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거벗은 세계사’
‘벌거벗은 세계사’

[헤럴드경제 = 서병기 선임기자]대한민국 인문학 예능을 대표하는 브랜드로 자리잡은 tvN ‘벌거벗은 세계사’(연출 김형오, 이윤호, 서용석)가 지난 4월 22일로 200회를 돌파하고 순항 중이다.

‘벌벗사’는 세계 곳곳으로 언택트 여행을 다니며 태초부터 현대까지 역사, 문학, 예술, 정치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를 전문가와 함께 쉽고 재미있게 풀어내며 지식과 재미를 동시에 전달하는 인포테인먼트 콘텐츠다. 200회 동안 수도권 가구 기준 3~4%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꾸준한 인기를 증명하고 있다. 평소 역사를 좋아하고 인문학과 교양에 관심이 있는 시청자들이 많이 본다.

2020년 12월 12일 첫 방송된 ‘벌벗사’는 한 회당 4시간 반 정도 녹화하는데, 200회면 800시간 정도 녹화했다고 볼 수 있다. 200번의 역사 여행을 통해 벌거벗겨 본 국가는 76개국이고, 누적 강의시간은 1만8000분에 이른다고 한다.

자극이 강한 ‘도파민의 시대’, ‘저(低)시청률의 시대’에 지식예능이 200회를 넘기고, 평균 3~4%대의 시청률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소비자층의 수요를 제대로 읽은 트렌드적인 포착 덕분이기는 하지만, 어렵고 복잡할 수 있는 세계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흥미있게 풀어내 지적 콘텐츠의 대표 프로그램으로서 시청자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한 제작진의 공로도 인정할만하다.

▶‘벌벗사’, 현상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벌거벗은 세계사’ 제작진에게도 꾸준하게 인기있는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한번 물어봤다.

“‘콘텐츠의 홍수’, 채널과 OTT를 비롯한 다양한 플랫폼의 치열한 경쟁이 이루어지는 업계 상황에서 ‘벌거벗은 세계사’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시청자분들의 응원으로 이루어진 성과라 생각한다. 이에 제작진은 양질의 콘텐츠로 보답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러 교수님들의 지도 아래 부족한 부분을 찾아가며 습득하고 있고 새로운 정보 전달을 위해 같은 역사를 방법론적으로 비틀어 조금 더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김형오 PD)

김형오 PD
김형오 PD

우리가 과거에는 남의 나라 역사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세계사는 선택과목이라 학창시절에도 접하지 않은 세대도 적지 않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는 다른 나라 역사라 해도 우리에게 매우 중요해졌다. 먼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의 생활과도 직간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래서 다양한 관점의 국제 관계 속에서 우리를 파악하고 갈 길을 모색해야 하는 시대다.

지구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실로 복잡 다양하다. 그래서 현상적 이해를 넘어 사건들의 뿌리와 인물들의 사상적 배경을 알고싶어진다. 모든 시사의 배후에는 역사가 있다. ‘벌벗사’에서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세계적 사건들이 어떻게 시작됐는지 역사적 근원을 되짚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우크라이나와 전쟁을 벌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정신세계를 좀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존경한다는 ‘롤모델’ 표트르 대제와 스탈린을 알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벌벗사’의 ‘표트르 대제, 러시아는 어떻게 강대국이 되었을까’와 ‘공포로 소련을 지배한 스탈린’편에서 자세히 다뤄 푸틴을 이해하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중상주의 국가의 역사에서 미국 트럼프발 관세전쟁도 곧 다룰 예정이다.

▶요즘 일어나는 일들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야?

‘강대국들의 무덤, 아프가니스탄’편에서는 사회주의 세력에 저항하는 무자헤딘에 이어 파슈툰족이 주축인 극단무장세력 탈레반이 어떻게 부활했는지를 잘 보여주었다. 영화 ‘모가디슈’의 배경인 소말리아편을 통해 30년 넘게 이어졌던 소말리아 내전과 해적 탄생의 인과관계 등을 다각적인 관점으로 풀어내 역사적 교훈으로 삼기에 충분했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분쟁과 갈등의 역사에 대한 한국외국어대학교 김찬완 교수의 최근 강연은 요즘 발생하고 있는 두 나라의 분쟁의 씨앗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또한, 건국대 박삼헌 교수의 ‘일본침몰, 자멸을 불러온 태평양전쟁’ 강의도 큰 도움이 됐다.

일본사를 강의하는 박삼헌 교수
일본사를 강의하는 박삼헌 교수

“태평양전쟁 A급 전범이 합사된 도쿄 야스쿠니 신사 이야기가 뉴스에 나오는데, 이런 이야기를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일본 건국신화부터 시작해 천황제가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져 오고 있는지를 살펴보고 있다. 일본 황실의 시조로 여겨지며, 천황가의 기원을 상징하는 아마테라스 오미카미가 일본 전역에 걸쳐 수천 개의 신사에서 숭배되는 이유도 좀 더 파악하면, 그 이유가 매우 깊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위해 박삼헌 교수님과 함께 자료와 영상조사를 하고 있다. 우리 대다수가 일본사를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었지만,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 등 일본사를 자세하게 이해하는 데 ‘벌벗사’가 기초 자료를 제공할 계획이다.”(김형오 PD)

일상 문화 생활에도 ‘벌벗사’ 강의 내용이 도움이 될 때가 많다. 패널인 이혜성은 “미술작품을 보거나 클래식 음악을 접할 때, 나라 간 분쟁에 관련된 기사를 볼 때 우리 프로그램에서 배운 내용들이 연상돼 뿌듯할 때가 많다. 일상 속의 세계사랄까”라고 말했다.

“도날드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에 대한 강의도 인상적이었다. 평소 트럼프는 왜 항상 막말을 할까? 왜 바보같이 인종차별하는 말을 할까? 이런 점들이 궁금했는데, 강의를 듣고 알게됐다. 트럼프의 악명높은 변호사가 ‘무명보다 악명이 낫다’고 조언했다. 그런 식으로 어그로를 끄는 게 낫다. 어떤 식으로 해도 적은 생긴다. 트럼프는 확실한 지지자와 반대파를 만드는 방식이다. ‘벌거벗은 세계사’는 이렇게 그 사람 행동의 맥락을 알 수 있게 해준다.”(MC 이혜성)

▶‘벌벗사’, ‘공공역사’의 한 부분으로 본다

김형오 PD는 학계에서 ‘벌거벗은 세계사’와 같은 콘텐츠를 전문가와 함께 하는 ‘공공역사’(公共歷史)의 한 부분으로 봐 준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 그는 “사학계의 성장과 발전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일을 하는 것 같아 ‘벌벗사’ 제작자로서 뿌듯하기도 하다”고 말했다.

‘공공역사’는 역사학 전문가들에 의해 전문학문의 범위 밖에서 이뤄지는 광범위한 역사 관련 활동이다. 박물관, TV, 영화, 공원, 유적지 등이 공공역사의 현장이 된다.

“역사학이 학교나 학회를 벗어나면 확산되기가 힘들다. 교수님들이 논문을 발표하면 이를 보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역사는 누구나 이야기할 수 있다. ‘벌벗사’에서 강의를 하면 많은 사람들이 듣는다. ‘벌벗사’는 공공역사를 확산하는 데 일조한다. 전문가들과 함께 하는 작업이라 내용이 좋고 탄탄하다.”

프랑스사를 강의하는 임승휘 교수
프랑스사를 강의하는 임승휘 교수

그래서인지 ‘벌벗사’에 출연한 교수들도 인기를 얻고 있다. 외부활동이 늘어났고, 방송과 유튜브 출연, 지방 강연도 많아졌다. ‘벌벗사’에 나왔던 교수들을 매달 초청해 청소년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마련하는 지자체도 있다.

‘태양왕’이라는 별병으로 유명한 루이 14세, 백년전쟁, 마녀사냥, 여왕 마고, 파리 세계박람회, 카사노바, 최초의 세계대전으로 유럽의 지도를 바꾼 30년 전쟁 등 프랑스 역사속 사건과 인물을 재밌게 풀어준 임승휘 선문대 교수와 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냉전 시대 역사 등을 강의하는 류한수 상명대 교수, 걸프 전쟁과 히잡을 둘러싼 의문사 등 어려운 중동 역사를 쉽게 설명한 박현도 서강대 교수, 중국 3대 악녀중 한 사람인 측천무후, 항우 VS 유방, 삼국지, ‘동묘의 주인 관우는 어떻게 신이 되었나?’ 등 중국사를 가르치는 이성원 전남대 교수 등은 큰 인기를 얻고 있다.

삼국지 등 중국사를 강의하는 이성원 교수
삼국지 등 중국사를 강의하는 이성원 교수

뿐만 아니라 헨리 8세와 여인들, 노예무역, 산업혁명, 제국주의 식민지 개척, 아편전쟁, 윈스턴 처칠, 엘리자베스 2세 등 영국사를 중심으로 깔끔하게 강의하는 윤영휘 경북대 교수와, 이토 히로부미, 메이지 유신, 자이니치 코리아, ‘일본침몰, 자멸을 불러온 태평양전쟁’, 일본 야쿠자의 실체, 오키나와의 슬픈 역사 등 일본사를 풀어가는 박삼헌 건국대 교수, 노예 해방과 남북전쟁, 베트남 전쟁, 미국서부개척사, 맥아더 VS 아이젠하워, 미국의 총기역사와 총격사건, 마피아, 찰리 채플린 등 미국사를 구수하게 강의하는 김봉중 전남대 교수도 유명인사가 됐다.

▶철저하게 일반인의 시선으로 이해할 수 있게

‘벌벗사’가 공공역사를 지향하는 만큼 수용자층은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시선으로 받아들일수 있도록 제작한다.

3MC들은 일반인 관점에서 구성돼 각자의 역할을 잘 하고 있다.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이혜성은 모범생이다. 퀴즈를 잘 맞힌다. 주제를 미리 알려주지 않아도 공부하고 온다.

은지원은 평소 공부 안하는 ‘학생’이지만 어떨 때는 어려운 문제를 맞히기도 하는 ‘성장캐’다. 규현도 공부는 안하지만 추리나 상황파악 능력이 뛰어나다. 은지원과 규현의 ‘케미’는 갈수록 무르익고 있다. 두 사람이 치고받는 말들이 어렵고 복잡한 세계사에 예능적 재미를 첨가하는 역할을 한다.

매주 강연주제에 따라 바뀌는 게스트도 강의에 대해 ‘리액션’만 하는 사람은 부르지 않는다. 주제와 관련해 무언가 전달할 게 있는 사람을 초청한다. 해당지역에서 일했거나 공부한 경험이 있거나, 주제에 대한 전공자나 특파원, 기자 등이다.

‘벌벗사’에는 강의중 수시로 퀴즈를 낸다. 200회까지 멤버들이 푼 퀴즈는 1041개라고 한다. 퀴즈를 풀고 있는 동안에는 절대 채널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다. 퀴즈 타임은 쌍방향 소통이 잘 돼있는 시간인 만큼 시청자도 프로그램 이입도가 높아지는 순간이다.

“퀴즈를 넣는 이유는 MC나 시청자들이 집중하게 하기 위함이다. 중요한 것은 모르는 사람도 강의를 계속 듣다보면 답할 수 있는 문제를 낸다는 점이다. 앞 사건과 상황을 유추해서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된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퀴즈다. 퀴즈에는 사고(思考)를 넣는다”(김형오 PD)

▶3MC도 성장하다

벌거벗은 세계사
벌거벗은 세계사

200회 넘게 ‘벌벗사’에 출연하면서 MC들도 스스로 달라진 모습을 느낀다고 했다. 은지원은 “사람들과 나누는 대화 중에 ‘벌벗사’에서 다뤘던 주제가 나오면 대화 참여도가 높아지고 있는 것을 느낀다”고 했다.

이혜성은 “내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주는 프로그램이다. 함께 성장해가는 든든한 동반자같은 느낌이 든다”며 “새로운 내용들을 배우는 게 정말 많은데, 흥미로운 부분은 꼭 주변 친구들 지인들과 공유한다. ‘벌거벗은 세계사’ 홍보대사가 된 느낌이다”고 전했다.

규현은 “청소년 시절 역사, 세계사는 제게 지루한 시간이었는데 성인이 돼서 역사가 이렇게 재밌다는 걸 알게해 준 프로그램이다. 점점 더 교양이 쌓이는 느낌이라 즐겁다”고 밝혔다.

3MC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묻자 은지원은 최근에 방영된 ‘곤충의 습격편’을 보고 많은 우려가 되었다고 답했다. 이혜성은 “와인, 힙합 등 문화예술 분야처럼 점점 더 다양한 분야로 확장되고 있어 더욱 재밌어지고 있다”고 했고, 규현은 삼국지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꼽았다. 필자는 5월 6일 방송된 ‘아인슈타인의 은밀한 사생활’을 흥미롭게 봤다.

아인슈타인편
아인슈타인편
아인슈타인편
아인슈타인편

▶소재선정도 혼자가 아닌 집단 회의와 토론 통해

‘벌벗사’는 소재선정을 어떻게 할까? 제작진은 혼자 정하는 구조가 아니라고 했다.

“일단 PD와 작가들이 회의하고 토론하면서, 아이템을 결정한다. 아이템을 정하는 것도 뭔가 알아야 한다. 그래서 기초조사를 공유하고, 재밌고 이야기가 되겠다 싶으면 아이템으로 정하고 파고든다. 이어 해당 주제안에서 어디서 어디까지, 또 그안에서 무엇을 다룰지를 논의한다.”

또한, ‘벌벗사’는 특정주제나 사건을 그대로 전달한다.맞다, 틀리다는 얘기는 잘 하지 않는다. 좋은 것도 나쁘다, 나쁘다 하면 나쁘게 된다. 그래서 주관적인 건 되도록 배제한다. 판단하는 것은 시청자의 몫이다.

‘벌벗사’ 제작진은 앞으로 다루고 싶은 소재로는 일본 천황제와 함께, 아이누에 대한 이야기 등 홋카이도의 역사와, 로마사에서 노예가 어떻게 로마를 흔들었는지를 살펴보는 시간도 가질 예정이다.

되도록이면 마약문제와 관세전쟁 등 현재 계속 벌어지는 일과 사건에 대한 강연도 계속할 계획이다.

“‘벌거벗은 세계사’가 앞으로도 좋은 성과를 내 300회를 맞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다. 기회가 된다면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에서 정보를 전달해드리는 특집을 준비해 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다.”(김형오 PD)

‘벌벗사’는 시청자에게 역사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고 있다. 특히 대한민국 역사와 관련돼 있는 중국과 일본의 역사적 사건 등을 알려줘 한국을 포함한 동북아시아 역사를 구조적으로 파악하게 하고, 세계 곳곳의 역사와 관련 인물의 이야기까지 풀어내며 사고력과 통찰력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