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미만으로 줄어든 AI 가속기 신제품 출시 주기

삼성, HBM 기술력 끌어올릴 시간도 짧아져

속도 경쟁 가속화…내년 안에 ‘승부’ 봐야

실적 버팀목 범용 D램, 당분간 가격 폭락 불가피

“HBM 등 고부가 제품만이 희망”

HBM 엔비디아
[챗GPT와 망고보드를 이용해 제작]

<김민지의 ‘칩(Chip)만사(萬事)’!>

마냥 어려울 것 같은 반도체에도 누구나 공감할 ‘세상만사’가 있습니다. 불안정한 국제 정세 속 주요 국가들의 전쟁터가 된 반도체 시장. 그 안의 말랑말랑한 비하인드 스토리부터 촌각을 다투는 트렌드 이슈까지, ‘칩만사’가 세상만사 전하듯 쉽게 알려드립니다.

[헤럴드경제=김민지 기자] 반도체 시장은 역시 무자비합니다.

올 한해는 유독 삼성전자에게 가혹한 한해였습니다. 지난해 메모리 다운턴 시기는 모든 주요 업체들이 공통으로 겪은 불황이었지만, 올해는 삼성 혼자 고전 중입니다. 메모리도, 파운드리와 시스템LSI도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습니다.

지금 삼성에게 가장 필요한 건 ‘시간’입니다. 뒤처진 원인을 파악하고, 다시 근원적인 기술력을 회복하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AI 시대의 도래와 맞물려 반도체 로드맵 시계는 더욱 빨라졌습니다. 삼성은 엔비디아의 신제품 출시 속도에 맞춰 기술력을 높여야하는 동시에 뒤쫓아오는 중국의 저가 범용 D램 공세에 맞서야 합니다.

매번 위기를 기회로 바꿔온 삼성전자. 이번에도 특유의 내공을 발휘해 반전에 성공할 수 있을까요? 삼성에게 녹록치 않은 환경, 오늘 칩만사에서 알아봅니다.

“1년도 안돼 새 AI 칩 나온다”…HBM 속도전도 가속화

최근 주요 외신들에 따르면, 엔비디아는 당초 2026년 출시 예정이었던 AI 가속기 ‘루빈’을 최대 6개월 앞당겨 빠르면 내년 3분기 내놓을 계획입니다.

엔비디아 루빈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지난 6월 대만 컴퓨텍스 기조연설에서 처음 공개한 차차세대 GPU 루빈(Rubin) 플랫폼. 루빈에는 HBM4 8개가, 루빈 울트라에는 HBM4 12개가 탑재될 계획이다. [타이베이=김민지 기자]

루빈은 엔비디아의 차차기 그래픽처리장치(GPU) 기반 플랫폼입니다. 앞서 젠슨 황은 지난 6월 대만 타이베이에서 열린 컴퓨택스 2024에서 처음으로 루빈 출시 계획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현재 엔비디아는 차기 AI 가속기인 블랙웰 양산에 돌입했습니다. 이르면 이달 중, 늦어도 내년 초에 출시합니다. 만약 루빈이 2025년 안에 출시된다면, AI 가속기의 신제품 출시 주기가 1년 미만으로 짧아지는 셈입니다.

루빈에는 6세대 고대역폭메모리(HBM)인 HBM4가 8~12개 탑재됩니다. 블랙웰에 HBM3E가 8개 탑재된 것과 비교해 더 늘어났습니다. 루빈이 출시되면 그만큼 HBM4 수요도 더 폭발할 전망입니다. HBM은 여러 개의 D램을 수직으로 쌓아 데이터 처리량을 극대화시킨 메모리로, GPU 성능을 높이기 위해 필수적으로 탑재됩니다.

업계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HBM4에서 만큼은 경쟁력을 회복해야 한다고 이전부터 지적해왔습니다. AI 가속기 출시가 더욱 빨라지면서 HBM 기술도 속도경쟁에 돌입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루빈의 출시가 빨라지는 건 삼성전자에게 좋은 소식만은 아닙니다. 삼성전자로서는 HBM 기술력 증진을 위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메모리 반도체 ‘슈퍼 사이클’ 돌아왔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 전경. [삼성전자 제공]

삼성은 HBM 기술력 저하의 원인이 D램에 있다고 보고 설계부터 재검토에 들어간 상황입니다. 5세대인 HBM3E를 1a(4세대) D램 기반으로 제작해왔는데, 전력 소모량이 발목을 잡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HBM4는 1c(6세대) D램을 적용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1a와 1b D램 성능부터 차근차근 개선해 1c D램에서 승부를 보겠다는 전략입니다.

실적 버텨줄 범용D램도 가격 폭락…중국 공세에 ‘울상’

AI용 고성능·저전력 메모리 기술력을 회복할 동안, ‘실적 버팀목’ 역할을 해줄 범용 D램 시장도 녹록치 않습니다.

시장조사업체 D램익스체인지에 따르면, 지난달 PC용 D램 범용 제품(DDR4 8Gb)의 평균 고정 거래가격은 전달(10월) 대비 20.59% 급락했습니다. 올해 들어 가장 큰 낙폭입니다. 지난 7월 2.1 달러에서 11월 1.35달러로 넉달 새 35% 하락한 셈입니다.

스마트폰, PC 등 범용 D램이 탑재되는 IT 기기 수요 회복이 예상보다 훨씬 더딘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까지 더해졌기 때문입니다.

USA-CHINA/CHIPS
[로이터]

중국 최대 메모리 업체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와 푸젠진화(JHICC)는 DDR4 8Gb D램을 시중 가격의 절반 수준인 0.75~1달러에 팔아치우며 물량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중국 업체들은 DDR4 시장에서 점유율을 늘리며 전체 D램 시장에서 영향력을 높이고 있습니다. CXTM의 올해 D램 시장 점유율은0 11.8%로, 미국 마이크론에 이어 4위에 오를 전망입니다.

문제는 중국의 DDR4 ‘덤핑’ 영향이 고부가 제품인 DDR5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지난달 PC용 DDR5 16Gb 제품의 평균 고정거래가격은 3.9달러로 전월의 4.05달러 대비 3.7% 떨어졌습니다. 지난 7월의 4.65달러와 비교하면 넉달새 16.1% 하락했습니다.

전반적인 D램 가격 하락세는 내년 초까지 이어질 전망입니다. 박유악 키움증권 연구원은 “올 연말과 내년 초 D램 가격은 예상보다 크게 하락할 전망”이라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D램 부문 실적에 대해서 눈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분석했습니다.

결국 믿을 건 HBM 등 고가 메모리…6세대서 반전 이룰까

범용 D램 시장 침체와 가격 하락세, AI 시대 메모리 수요 폭증으로 결국 믿을 건 HBM과 같은 고부가가치 메모리입니다.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전체 D램 시장에서 HBM 매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8%에서 올해 21%, 내년 30% 이상으로 확대될 전망입니다.

엔비디아 GB200 그레이스 블랙웰 슈퍼칩과 SK하이닉스 HBM3E
지난달 개최된 SK AI 서밋 2024에 엔비디아 GB200 그레이스 블랙웰 슈퍼칩과 SK하이닉스 HBM3E가 전시돼 있다. [연합]

SK하이닉스의 경우 3분기 전체 D램 매출 중 HBM 비중이 약 30%에 달합니다. 4분기에는 HBM 비중이 40%로 더 늘어날 것으로 분석됩니다. SK하이닉스는 8단, 12단 뿐 아니라 16단 HBM3E까지 개발 중입니다. 내년 초 고객사에 샘플을 제공한다는 계획입니다. 이미 HBM3E 매출 비중이 HBM3를 넘어서며 최신 시장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전체 D램 매출에서 HBM이 18~20% 가량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내년에 엔비디아에 HBM3E 공급을 시작하면 이 비중은 더 늘어날 방침입니다.

업계 관계자들은 삼성전자가 기술력만 받쳐준다면, 경쟁사 대비 높은 캐파(생산능력)으로 빠르게 시장 점유율을 높일 것으로 관측하고 있습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내년 시작되는 HBM4 경쟁에서 삼성전자가 적기에 기술력을 갖추고 엔비디아에 공급을 시작한다면 예상 외로 경쟁력 회복은 빠를 것”이라며 “생산능력이 월등히 높기 때문에 전체 HBM 시장 확대도 주도할 여력이 있다”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