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유명세로 왜 미술까지” 날선 시선

단순한 형태·강렬한 색채...14번째 전시

학고재 회장 “지평 넓히려 하정우 선택”

‘화가’ 하정우 “그림은 불안한 배우 생활의 위안”
학고재에서 열린 하정우의 ‘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전시 전경 [학고재 제공]
‘화가’ 하정우 “그림은 불안한 배우 생활의 위안”

“지난 2010년부터 15년 간 해마다 개인전을 열었어요. 안 좋은 이야기가 98% 정도 되는 것 같아요. 작가로 인정받고 안 받고는 저에게 큰 의미는 아녜요. 작업을 이어나가면 70대 할아버지가 됐을 때쯤 어떤 평가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요.”

‘배우 유명세로 미술 전시를 연다’는 곱지 않는 시선에 대해 묻자 화가로서 열네 번째 개인전을 연 배우 하정우(46·사진)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연기 활동을 잠시 쉰 올해 초부터 매일 오전 9시 작업실에 출근해 오후 6시까지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물감과 붓질의 흔적이 화폭에 차곡차곡 쌓였다. 영화 ‘비공식작전’(2023) 촬영 당시 모로코에서 5개월간 체류하면서 받은 강렬한 인상은 그의 작품세계에 녹아들었다.

16일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영화 촬영을 할 땐 호텔방 벽면에 캔버스 천을 걸어 놓고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며 “배우와 화가의 비율을 굳이 따진다면 5대 5인 것 같다”고 했다. 배우로서 단단한 자신감을 가진 그이지만, 안정적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지금에 대한 일말의 불안함도 읽히는 대목이다. 대학 졸업하고 불투명한 내일을 버티기 위해 시작한 하정우의 그림 그리는 시간 속에는, 그래서 뭉근한 위로가 숨어 있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그림 그리는 게 정말 재밌었다”면서 “지금까지 결혼 못 하고 자식 생각 없는 건 작품을 만드는 게 ‘아이 낳는다’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며 멋쩍은 듯 웃어 보였다.

이번 그의 전시에 미술계가 주목하는 건 단지 그의 배우 유명세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작품이 국내 대표 갤러리인 학고재에 걸렸다는 점이 굉장히 이례적이기 때문이다. 학고재는 미디어아트 거장 백남준과 여성주의 원로작가 윤석남 등 작품성 짙은 작가의 그림을 선보이는 36년 역사의 문턱 높은 갤러리다. 그런 곳에서 전업 작가가 아닌 배우 출신의 화가가 개인전을 여는 것은 이번이 최초다. 학고재는 내년 4월 미국 시카고에서 열리는 아트페어 ‘엑스포 시카고’에도 하정우의 작품을 출품할 계획이다.

‘왜 배우 하정우 전시였냐’는 질문에 우찬규 학고재 회장은 “수 년간 해외에서 만난 이들은 미술 전문가 보다 배우 송강호나 BTS RM의 전시평을 기대한다”며 “우리 미술이 지평을 넓히려면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이런 배경에서 지난 10여 년 이상 꾸준히 작업을 해 온 하정우의 작품을 눈여겨본 우 회장이 하정우에게 전시를 제안하게 됐다.

‘Never tell anybody outside the family’(가족 아닌 누구한테도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지 말라)라는 제목의 이번 전시에서는 ‘무제’ 이름이 붙은 신작 35점이 공개됐다. 전시명은 영화 ‘대부’(1973) 대사가 차용됐다.

단순화된 형태와 강렬한 색채가 두드러지는 한국의 탈 시리즈와 아프리카의 토속적 문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카펫 시리즈가 전시장 벽면을 가득 채웠다. 전시장에 들어서자마자 마주할 수 있는 200호짜리 그림은 하정우가 처음으로 그린 대작이다. 그는 “그래도 제가 손이 빠른 편이라 다 그리는 데 7주가 걸렸다”고 설명했다.

여태껏 독학으로 미술 공부를 한 하정우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 파블로 피카소, 앙리 마티스, 장 미쉘 바스키아 등 거장들은 “그림 잘 아는 형님들”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화폭에서 날렵하고 리드미컬한 바스키아 그림의 선과 생동감 넘치는 마티스 작품의 색감이 보인다. 그는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곳에서 한 달 정도 머무르며 작업만 하고 싶다”며 “그림이 좋아서 여기까지 왔고, 죽기 전까지 그림은 계속 그릴 것 같다”고 말했다. 전시는 11월 16일까지. 이정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