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성연진ㆍ양대근 기자]이달초 국내 모 대기업의 경영전략실에서는 지금껏 다뤄보지 않은 특정 안건이 회의 주제로 올랐다. 바로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를 어떻게 볼 것이냐였다. 국민연금이 올들어 대기업의 의사결정에 영향력을 행사는 사례가 눈에 띄게 늘었기 때문이다.
이 대기업의 이날 경영전략회의는 국민연금의 의결권 강화는 추세적 흐름이며 박근혜 정부의 최대 화두인 경제민주화와라는 큰 틀에서 해석해야한다는 나름의 결론을 내린 것으로 전해졌다.
국내 최대의 기관투자가인 국민연금의 행보가 심상치 않다.
공정거래위원회등 정부가 대기업의 ‘갑의 횡포’를 직접 차단에 나섰다면 국민연금은 주어진 의결권의 제대로된 행사를 통해 대기업 총수의 전횡을 막고 지배구조를 투명화하며 소액주주 보호에 적극 나서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에 재계와 금융계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과거 경제성장 과정에선 정부가 기업에 깊숙히 관여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못하지 않습니까. 국민연금이 의결권 강화를 통해 공식적으로 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움직임이 부쩍 강해지고 있습니다.”
국민연금의 최근 움직임을 놓고 재계 고위관계자는 이같이 전했다.
실제 대기업 총수들이 기업 내 의사결정을 쥐락펴락 할 수 없도록 국민연금이 제동을 거는 사례가 부쩍 잦아졌다. 국민연금이 올들어 이사 및 감사 선임 건에 반대 의결권을 행사한 경우가 모두 156건에 달한다. 지난 한해동안의 123건을 벌써 훌쩍 넘어섰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이재현 CJ그룹 회장, 이웅렬 코오롱그룹 회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등이 국민연금의 이사 선임 반대표를 받아야 했다.
특히 이같은 국민연금의 달라진 행보는 법무부가 이달 입법예고한 상법개정안과 맞물려 주식시장을 통한 대기업 견제가 더욱 힘을 받게됐다.
상법개정안은 소수 주주들의 이사 선임권을 강화하고, 자산 2조원 이상 상장사는 총수 그늘 아래 대표이사들이 이사직을 겸직하지 못하도록 집행과 감독을 분리하는 내용 등을 담고 있다.
남재우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재계 입장에선 최근 대기업 대표이사의 과도한 겸직을 반대하는 의결권 행사가 잦다고 느낄 수 있지만 이는 주주가치 보호 측면에서 일관되게 진행됐던 사안”이라며 “과거보다 의결권 행사 지침이 강화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금융당국도 국민연금의 투자 활성화와 지분 확대를 통한 의결권 강화에 간접적으로 힘을 보태고 있다. 금융위원회가 추진 중인 ‘10%룰’(국민연금이 10% 이상 보유한 종목에 대해 단 한 주를 사고 팔아도 5일 내 보고해야 하는 규제) 이 완화될 경우, 현재 보유 종목에 대한 지분이 평균 7%인 국민연금의 지분 확대가 이뤄질 전망이다.
한편에서는 선진국의 공적 연기금이 행사하는 다양한 주주 권한을 참고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미국의 캘리포니아공무원 연금은 최근 주주의 지지를 받지 못한 현직 이사를 지목해 개선을 요구했고, 단 0.26%의 지분을 가진 애플에 주주 과반수가 찬성해야 이사 선임이 가능한 ‘다수 결의제’ 도입을 요구해 관철시키기도 했다. 미국과 네덜란드 연기금이 투자 기업 가운데 문제 기업의 목록을 공개하는 ‘포커스 리스트’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 방안으로 고려되기도 한다.
다만 국민연금의 의결권과 주주권 강화의 적정성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남는다. 이른바 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깊숙이 개입하는 ‘연금 사회주의’로 옮아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재계는 특히 국민연금의 이사 선임 반대 의결권 행사 기준 가운데 하나인 ‘과도한 겸임으로 충실한 의무수행이 어렵거나’ 등의 부분은 자의적 해석이 가능해 남용의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국내 대기업의 한 임원은 “지배구조 개선 등 경제민주화의 큰 흐름에는 동참하겠지만 기업의 효율성과 자율성을 해칠 수 있는 부분은 우려스럽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