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황학동·가락동 상인들 만나보니
중고거래 침체…물품엔 먼지만 쌓여
가락동 상인들, “과거 활기 잃었다”
치솟은 농산물값…수요 뚝 떨어져
[헤럴드경제=박준규 기자·김도윤 수습기자] “장사고 뭐고, 이제는 그냥 버티는 게 목표입니다.”
12일 늦은 오후 서울 중구 황학동 주방·가구거리. 한때 활기로 가득했던 모습과 달리, 거리엔 무거운 공기가 내려앉은 듯 침체된 인상을 주었다. 가게 밖에 내둔 의자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상인들은 표정없이 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황학동에서 15년째 주방용품을 판매하고 있는 한 상인은 가게 쌓여가는 물건을 가리키며 지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렇게 힘든 적은 없어요. 물건이 안 팔리니까 재고만 늘어나고,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자신도 없어요.”
건너편 점포를 지키고 있던 다른 상인도 비슷한 어려움을 호소했다. “코로나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 거리에 사람이 없으니 장사가 될 리가 없다. 길거리를 봐라. 상인들만 나와 있고 손님은 보이지 않잖나”라며 답답함을 털어놓았다.
지하철 2호선 신당역을 빠져나와 서울중앙시장을 통과하면 펼쳐지는 황학동 주방거리는, 요식업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찾는 ‘성지’로 통했다. 식당 하나 차리는데 필요한 각종 집기와 기기들을 저렴하게 구할 수 있어서다. ‘자영업자 공화국’ 한국에선 문 닫은 가게에서 나온 쓸만한 물건들은 황학동으로 모였고, 새롭게 창업하는 사장님들이 가져가는 생태계가 형성됐다.
하지만 이제는 얘기가 달라졌다. 인건비와 고물가에 숨이 막히며 요식업은 벼랑 끝에 몰렸다. 요식업 사장님들의 어려움은 이곳 상인들에게도 고스란히 전이됐다. 한 중고점포의 대표는 “과거엔 세 명이 요식업을 하면 하나는 잘 되고, 하나는 중간, 나머지 하나는 망한다고들 했는데 요즘은 셋이 시작하면 셋 다 망한다”며 최근 상황을 설명했다.
황학동 거리에서 30년 넘게 가구를 판매해온 안모(76) 씨는 심각한 이야기를 털어놨다. 그의 가게 안에는 먼지가 수북이 쌓인 침대가 놓여 있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황학동은 원래 가구거리로 유명했는데, 주방 용품으로 전환하는 곳들이 어느새 늘었고 지금처럼 가구와 주방이 공존하는 형태가 됐다.
안 씨는 “한때는 이 거리에 120곳 넘는 가구점이 있었는데, 이제는 딱 세 곳 남았다며 이번에 가족들한테 빌려서 임대료를 메꿨다”고 말했다.
이곳 새로 창업하려는 수요가 줄어든 것과 함께, 온라인에서 중고 집기를 사고 파는 플랫폼이 커지면서 타격이 크다고 했다. 안 씨는 “우리가 3만 원에 팔고 있는 가구를 당근마켓에선 1만8000원에 팔더라. 옛날에는 하나 팔면 2만원도 남았는데, 지금은 한 개 팔아도 500원 남기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런 거리의 표정은 통계에서도 드러난다. 국회 안도걸 의원실(더불어민주당)이 국세청에서 받은 ‘최근 10년간 개인사업자 현황’ 자료에 따르면 자영업자들의 대표적인 창업 아이템인 소매·음식업의 합계 폐업률은 지난해 20.2%를 기록했다. 국세청이 세분하는 14개 업태 가운데 가장 높은 수치였다.
치솟은 농산물 물가…추석대목 실종
13일 오전 6시30분, 서울 송파구 가락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은 새벽 경매에서 사온 농산물을 트럭에 싣고 옮기는 모습으로 분주해 보였다. 하지만 이날 만난 상인들은 말했다. 겉으로는 바빠 보이지만, 속사정은 다르다고.
함모(55) 씨는 가락동에서 도소매업으로 7년 일하면서 올해만큼 힘든 적은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 물가가 치솟고 수요는 뚝 떨어졌다. “시금치 한 박스에 7만원 해요. 그러면 한 단에 8000원 받고 팔아야 하는데 누가 그 돈 주고 사겠습니까. 물건값은 너무 비싸고 장사는 안 되고 결국 안 팔린 채소들은 썩어서 버리는 일쑤예요.”
그는 “작년만 해도 가락시장은 추석 4~5일 전부터는 걷기가 힘들 정도로 물건을 사려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오늘은 한산하다”며 “고추 경매 때도 마트에서 1~2박스 가져가고 (매입하는) 사람이 없었다. 청양고추 한 박스가 10만원인데 누가 그걸 사겠느냐”며 말을 흐렸다.
농산물 고물가에, 높은 임대료와 인건비 부담에 지친 자영업자들의 발길이 끊어졌다. 도매시장을 찾는 소매업자들은 줄고 도매상들은 물건을 소화하지 못해 모두가 고민에 빠진 형국이다.
임모(54) 씨는 “과일 경매가 열리는 새벽 2시에 일을 시작해서 밤 9시까지 있는데 요즘은 새롭게 일할 사람을 구하기도 어렵다. 물건 값은 계속 오르는데 사람들은 비싸서 안 사고, 일하는 사람도 없고 장사가 될 리가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40년 넘게 가락시장을 지켰다는 홍모(71) 상인은 “경매에서 배추 한 망에 5만원까지 부르는 건 내 인생에서 두 번째다. 작황이 안 좋아서 배추 3분의 1은 그냥 버려야 하고 손님들도 물건을 사려다가 가격을 보고 돌아선다”고 상황을 전했다. 그는 “물가는 오르고 장사는 안 되고 이런 식으로 가면 더 버티기 힘들 것 같다”고 했다.
또 다른 채소 도매업자는 “사람들은 점점 일할 의욕을 잃어가는 것 같고, 장사해서 돈 버는 시기는 끝난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