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27일 신해철 트리뷰트 공연
싸이부터 이승환까지 13팀 출연
도전과 실험, 장르 넘나든 뮤지션
“위대한 작가이자 멜로디 메이커”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눈을 감으면 태양의 저 편에서 들려오는 멜로디, 내게 속삭이지 이제 그만 일어나 어른이 될 시간이야, 너 자신을 시험해봐 길을 떠나야해.” (넥스트, ‘해에게서 소년에게’)
노래를 마친 신화의 김동완은 “오늘이 기일이다. 우리 같이 해철이 형을 불러보자”고 말했다. 2014년 10월 27일, 마왕과의 이별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26년간 음악과 세계의 벽에 마주했던 그의 노래가 끊기던 그 날의 기억들이 음파가 돼 밀려왔다.
“해철이 형! 해철이 형 ! 해철이 형!”
지금은 중년이 된 그 시절 X세대 소년·소녀팬들의 함성이 터지자 김동완은 “여기 어딘가에서 해철이 형이 씩 웃고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신해철보다 10년을 더 살아내며 ‘세월의 무게’를 견뎌낸 넥스트 멤버들은 신해철을 대신한 후배 가수 홍경민·고유진·김동완과 함께 ‘디스트럭션 오브 더 셸’(Destruction of the Shell)을 시작으로 내리 10곡을 연주했다.
넥스트의 베이시스트 김영석은 “그가 없는 자리를 너무 그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자. 오늘이 기억에 남을 수 있도록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자. 해철이도 그러기를 바라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27일 인천 인스파이어 아레나에서 열린 신해철 트리뷰트 콘서트 ‘마왕 10th:고스트 스테이지’에서다.
가수 싸이부터 이승철까지, 밴드 엑스디너리 히어로즈부터 국카스텐, 전인권 밴드까지…. 이틀간 총 13팀의 선후배 가수와 밴드들이 다시 한 번 신해철을 노래했다. “라이브를 듣고 싶다면 콘서트장으로 가라”고 말한 생전 신해철의 이야기가 화면을 가득 메우자, 포효하듯 전자 기타와 강력한 드럼, 묵직한 베이스 사운드가 아레나를 울렸다.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됐지만, 마왕은 여전히 그 곳에 있었다. “10년, 20년 뒤에도 이 자리에 늘 서있을 것이기에, 여러분들은 언제든지 저에게 돌아오시면 된다”던 신해철의 말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오랜 팬들은 그의 곁으로 습관처럼 돌아왔다.
신해철의 음악이 세상에 처음 나온 것은 1988년이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멜로디언으로 만들었다”는 무한궤도의 ‘그대에게’가 대학가요제에 등장하면서다. 신해철이 작사·작곡한 이 곡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대한민국의 ‘대표 응원가’였다. 주먹을 불끈 쥐고 한 마음이 돼야 하는 곳에선 심장을 들끓게 하는 상승음이 연주됐다. 씩씩하게 뛰어오르는 음표는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로 만나 완벽한 궁합을 이뤘다. 노래에 맞춰 두 팔을 휘두르는 응원이 시작되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금세 한 마음이 됐다.
신해철을 수사하는 말들은 상당히 많다. 천재 싱어송라이터였고, ‘촌철살인’의 사회비평가이자 운동가였다. 때문에 ‘마왕’으로 불렸다. 이 많은 수사를 뛰어넘어 대중이 여전히 신해철을 기억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남긴 음악의 생명력 때문이다. 덕분에 1988년부터 지금까지, 지난 35년 동안 그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러도 늙지 않는 ‘진행형’ 아티스트다.
전문가들이 꼽는 신해철의 가장 큰 유산은 단연 뛰어난 멜로디의 ‘음악’이다. 임희윤 대중음악평론가는 “무수히 많은 명곡을 남긴 신해철은 자기만의 음색, 명징한 가사 전달력과 뛰어난 정서적 표현력을 갖춘 탁월한 멜로디 메이커였다”고 말했다.
작사, 작곡, 편곡에 악기 연주, 프로듀싱과 엔지니어링을 겸하던 뮤지션으로 수 십년 간 일궈온 음악 안에서 신해철은 천부적인 멜로디 작법으로 대중의 마음을 흔들었다. 임 평론가는 “신해철은 굉장히 곡을 잘 쓰는 싱어송라이터”라며 “멜로디와 가사 전달 등 모든 것이 명징하고, 단순하지만 품격있는 대중적 멜로디는 그의 노래에 생명력을 더했다”고 평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도 “장르를 가리지 않는 다양한 음악과 살아있는 멜로디를 들려준 아티스트”라고 했다.
대중적 감성을 건드리는 멜로디와 어우러지는 노랫말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정민재 평론가는 “신해철은 위대한 작가였다”며 “사랑 이야기만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1994년 ‘날아라 병아리’), 동성동본 커플에 대한 응원(1995년 ‘힘겨워 하는 연인들을 위해’) 등 우리 사회의 담론을 가져온 유일무이한 메이저 아티스트”라고 말했다. 임희윤 평론가 역시 “현학적 단어를 쓰지 않고 담백하게 가사를 전달하면서도 통속성이 적은 이야기를 다뤘다”고 했다.
“아침엔 우유 한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1993년, 넥스트 ‘도시인’ 중)로 때우고 말 없이 어딘가로 쫓겨가는 사람들을 그렸고, 변해가는 세상과 사람들을 고민(1995년 넥스트 ‘코메리칸 블루스’)했다. 임희윤 평론가는 “신해철의 방대한 음악세계를 관통하는 인장은 삶을 향한 치열한 질문이었다”며 “고도 성장을 일군 우리 사회가 간과한 모순, 서구식 생활 방식과 한국인의 정체성 사이에서 발생하는 긴장은 그의 평생의 화두였다”고 말했다.
이와 함께 신해철의 음악엔 오래도록 ‘덕질’을 해온 팬들만 알 수 있는 ‘일관된 스토리’도 품고 있다. “영웅이 되고 싶었던 꿈 많은 소년이 세계의 문을 지나 환멸을 느끼면서도 순수성을 안고 세상을 향하는 세계관” (임희윤 평론가)은 그의 노래를 떠받치는 서사다.
신해철의 음악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은 도전과 실험이다. 밴드 무한궤도로 시작해 솔로 활동을 하다 다시 밴드로 귀환했고, 대한민국 컴퓨터 음악(미디)의 선구자라 할 만큼 첨단의 음악 실험을 이어왔다. 테크노에 꽹과리, 장구 등 국악 사운드까지 접목한 것도 놀라운 시도였다. 장르를 넘나들며 음악 세계를 펼쳤고, 아름다운 미성부터 극단적 저음에 이르기까지 음악을 위한 실험은 계속 됐다.
정민재 평론가는 “절정의 인기에 있었을 당시 밴드 음악을 향한 열망으로 넥스트를 만들어 프로그레시브부터 감성의 록 사운드까지 들려줬고, 모노크롬(1999년 발매), 비트겐슈타인(2000년 데뷔한 신해철의 또 다른 밴드), 노댄스(1996년 윤성과 결성한 프로덱트 일렉트로닉 뮤직 듀오)를 통해 사운드 미학을 실현했다”고 말했다. 김도헌 대중음악평론가는 “1990년대부터 2010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음악적 시도를 하면서 대중음악계가 K-팝으로 재편될 때까지도 꾸준히 홀로 활약해왔다”며 “무수히 많은 곡들을 세상에 내놓으면서도 표절 논란 하나 없이 아름다운 음악세계를 구축하고 창작자, 후배 음악인들의 권리를 위해 굽히지 않고 투쟁한 음악가”라고 평했다.
신해철이 추구한 이상적 밴드의 본체는 넥스트가 오마주한 앨범 재킷에 힌트가 있다. 세계적인 밴드 퀸의 모습이었다. 그는 ‘프론트맨’으로 불리는 보컬만 조명받는 밴드가 아닌 연주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목받는 밴드를 꿈꿨다.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와 ‘아가에게’(1995)에서 네 멤버가 돌아가며 노래를 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임희윤 평론가는 “정규 앨범은 물론 라이브에서도 기타와 드럼 솔로 연주를 길게 넣는 시도와 네 멤버가 노래를 나눠 부르는 방식은 밴드 멤버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조명받고, 연주 음악의 정수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봤다.
신해철은 한국 대중음악사를 관통한 ‘영웅’으로 비견된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당시 빈소엔 1만 5000여명의 조문객이 다녀갔고, ‘대학가요제’에서 신해철을 발굴한 가왕 조용필은 빈소를 찾아 “훌륭한 뮤지션을 잃었다”고 애통해했다.
음악 환경이 달라지고 트렌드가 바뀌었지만, 신해철의 음악 유산의 생명력은 장구하다. 임희윤 평론가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중반 한국 대중음악계처럼 신선함의 무주공산에서 마음껏 활개치며 장검을 휘둘렀던 아티스트인 신해철과 같은 형태의 영웅이 나올 수 없는 음악 환경에서 그가 남긴 음악들은 끊임없이 발굴되고 지속될 것”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