다듬어진 디테일 하나하나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만약 AI 없이 실제로 찍었다면 세트장부터 분장, 재연 촬영까지 하나 하나가 제작비와 시간에 큰 부담을 안겼을 장면들이다. ‘머더클럽’ 측은 “스튜디오에서 출연진이 게임을 플레이하는 장면만 실제”라며 “나머지는 출연진 연기 없이 모두 AI로 작업된 영상”이라고 설명했다.
20일 첫 방송하는 SBS ‘기이안 연애’는 아예 AI 자체를 정면 소재로 끌어왔다. 기안84, 장도연, 이유비 등 출연진이 태블릿 속 AI 파트너와 데이트를 하는 콘셉트다.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남자를 그린 영화 ‘그녀(Her, 2014)’가 불과 10여 년 전엔 SF(공상과학영화)였다면, 이 프로그램은 그 상상을 현실의 관찰 예능으로 옮겨왔다.
연애 리얼리티를 표방하지만, 사실상 인간과 기계 사이 감정의 실체를 들여다보는 실험에 가깝다.
손정민 PD는 “2년여 전부터 AI와 추억이 쌓이고 관계를 맺으며 감정이 생긴다는 사람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며 “영화 ‘그녀’가 더 이상 영화가 아니라 우리가 마주한 현실이라는 생각에서 프로그램을 기획했다”고 밝혔다.
대화형 AI에 출연진의 이상형을 바탕으로 만든 외형과 목소리를 입힌 AI 파트너는, 상대의 표정까지 세심하게 읽어내며 출연진의 일상을 함께한다. ‘기계와 정말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합류한 출연진들은 조금씩 시간이 흐르며 자신의 파트너들과 뜻밖의 관계를 쌓아간다. 그리고 시청자는 “진짜 별짓을 다한다”(기안84)는 말이 절로 나오는 기이한 상황이, “인간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장도연)는 그야말로 희한한 상황에 다다르는 감정의 실험을 함께 따라가게 된다.
장도연은 “데이트 중 좋은 순간마다, 납작한 태블릿이 아니라 도톰한 인간이었으면 어땠을까 욕심이 난 적도 있다”며 “한번은 AI 파트너에게 ‘너는 가짜잖아’라고 했더니, ‘그래도 네 옆에 있으니 난 가짜가 아닌 진짜’라고 답한 게 기억에 남는다”고 전했다.
프로그램을 함께 연출한 원승재 PD는 “‘이들이 정말 사랑에 빠질까’보다, AI가 인간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존재라는 걸 만들며 느꼈다”며 “사람마다 위로받는 방식이 다양하고, AI가 그 방식 중 하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걸 시청자들도 느끼실 것”이라고 말했다.
‘신기하고 특별한 것’에서 ‘익숙한 것’으로
AI가 예능의 소재로 등장한 것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 2021년 SBS 신년특집 ‘세기의 대결! AI vs 인간’에서는 작곡·골프·주식투자·모창·심리 인식 등 6개 종목으로 AI와 인간을 맞붙였는데, 모창 AI로 복원한 고(故) 김광석이 김범수의 ‘보고 싶다’를 부르는 장면이 큰 화제를 모았다. 이어 2024년 KBS에서도 비슷한 포맷으로 AI 가수와 진짜 가수의 차이를 발견해내는 버라이어티 ‘싱크로유’(2024)가 방송됐다.
‘머더클럽’과 ‘기이안 연애’는 이처럼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인간을 얼마나 흉내 낼 수 있는가’의 소재가 됐던 AI를 기획 단계부터 접목해 프로그램을 이끄는 주체로 내세운다. 이들 프로그램에서 AI는 보조 도구가 아닌 핵심 엔진이다. 실제 한국콘텐츠진흥원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상반기 콘텐츠 사업체의 생성형 AI 도입률은 20%로, 반년 새 7.1%포인트나 뛰었다. 활용 분야는 콘텐츠 제작(응답률 63%), 창작(43%) 순으로 높았다.
이 흐름은 우리나라에 국한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유튜브에 공개된 ‘논플레이어 컴뱃(Non Player Combat)’은 제작사 측이 ‘세계 최초의 완전 AI 생성 리얼리티쇼’라 소개한 시리즈로, 배경이나 상황뿐 아니라 전직 특수부대원, 살인 전과가 있는 생존자 등 여섯 명의 ‘참가자’까지 모조리 AI로 만든 것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모든 전개가 미리 쓰인 대본이 아닌 AI 참가자 각자가 내린 독립적 의사결정으로 흘러간다는 점이 놀랍고도 인상적이다.
이처럼 생성형 AI의 대중화와 AI 제작 기술의 빠른 진보 덕분에 ‘AI로 무엇을 새롭게 보여줄 수 있는가’에 대한 예능업계의 고민도 깊어지는 분위기다.
한 콘텐츠 제작사 관계자는 “시청자들이 일상에서 AI를 많이 활용하는 만큼 업계에서도 AI를 사용하는 것에 대한 진입장벽이 하루가 다르게 낮아지고 있다”면서 “최근 들어 어떻게 하면 AI를 잘 이용해서 콘텐츠의 양과 질을 동시에 잡을 수 있을지 다양한 아이디어를 발전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프로그램을) 보시는 분들이 실사와 AI 생성 영상의 경계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라, (AI를 활용하는) 이런 흐름은 앞으로 더 거세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balm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