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정진영 기자] 조로현상이 심각한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가수 인순이는 특별한 존재다. 가수의 대표곡, 특히 중견급 이상 가수의 대표곡 이름이 바뀌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인순이를 왕년의 히트곡 ‘밤이면 밤마다’를 부른 흘러간 가수로만 여기는 사람들은 드물다. ‘거위의 꿈’ ‘아버지’ ‘친구여’ 등 인순이란 이름으로부터 떠올릴 수 있는 노래는 명배우의 필모그래피처럼 다채롭다. 90년대 후반부터 나이테의 수를 늘리는 대신 음악적 외연을 넓혀온 인순이는 이제 명실공히 동시대와 호흡하는 현재진행형 가수다. 최신 일렉트로닉 사운드부터 강렬한 비트까지… 4년 만의 정규 앨범인 18집 ‘엄브렐러(Umbrella)’에도 추억팔이는 없었다. 지난 22일 오후 서울 청담동 소재 연습실에서 인순이를 만나 새 앨범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인순이는 “올해로 데뷔 35주년을 맞았지만 세월의 숫자에 짓눌린 앨범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며 “앨범에 담긴 음악이 젊은데다 이전보다 편안한 느낌을 주기 때문에 가벼운 창법으로 부르려고 노력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거위의 꿈’ 편곡으로 인순이와 인연을 맺은 이현승 작곡가가 17집 ‘인순이’에 이어 18집의 프로듀싱을 맡아 제작을 진두지휘했다. 딘딘ㆍ지타(ZTA)ㆍ앙리 등 래퍼부터 로맨틱펀치 같은 록밴드까지 다양한 장르의 후배 뮤지션들이 참여해 대선배와 합을 맞췄다. 앨범에 담긴 곡은 총 14곡으로 타이틀곡 ‘아름다운 걸(girl)’을 중심으로 한 댄스곡과 ‘우산’ㆍ‘내가 노래하는 이유’ 등 발라드로 이뤄져 있다. 뮤지컬을 닮은 발라드 ‘꽃처럼’ㆍ‘딸에게’ 등 지난 5월에 발매된 미니앨범 ‘나무’의 수록곡들도 이번 앨범에 다시 실렸다. 지난 8월 공모전을 통해 선정한 인순이의 모습을 담은 일러스트로 꾸민 앨범 재킷과 속지 또한 파격적이다.
인순이는 “발라드와 댄스를 막론하고 히트곡들 모두 무겁고 강해 고민이 많았다”며 “힘을 뺀 목소리를 담은 미니앨범 ‘나무’는 18집의 예고편이었다. 나도 팬들도 잠시나마 물 흐르듯 쉬어갈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이번 앨범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곡은 타이틀곡 ‘아름다운 걸’이다. 이 곡은 이현승 작곡가와 미국인 작곡가 도미닉 로드리게즈(Dominique Rodriguez)로 구성된 프로듀싱 팀 레드로켓(Red Rocket)의 작품으로 최신 팝을 연상케 하는 세련된 사운드와 편곡으로 놀라움을 준다. 여기에 인순이의 탁월한 보컬과 꿈을 포기한 여성들을 응원하는 내용의 가사는 팝스타 셰어(Cher)가 지난 6월에 발표한 싱글 ‘우먼스 월드(Woman’s World)’를 떠오르게 만든다. 지난 1998년 50대의 나이에 일렉트로닉 댄스곡 ‘빌리브(Believe)’로 전 세계적인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셰어의 행보는 1996년 앨범 ‘더 퀸 오브 솔(The Queen Of Soul)’에서 박진영과 함께 한 댄스곡 ‘또’를 히트시킨 이후 인순이의 행보와 적잖이 닮아있다.
인순이는 “동년배 여성 가수들의 꿈은 패티김 선배처럼 멋진 드레스를 입고 큰 무대에 서서 대곡을 부르는 것이었고 90년대 중후반 마흔을 맞은 나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었다”며 “당시 이 같은 고민을 우연히 박진영과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는데 극구 만류하며 내게 곡을 주고 앨범을 만들어주다시피 했고 그 앨범에서 히트곡 ‘또’가 탄생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그는 “내가 처음 노래를 배울 땐 정박에 진성(眞聲)으로 부르는 것이 정석이었지만 최신 음악은 가성(假聲)을 잘 활용하고 싱커페이션(당김음)이 중요했기 때문에 굳어진 습관을 바꾸고 적응하는 것이 쉽진 않았다. 이번 앨범에선 30년 동안 써온 발성까지 바꾸는 시도를 했다”며 “후배들에게 자신 있게 내밀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다. 다행히 늘 좋은 사람들이 곁에 있었고 팬들의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나는 행운아”라고 말했다.
분에 넘치게 받은 사랑을 베풀 곳을 찾던 인순이는 지난 4월 강원도 홍천에 다문화학교 ‘해밀학교’를 개교했다. 인순이는 이 학교의 이사장 겸 교장을 맡고 있다.
인순이는 “내 어린 시절은 미래에 대한 꿈이라는 것을 꾸는 것조차 어려울 정도로 막막한 시간이었다”며 “다문화 가정 출신 아이들이 겪는 정체성 혼란을 이해할 수 사람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이들에게도 더욱 설득력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현재 학생 수는 여학생 9명과 남학생 1명 등 총 10명이고, 인근 부대의 장병들이 자원봉사로 선생 역할을 해주고 있다”며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단 몇 명의 아이들에게 만이라도 희망과 용기를 주고 싶다”고 강조했다.
인순이는 다음달 4ㆍ5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평화의광장 콘서트를 시작으로 앨범 발매 기념 전국 투어에 들어간다. 전국투어 이후엔 미국(뉴욕ㆍ워싱턴), 호주(시드니), 중국(베이징) 등을 도는 해외투어도 예정돼 있다. 공연 제목은 ‘삼삼오오(三三五五)’로 데뷔 35주년이라는 무게감을 지우는 유머가 돋보인다. 인순이는 4년 만에 공연의 모든 내용을 바꾸고 팬들 앞에 나설 예정이다.
인순이는 “35주년이라는 타이틀이 어깨를 누르면 내가 펼치고 싶은 것을 제대로 못 할 것 같았다”며 “어차피 움직이지 못 할 날은 오지 말라고 해도 오게 돼 있기 때문에 그 전까지는 결코 세월의 무게에 눌려 살지 않을 것이다. 지금도 내 열정의 부피는 30대이며 마지막까지 아름다운 여자로 남고 싶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