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 이후 1.2만년 전 최초의 신전
희망을 신에 기원하며 공동체 꾸려
아브라함의 샨르우르파, 문명 화해의 터
[헤럴드경제(샨르우르파)=함영훈 기자] 튀르키예에 있는 1만2000년전 신전 괴베클리테페는 인류의 문명 체계를 뒤흔드는 유적이다. 고고학자들은 이 신전의 발견으로 “인류 역사를 다시 쓰게 됐다”며 이곳을 ‘제로(0) 포인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간 문명의 시작 즉 ‘제로 포인트’는 7500년 된 수메르, 6000년 된 동이민족 홍산문명, 5200년 된 이집트 등으로 옮겨오다 이제는 괴베클리테페가 문명 역사의 새로운 시작점이 됐다. 4~7m 높이의 거대한 돌들에 음각으로 그림을 그리고, 이를 둥근 모양 등 일정한 틀에 따라 세운 괴베클리테페는 한민족의 고인돌과 서양의 그리스 신전을 섞어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기내에서 즐기는 괴베클리테페 시대 빵
최근 글로벌 최고 항공사 3관왕에 오른 터키항공을 타고 이스탄불을 거쳐 샨르우르파로 향하는 동안, 서양의 얼굴에 동양적 인정을 가진 승무원들은 아름다운 미소가 형제국 한국 승객들을 정성으로 대한다. 특히 터키항공은 비즈니스 좌석 고객들에게 괴베클리테페 조성의 과학적 추정 연대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가장 오래된 빵’을 제공한다.
샨르우르파 근교에서 만들어진 이 빵은 세계적인 수상 경력의 튀르키예 요리 및 역사학자 외무르 아코르와 체틴 셴쿨의 자문을 받아 복원됐다. 이 빵은 귀한 유산이라는 점을 나타내기 위해 위생적인 복주머니에 넣어 제공된다. 터키항공 국내선 비행을 하는 동안, 발 아래엔 유라시아 패권자들이 탐내던 아나톨리아(해뜨는 땅)고원의 모습이 펼쳐진다.
헤럴드경제는 터키항공의 초청을 받아 국내 문화관광 언론인으로는 최초로 괴베클리테페 취재에 나섰다. 샨르우르파 네발리 호텔에서 약 25분 간 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해발 700m에 소재한 둥글둥글한 모양(괴베클리=배불뚝이)의 구릉지(테페) 박물관이었다.
하늘을 닮도록 둥글게 만든 박물관 옥상에서 내려다 보면 배불뚝이 구릉지 사이사이에 외렌직 마을 등이 형성돼 있고, 그 주변엔 밀·올리브밭, 바클라바에 들어가는 견과류 피스타치오밭이 자리한다. 완만한 S라인 곡선의 지형들이 어머니의 품 같이 포근해 보인다.
시내에 있는 샨르우르파 고고학박물관과 이곳 괴베클리테페 박물관에는 빙하기의 생활상과 빙하기 이후 신전이 조성되기 시작할 무렵의 석기와 농기구, 신앙의 매개체로 삼았던 석상 등 출토 유물들이 전시돼 있다.
여기서 다시 셔틀버스을 타고 7분 가량 ‘하란(Harran) 플래툰’ 언덕으로 가면 직경 300m 가량인 괴베클리테페 유적 공개구역을 마주할 수 있다.
신약성서가 시작된 이곳, 하란
하란은 아브라함(이슬람 명칭:이브라힘)이 태어나 살던 곳으로, 성경에서 신약성서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하란 플래툰은 이 고을의 구릉지 꼭대기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핵심 코드, 티크리스-유프라테스 등 두 강 발원지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
구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 ‘아담과 이브’ 이야기의 실제 장소로 고증되는 곳(튀르키예-이라크-이란-아르메니아 접경지) 부터 이곳 까지의 거리가 600~700㎞에 불과하다. 괴베클리테페 동쪽 티그리스는 ‘에덴 동산’ 추정지 주변의 4개 강 중 하나였다고 한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와 데오도시우스가 크리스트교 전파를 위해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과 아나톨리아로 동진한 이유는 신앙의 부모가 있는 이곳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4층 구조의 괴베클리테페는 단순한 신전이 아니었다. 신전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소원을 비는 나무 제단, 공동 우물, 그룹별 회합 장소를 두었다.
본당이라 할 곳에는 높이 15m, 4층 구조로, 각 마을 별 공회당, 예식장, 장례식장, 신전보호를 위한 관리인(성직자) 숙소 등이 원 둘레에 지어졌으며, 그 한복판에 원형 또는 정방형의 신전들이 조성된 형태이다.
공개구역은 직경 300m 넓이 2만 평 가량이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구역은 유산 면적 38만 평, 완충 지역 139만 평 등 크기가 더 광범위하다. 괴베클리테페를 포함해 이같은 형태를 가진 12개 신전을 통칭해 ‘타쉬 테펠레(돌 언덕)’라고 부른다.
괴베클리테페 보다 조성시기가 100년 가량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카라한테페(발굴중)를 비롯해, 할베트수반, 귤츄테페, 쿠루테페시, 타쉬리테페, 새페르테페, 아야나르, 요운불츠, 사이불츠, 착막테페, 예니막할레 등이 발굴 중이거나 발굴을 기다리는 상황이다. 터키항공은 튀르키예 문화유산 및 박물관청이 동·서양 고고학자들을 특별초빙해 진행 중인 ‘타쉬테펠레’ 발굴 보존 프로젝트를 후원하고 있다.
독일고고학연구소 괴베클리테페 담당자 리 클레어박사는 헤럴드경제와의 인터뷰에서 “사람을 형상화한 것으로 추정되는 5~7m 오벨리스크 210개가 서 있는 원형 등 형태로 서 있는 구조물은 종교 의식과 관련되고, 사망한 선조를 추모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며 “4개 구역으로 나뉜 개별 신전 속 동물조각상은 마을 별 풍속과 수호신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유네스코는 “장식된 기둥이 많으며 T 자형의 석회암 기둥군 등 (고대의) 혁신적인 건축 기술을 증명한다”면서 “괴베클리테페는 인류 역사의 중요 시기를 증명하는 기념비적 거석 구조물의 앙상블을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라고 극찬했다.
‘예언자의 도시’ 샨르우르파
이 유적이 있는 샨르우르파는 아브라함의 고향이다. 로마·십자군, 돌궐(투르크)·몽골 등이 번갈아 지배하던 동·서양 가교 같은 도시이다.
이 곳은 ‘예언자의 도시’라 불릴 정도로 크리스트교 성경, 이스람교의 쿠란, 유대교의 토라에 언급된 성지이다. 각양각색의 순례객들을 보면 샨르우르파가 문명 화해의 도시라는 점을 실감한다. 예루살렘에 무슬림 출입이 제한받고 있음을 생각하면 샨르우르파는 진정한 종교 평화의 성지이다.
샨르우르파 성채 아래엔 아브라함이 태어났다는 동굴이 있다. 이곳 샘물은 치료효과가 있다는 입소문에, 샘 앞에는 늘 긴 줄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다.
넴루트의 왕이 우상숭배를 비판하는 아브라함을 화형하려 했으나, 불길은 물로, 장작은 물고기로 변했다는 전설이 있다. 실제 성체 아래엔 큰 연못과 팔뚝 만한 물고기들이 여행객들을 반긴다. 이들은 튀르키예와 쿠르드의 문화가 조화를 이룬 전통의상을 입고 한데 어울려 기념사진을 찍는다.
아브라함의 연못(발르클르괼) 주변에는 1716년 세워진 리즈바니예 모스크가 연못에 멋진 반영을 드리운다. 고고학 박물관, 모자이크 박물관, 메블리드 할릴 모스크 등 중심부 광장과 아브라함 연못이 멀지 않아 편하게 여행할 수 있다.
이곳도 K-팝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 하다. 샨르우르파 알리셀리공원에서 기자를 본 중학생 소녀들이 손을 흔들더니 K-팝 노래의 한 소절을 불러준다. 노래를 통해 낯선 한국 아저씨와 소통을 하려는 것처럼 보여 왠지 반갑다.
아시아에 속한 샨르우르파의 음식은 한국만큼 매운편이다. 청양고추급 이소트(İsot) 고추가루가 케밥에 들어간다. 동방의 만두를 닮은 치이쾨프테 완자도 있다. 우르파 지예르 케밥은 닭 부산물로 만들었는데, 동물 부산물까지 지혜롭게 요리에 활용하는 점이 극동을 닮았다. 생강향이 살짝 들어있는 므라 커피는 이스탄불보다 쓰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풍경은 ‘스라 게제시’라고 불리는 공연 관람형 만찬이다. ‘체바히르한’에 가면 남녀노소가 두툼한 방석에 앉아 전통 공연을 즐기면서 치이쾨프테와 양고기 백반 등을 즐긴다. 처음엔 “어르신 분위기인데 젊은이들이 열광하네”라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분위기가 무르익자 남녀노소 불문하고 어깨와 엉덩이를 들썩였다.
1만2000년 전, 신앙·생활공동체를 꾸리며 문명을 개척했던 샨르우르파 사람들은 문화의 ‘원형’을 매우 오래도록 지켜가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