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 헤리티지 여행⑧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매듭으로 유명한 고르디우스 왕의 아들이자 후대왕 미다스는 만지는 모든 것이 황금이 된다는 20여 가지 전설의 주인공이다. 그리고 요즘 대학생 익명 폭로장의 대명사 ‘대나무숲’ 괴담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의 장본인이기도 하다. 미다스의 황금 전설은 우리나라 춘향전 만큼이나 많다. 지어내고 또 지어낸 것이다.

미다스 유적탐방③] 파리올림픽의 프리기아 찬가 [함영훈의 멋·맛·쉼]
알렉산드로스의 침공과 지나친 미화, 실제 업적이 많은 미다스 왕에 대한 침략자들의 비하 등이 이어진 뒤, 고르디온을 떠난 프리기아인들은 서쪽으로 이동해 아이자노이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한다. 사진은 아이자노이 신전.

하지만 그가 묻혔다는 왕릉에 골드코스트 백사장의 고운 모래알갱이 한 개 만큼도 금(金)의 흔적이 전혀 없었는 점을 고려해 저간의 고증된 내용을 토대로 역사적으로 풀어보면, 미다스는 고르디온 주변 주석, 아연 광산을 채굴, 제련하는 지혜를 발휘하고, 일찌기 동전을 사용해 농업생산물, 섬유산업, 제빵기술, 도예기술 등으로 국부를 창출했던 것이다.

상징적 의미로 ‘황금’을 낳는 임금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동전의 세계 최초 발명은 이웃나라 리디아였지만, 상용화는 프리기아가 앞섰다.

그리고 동양에서 귀가 큰 것은 인품이 좋은 관상으로 해석되는데, 미다스의 이발사는 왜 대나무숲에 가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목놓아 외쳤는지, 상식적, 현실적으론 이해하기 어렵다.

바람이 불고 메아리가 있다고 하지만 대나무숲 폭로가 민가의 사람 귀에 전달됐을지 과학적으로 의문이 남는다.

미다스 유적탐방③] 파리올림픽의 프리기아 찬가 [함영훈의 멋·맛·쉼]
기원전 1600~1200년에 만들어진 고르디온 토기와 조각품

특히 미다스와 후대 프리기아 왕들은 백성들이 귀천 없이 살아가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결국 노예해방을 선언한다.

노예신분에서 해방된 자에게 모자를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훗날 고대 로마에서도 이 의식을 이어, 자유민이 된 노예는 프리기아 캡을 장대에 걸고 흔들며 기쁨을 표현했다.

이 ‘프리기아 캡’은 평등과 해방을 상징한다. 이는 2024 파리올림픽·패럴림픽의 마스코트 ‘프리주(Phryge)’가 되어 ‘차별 없는 세상’이라는 메시지를 지구촌에 전파하기도 했다.

미다스 유적탐방③] 파리올림픽의 프리기아 찬가 [함영훈의 멋·맛·쉼]
자유, 해방, 평등, 혁신의 의미를 담은 프리기아캡을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들라크로와 작품)이 쓰고 있다.

1830년 프랑스의 화가 들라크루아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 이 프리기아 캡을 썼다.

이 그림을 전후해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건설(1163년), 프랑스 대혁명(1789년), 에펠탑 건설(1887년), 100년전 파리올림픽 등 때에도 시민들이 프리기아캡을 썼다고 전해진다. 해방, 자유, 변혁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왕들이 일궈놓은 풍요의 시스템 위에서 자유민들은 더욱 열심히 일했다. 고르디우스-미다스 왕과 그 이후 전성기 시절에 경제가 살아나 모두가 잘 살게 되고, 평등 사회라는 이상국가를 건설하고 있었다고 이 지역 문화해설사들은 입을 모은다.

프리기아는 예술활동도 활발했다. 발굴된 작품을 보면, 사슴 부조, 날개 달린 독수리 머리의 사자몸이 유니콘이 물고기를 사냥하는 모습, 말에 탄 프리기아 전사의 위풍당당한 모습 등이다.

미다스 유적탐방③] 파리올림픽의 프리기아 찬가 [함영훈의 멋·맛·쉼]
선대왕 미다스의 업적에 편승해 도시브랜드를 높이려 도시이름을 왕의 이름으로 정한 미다스 시티(고르디온 남서쪽 120㎞ 지점에 있는, 높이 17m 조각작품

국력이 다소 쇠락해질 기미가 보이던 기원전 6세기에도 풍요를 기반으로 아름다운 예술작품을 만들었다. 고르디온에서 남서쪽으로 120km 떨어진 미다스시테에는 17m 높이의 바위를 잘라 표면을 평평하게 다듬은 뒤, 섬세한 조각작품을 남겼다.

너무 정치를 잘하고 백성을 풍요롭게 했으니, “미다스는 손 대면 금이 된다, 자기 몸도 금이 되어 죽었다. 금이 된 자기 몸을 되살리려 굴복했다”라는 비하 스토리의 골격이 제조되지 않았을까.

미다스 유적탐방③] 파리올림픽의 프리기아 찬가 [함영훈의 멋·맛·쉼]
고르디온 고분군

프리기아는 알렉산드로스 침략 때 멸망하지 않았다. 서쪽 아이자노이(Aizanoi)로 거점을 옮겨 로마제국 성립이후에도 명맥을 이어갔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선정된 아이자노이는 앙카라와 에게해변 이즈미르 딱 중간지점인 퀴타히아(Kütahya) 시내의 고대 유적지이다.

아이자노이 정착민들은 고르디온에서 선조들이 했던 대로, 경제 지혜를 발휘해 로마 시대에 작물을 재배하고 포도주, 양모를 생산해 부와 명성을 축적했다.

미다스 유적탐방③] 파리올림픽의 프리기아 찬가 [함영훈의 멋·맛·쉼]
2500~2800년전 프리기아 왕국에서 제작된 조약돌 모자이크 작품

아이자노이에는 세계 최초의 거래소 건물 마첼룸(Macellum)과 아나톨리아에서 가장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제우스 신전이 있다. 고르디우스 왕의 화폐경제(거래)와 제우스 신전(매듭)이 문득 오버랩된다.

고르디온의 사카르야 강 처럼, 이곳에도 개천이 흐르는데, 이름이 프리기아 계곡(Phrygian Valley)이다. 그들의 DNA는 미다스시절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퀴티히아에는 대지의 여신이자 신들의 어머니 키벨레(Cybele)에게 바친 야외 신전과 제단, 바위를 깎아 만든 수많은 무덤이 장관을 이룬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