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트인터랙티브, 캐스팅부터 기획까지
1200여 곡 중 선택한 곡이 '큐피드'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 내놔야 지속가능
요즘 아프로비트 장르가 새로 주목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흙속의 진주’를 찾기 위해 수백, 수천 곡을 수급하고 그 중 우리 그룹에게 가장 어울릴 만한 곡을 찾아내죠. 모든 네트워킹을 동원해 1200여 개의 곡을 받아 찾은 곡이 피프티피프티의 ‘큐피드’였어요.”
틱톡을 타고 스포티파이를 거쳐, 세계 양대 차트인 미국 빌보드(최고 성적 메인 싱글 차트 ‘핫100’ 17위)와 영국 오피셜까지 입성한 걸그룹 피프티 피프티의 ‘큐피드’. 전속계약 분쟁 탓에 얼룩진 영광처럼 보이나 이 그룹의 성취는 여전히 ‘중소 기획사의 기적’으로 남아있다. 당시 피프티피프티의 A&R(Artists and Repertoire· 아티스트 앤드 레퍼토리)을 이끌던 인물은 가수 손호영, ‘팬텀싱어2’ 우승팀인 포레스텔라, 보이그룹 에이스가 소속된 이준영 비트인터랙티브 본부장이다.
최근 헤럴드경제와 만난 이준영 비트인터랙티브 본부장은 당시를 떠올리며 “하나의 곡을 찾는 것은 망망대해에서 낚시를 하거나 좋은 묘목을 찾기 위해 농산지를 돌아다니는 과정”이라고 했다.
K-팝이 거대 팬덤을 가진 장르로 성장하자 전 세계 음악업계에선 K-팝의 기획, 제작, 트레이닝 등 모든 시스템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그룹의 트레이닝 시스템이 현재 K-팝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주목받는 분야라면, K-팝의 근간인 음악이 태어나는 A&R 시스템은 숨은 ‘성공의 주역’이라 할 수 있다. 이 본부장은 2019년부터 A&R 업무에 본격적으로 뛰어들며 전례 없는 성과를 거뒀다. 피프티피프티의 캐스팅부터 신인 개발, 앨범 제작에 참여했고 현재는 비트인터랙티브에서 에이스의 컴백과 신인 보이그룹 데뷔도 함께 준비 중이다.
A&R은 K-팝의 시작과 끝이다. 하나의 그룹이 태어나기까지 모든 것을 매만진다. 이 본부장은 “A&R은 레이블의 규모와 특성, 지역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한국의 경우 아티스트의 앨범, 콘서트, 콘텐츠 제작 등 모든 프로젝트의 기획부터 제작, 앨범 발매, 리뷰 등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에 모두 관여하는 음악 쪽의 브랜드 매니저”라고 말했다.
아이돌 그룹은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에 따라 색깔이 완전히 달라진다. 즉 ‘방향성의 설정’이 그룹의 성패와 생명력을 좌우한다.
K-팝 A&R의 ‘전통적인 방식’은 음악의 방향성을 정한 뒤 비주얼, 안무, 뮤직비디오 등으로 나아가는 방식이었다. 최근엔 조금 달라진 양상을 보인다. “비주얼 콘셉트를 먼저 정한 뒤 그에 맞는 음악색을 입히는 경우가 많아졌다”는 것이 이 본부장의 귀띔이다.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걸그룹이 이러한 사례에 속한다.
덕분에 최근 업계엔 비주얼 디렉터 출신이 A&R 담당자로 속속 들어오고 있다. K-팝 업계의 중요한 크리에이터로 자리한 민희진 전 어도어 대표 역시 미대 출신으로, SM엔터테인먼트에서 소녀시대, f(x), 샤이니의 비주얼 콘셉트를 담당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이 본부장이 기획 단계부터 참여한 피프티프피트의 성공은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음악 트렌드가 급변하던 시기, 판을 짜고 뒤엎기를 반복했다. 세계 시장을 강타한 ‘큐피드’를 찾아내기까진 무려 1년 6개월이 걸렸다.
이 본부장은 “피프티피프티는 당시 주류 K-팝 신(scene)에서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을 했던 (여자)아이들과 같은 걸크러시 콘셉트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딱 맞는 곡을 찾지 못했다”며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아 다양하게 열어두고 보다가 (이지 리스닝 계열의 콘셉트로) 확실하게 정해진 이후 빠르게 추진했다”고 말했다.
걸크러시가 대세인 상황에서 이와는 정반대 지점에 선 ‘이지 리스닝’의 음악을 한다는 것은 모험이었다. 우려와 불안을 안고 음악 작업을 하던 무렵 4세대 대표 K-팝 그룹 뉴진스의 데뷔는 피프티피프티와 이 본부장에게도 큰 힘이 됐다. “뉴진스를 보며 우리가 이걸 해도 되겠다는 자신감도 좀 붙었다”는 것이 그의 귀띔이다.
2020년대 이후 방탄소년단과 블랙핑크가 전 세계를 동시에 강타하면서 K-팝 영토가 확장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들과 함께 4세대 K-팝 그룹들이 속속 등장해 서로 다른 색으로 팬덤을 쌓았다. 4세대 걸그룹만 해도 에스파·뉴진스·아이브·르세라핌·엔믹스 등이 공존하며 각자의 음악적 성취를 거두고 있다. 제작자들의 ‘시도의 다양성’으로 만들어낸 결과다.
이 본부장은 “과거만 해도 아이돌 그룹은 강한 퍼포먼스, 센 음악에 초점을 두는 경우가 많이 보였다면 이젠 음악적 장르가 다양해지는 추세”라며 “음악 제작자의 입장에선 타이틀곡과는 상반되는 분위기의 곡을 음반에 수록한다 해도 누군가의 플레이리스트에 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됐다”고 했다.
같은 아이돌 그룹이라도 성별과 연차에 따라 전략은 달라진다. 걸그룹이 대중성에 기반한 작업을 많이 한다면, 보이그룹은 코어 팬덤 구축을 첫 번째 과제로 삼는 것이 K-팝 그룹의 전통적인 전략이다. 연차가 높은 그룹일수록 난관이 더 많다. 특히나 보이그룹은 군백기(군 공백기)라는 치명적 비수기를 겪는 동안 K-팝 환경이 완전히 달라지기에 새 전략 수립과 고민은 필수다.
컴백을 앞둔 에이스(A.C.E)도 마찬가지다. 군백기를 마치고 2~3년 만에 완전체 음반으로 돌아오지만 어느덧 7년차. 나름의 팬덤은 확보했으나, 고연차에 접어든 데다 대중적 인지도는 낮다는 점은 지속가능성의 한계다. 에이스의 무기는 실력이다. 데뷔 당시부터 홍대 버스킹을 통해 실력을 쌓고, 100석부터 시작해 1000석부터 5000석까지 관객을 늘려가며 해외 투어를 하고 있는 착실한 그룹이다. 이번 컴백에서도 에이스는 ‘내가 잘하는 것을 보여주자’는 전략으로 승부수를 던진다. 이 본부장이 준비 중인 신인 보이그룹은 에이스의 DNA를 이어받아 데뷔 전 버스킹 투어를 다녀왔다. 멕시코시티, LA, 보스턴, 뉴욕에서 현지 크루와의 협업 형태로 데뷔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팬덤을 쌓는 방식이다. K-팝의 기존 제작과정에선 본 적 없는 시도로, 전략적 A&R의 한 과정이다.
소위 ‘방·블·트’(방탄소년단·블랙핑크·트와이스)로 불리는 3세대 그룹과 함께 K-팝은 북미, 남미, 유럽으로 영토 확장을 일궜다. 한국을 찾는 각 분야 인사들의 입에선 늘 K-팝의 이야기가 나올 만큼 위상이 달라졌다. 하지만 업계에선 “글로벌 음악 시장에서 K-팝이 차지하는 비중은 여전히 적다”고 말한다. 이 본부장 역시 “K-팝은 아직도 소수만이 듣는 장르”라고 생각한다. 특히나 한국어로 부르는 곡의 비중은 2%대에 불과(루미네이트 집계)하다.
이 본부장은 “극소수의 파이를 가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꾸준히 좋은 음악을 내는 것과 팬덤과 타깃층에 대한 깊은 고민을 가지는 것”이라며 “K-팝은 새롭지 않으면 배신감을 느끼는 장르다.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내놓으며 트렌드를 만들어갈 때 지속가능한 음악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나 그는 K-팝이 지속하기 위해선 “K-팝끼리의 내부 경쟁이 아닌 팝 음악과의 외부 경쟁을 해야 한다”며 “팝 문화를 대상으로 K-컬처를 최대한 많이 노출하는 것은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 전략의 성공적 결과는 블랙핑크 로제와 세계적 팝스타 브루노 마스의 듀엣곡 ‘아파트’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의 술 게임을 소재로 만든 이 곡은 팝 음악의 향수를 더하며 전 세계를 강타했다.
향후 음악시장에서 새롭게 떠오를 장르로는 아프로비트(미국의 펑크, 재즈 등의 서아프리카 음악 스타일의 요소를 결합한 서아프리카 음악 장르)를 꼽았다. 르세라핌을 비롯해 최근 컴백한 샤이니 민호가 들고 나온 장르다.
그는 “트렌드는 돌고 돈다. 과거의 문화를 다시 발견해 익숙하지만 새로운 느낌을 전달하는 시도는 음악계에서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다”며 “아프로비트에 대한 시도는 특히나 눈에 띈다. 아직 그 감성을 담기에 부족하나 시간이 지나 K-아프로비트를 만들어내는 때가 올 것”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