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러리맨 출발 나이 30에 대우실업 창업
1년에 289일 해외에서 보내며 일에 매진
말년 건강악화 자신이 세운 병원서 삶 마감
영욕의 세월이었다. 지난 9일 향년 83세로 별세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는 지론으로 ‘세계경영’을 진두지휘한 한국 경제사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다.
1967년 대우그룹을 창립해 41개 국내 계열사를 거느리며 재계 2위까지 올랐지만 외환위기 파고를 넘지 못하고 1999년 전격 해체되면서 굴곡진 삶을 살았다. 한국 경제사에 ‘세계경영’의 씨앗의 뿌리고 샐러리맨 신화를 일궜지만 역대 최대 규모 부도를 내고 5년 8개월여 해외도피 생활하는 등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보냈다.
▶396개 해외법인 ‘세계경영’ 신화=김우중 전 회장 성공신화는 1967년 대우실업을 창업하면서 시작됐다. 그의 나이 만 30세였다.
1936년 대구출생인 김 전 회장은 경기고와 연세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너는 장사해라’는 납북된 아버지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대학 졸업후 섬유 수출업체인 한성실업에 입사했다. 삼성과 현대를 키운 이병철과 정주영 등 1세대 창업가와 달리 샐러리맨으로 출발한 김 전 회장이 직장인의 우상으로 불리는 이유다. 김 전 회장은 당시 “일을 많이 해서 어떤 직종에서든 유능해 인정받겠다는 일념 뿐이었다”며 훗날 회고하기도 했다. 한성실업에서 인정받던 ‘청년 김우중’은 트리코트 원단생산업체인 대도섬유의 도재환씨와 손잡고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대우실업을 세웠다. 섬유 수출을 기반으로 사세를 키운 김 전 회장은 1980년대 무역·건설부문을 통합해 ㈜대우를 설립(1982년)하고 자동차·중공업·조선·전자·통신·정보시스템·금융·호텔·서비스 등 전 산업 분야에 진출했다.
45세 때인 1981년 대우그룹 회장에 오른 김 전회장은 ‘세계경영’의 깃발을 꼽으며 경제영토를 넓혔다. 특히 1990년대 동유럽의 몰락을 계기로 폴란드와 헝가리 등에 자동차 공장을 세우면서 ‘신흥국 출신 최대의 다국적기업’으로 대우를 성장시켰다. 1999년 그룹 해체 직전까지 자산규모는 76조7000억원으로 현대에 이어 국내 2위였다.
▶‘세계는 넓고 할일은 많다’ 불꽃같았던 삶=김 전 회장은 1989년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유명한 저서를 남기기도 했다.
그는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우리끼리 경쟁하며 살 것이 아니라 과감하게 밖으로 나가자”며 “국제관계에서 우리가 밀면 개척자가 되지만, 수세에 몰리면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며 도전정신을 강조했다.
김 전 회장은 아들의 장례식과 딸 결혼식을 제외하고 일에만 매달린 집요한 승부사로도 통한다. 실제 김 전 회장은 술, 골프, 휴가와는 거리를 두고 1년에 289일을 해외에서 보낸 것으로 유명하다. 김 전 회장은 생전 리더의 3계명으로 ‘비전, 용기, 희생정신’을 제시하며 기업가 정신을 강조하기도 했다. 회사 설립 10년 만인 1977년에 동아방송 신년대담에 출연한 자리에서는 “‘소유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가’가 되기보다 ‘성취형 전문경영자’가 되고 싶다”고 밝혔다.
▶분식회계 혐의 추징금 17조원 비운의 경영인=샐러리맨으로 시작해 재계 2위 총수로 추앙받은 김 전회장이었지만 말년은 초라했다.
대우그룹은 1998년 당시 대우차-제너럴모터스(GM) 합작 추진이 흔들린 데다 회사채 발행제한 조치까지 내려져 급격한 유동성 위기에 빠졌다. 설상가상 김 전 회장은 21조원대 분식회계와 9조9800억원대 사기대출 사건으로, 항소심에서 징역 8년6월, 추징금 17조9253억원을 확정받았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과거 자신이 시장을 개척한 베트남을 ‘제2의 고향’으로 삼아 머물며 동남아에서 인재양성 사업인 ‘글로벌 청년 사업가(GYBM)’ 프로그램에 주력해왔다. 지난해 말 건강 악화로 베트남에서 귀국한 김 전 회장은 대우그룹이 해체된 지 20년 만에 자신이 사재를 출연해 세운 수원 아주대 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천예선 기자/ch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