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판매 자동차 ‘배출가스 한도’ 규제

2032년 전기차 생산량 최대 67%까지

NYT “이런 규모 부합하는 업체 없을 것”

현대차그룹 전환전략 전면 재검토 불가피

미국서만 전기차 최대 1200만대...“자동차업체 심각한 도전”
현대차 앨라배마 공장 [연합]
미국서만 전기차 최대 1200만대...“자동차업체 심각한 도전”

미국 정부가 2032년까지 전기차 생산량을 최대 67%까지 확대하는 규제안을 추진한다. 이에 2032년을 기점으로 미국 시장에만 많게는 약 1200만대의 전기차 보급이 필요하게 됐다. 단일국가 기준 세계 최대의 완성차 시장인 미국 시장에 대한 글로벌 완성차 업체 간 경쟁이 더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뉴욕타임스(NYT)와 로이터 통신은 8일(이하 현지시간) 복수의 당국자를 인용, 환경보호청(EPA)이 오는 12일 이 같은 내용의 승용차 및 소형트럭 탄소 배출 규제안을 발표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규제안은 전기차 판매 규모 또는 비중을 규정하지 않았으나 2027~2032년 총판매 차량의 배출 가스 한도를 엄격히 제한하는 것이 골자다. 이 한도를 맞추려면 완성차 업체들은 사실상 2032년까지 판매하는 신차 가운데 3분의 2를 전기차로 채워야 한다.

이번 규제안은 지난해 미국이 전기차 수요를 촉진하기 위해 발표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이은 조치로, 이른바 기업평균연비규제(Corporate Average Fuel Economy·CAFE) 방식으로 불린다. 한 기업이 1년 간 생산하는 자동차의 평균 연비를 규제하면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0.1마일/갤런당 150달러의 과징금을 판매 대수에 비례해 부과한다.

세부적으로는 지난해 시행한 IRA보다 강제력의 강도가 높다. IRA는 ‘북미 최종 생산’ 규정을 지킨 전기차에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을 큰 축으로 하고 있다. 보조금 총액은 대당 최대 7500달러(한화 약 1050만원)로 업체들이 외면할 수 없는 수준이지만, 리스차량과 상용전기차는 IRA적용대상에서 제외돼 업체 입장에서는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규제안은 전체 완성 차량이 대상이다.

NYT는 “규제안은 미국 정부의 가장 적극적인 기후 규제가 될 것이며, 미국이 자동차의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한 전 세계 노력의 선두에 설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유럽연합(EU)은 2035년까지 휘발유 차량의 판매를 단계적으로 중단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차량 배출 기준을 제정했다. 캐나다와 영국은 EU 모델과 유사한 기준을 제안했다.

완성차 업계에는 상당한 부담이 될 것으로 보인다. 현지 전기차 전략도 수정이 불가피하다. 전기차 보급을 늘리지 않을 경우 기존 내연기관 차량을 판매할 때마다 과징금을 미국 정부에 납부해야 한다. 주요 완성차 업체들이 바이든 정부가 구상하는 수준에 도달한 회사가 없다는 점을 고려하면 경쟁은 앞으로 더 치열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WP는 “배터리 등 전기차 제품을 중국발 공급망에 의존하고 있는 업체에는 특히 도전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미국서만 전기차 최대 1200만대...“자동차업체 심각한 도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8월 백악관에서 지프의 랭글러 루비콘 전기차를 시험 운전해 본 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며 차에서 내리고 있다. [AP연합뉴스]

전기차 생산을 위해서는 현지에 생산 공장을 확보하고, 배터리 수급 상황을 개선해야 한다. 또 반도체를 비롯해 배터리 등 핵심 부품과 관련된 충분한 원자재도 확보해야 한다. 수백만개 규모의 전기차 충전소와 전력 수요를 위한 전력 그리드 확보까지 당면한 과제다.

앞서 영국의 리서치기관 IHS 마킷(Markit)이 전망한 미국의 2030년대 총 완성차 판매량 전망치는 1800만대였다. 딜로이트와 블룸버그NEF는 각각 1500만대와 1400만대 이상의 완성차가 판매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 중 67%는 약 930만~1200만대에 달한다. 2030년까지 전체 판매 차량 절반을 전기차로 채우겠다는 바이든 대통령의 정권 초기 목표치를 300만대 웃도는 규모다. NYT는 “지난해 기준 미국에서 판매된 신차 가운데 전기차 비중이 5.8%에 불과한 것과 비교하면 비약적인 증가”라고 분석했다.

국내 완성차 업계에도 비상등이 켜졌다. 현대차그룹이 오는 2025년 가동을 준비하고 있는 미국 조지아주 브라이언 카운티 내 전기차 전용공장 ‘현대자동차그룹 메타플랜트 아메리카’의 연간 생산량은 약 30만대 수준이다. 연간 생산량 기준 기아가 조지아주 웨스트포인트시에서 운영하는 공장(2010년 준공)은 30만대, 미국 앨라배마에 있는 현대차 공장(2005년 준공)은 39만대다.

판매 목표 대수는 더 높여야 한다. 현대차는 전년 발표 기준 2030년 전기차 판매 목표를 187만대(현대 152만대·제네시스 35만대)로 설정했다. 내연기관 판매 대수를 밝히지 않았지만, 전기차 비중이 36%에 해당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설비 증설과 생산량 증대가 더 필요하다. 기아는 최근 인베스터데이를 통해 2030년 전체 판매 대수 430만대 중에 160만대를 전기차로 채우겠다고 발표했다. 이 역시 37% 비중에 불과하다.

다만 환경보호청의 계획이 지나치게 급진적인 탓에 대다수 자동차 업체가 현실적으로 이를 충족하기 어려울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WP는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더 많은 전기차를 생산하기 위해 공장과 조립라인을 개조하는 중이지만, 시간과 도움이 필요하다”고 했다. NYT도 “미국 정부가 발표할 예정인 목표치는 자동차 업체 입장에서도 심각한 도전이 될 것”이라며 “모든 주요 자동차 기업이 전기차 생산 설비에 투자했지만, 이 같은 규모에 부합할 수 있는 업체는 거의 없다”고 일갈했다.

한편 미국의 이번 ‘깜짝 발표’ 저변에 바이든 행정부의 정치적 노림수가 숨어있다고 분석도 제기됐다. NYT는 “환경보호청의 조치는 알래스카 연방 토지에서 대규모 석유 시추 프로젝트를 승인하기로 한 이후 터져나온 기후 활동가의 분노를 잠재우는 효과가 있다”며 “행정부 내부에서도 대부분 미국인이 전기차로 전환하면 석유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성우·원호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