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진폭이 큰 ‘종려’ 연기…입체적 인물
김상만 감독 “배우들 연기가 작품 매력”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결국 종려는 어쩔 수 없는 양반이었다. 겉으로는 천영(강동원 분)과 나눈 우정도, 나눠준 마음도 호의를 ‘베푼’ 것이다. 나루터에서 갑자기 일그러진 종려의 표정은 특권의식을 가진 사람으로 돌아오는 순간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하니 그렇게 나온 것 같다.”(박정민)
올해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전,란’에서 주인공 이종려를 연기한 박정민 배우와 메가폰을 잡은 김상만 감독을 14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박정민이 연기한 종려는 김상만 감독조차도 “표현하기 쉽지 않은 인물”이라고 말할 정도로 감정의 결이 크게 여러 번 바뀌고, 복잡한 내면을 얼굴 위로 끄집어 올려야 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다.
김 감독은 “박정민씨가 캐릭터가 너무 힘들다고 해서 같이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캐릭터라고 생각해보라고 했다”며 “결과적으론 제가 생각한 것 보다 더 잘 표현해준 것 같다”고 언급했다.
이에 대해 박정민은 “사실 그 말이 더 어렵다. 셰익스피어 연극을 해본 적이 있는데 잘 모르겠었기 때문”이라고 농담으로 받았다.
강동원 배우가 연기한 또 하나의 주인공 ‘천영’은 면천되어 다시 평민이 되는 게 목표인 단순한 인물이고, 또 주어진 사회 시스템 전체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 주어진 틀 안에서 그저 자신의 위치를 되찾고 싶을 뿐이다.
반면 종려는 그중에서 계속 새로운 인물로 변해가는 바람에 조금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이에 대해 김 감독은 “종려가 표면적으로는 갑자기 돌변하지만, 사실 내면 속에 얼마나 많은 고민과 방황이 있었을 지 상상해 볼 수 있지 않느냐”며 “어릴 때야 천영에 대한 순수한 호감이었겠지만, 자라면서 주변에서 ‘양반과 천민이 어울려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그게 쌓이고 쌓이다가 어느 순간 트리거가 되어 폭발했다고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극 후반부에 종려가 오해를 풀고 나서 단번에 천영을 용서하고 미안하다고 고백하는 장면에 대해서도 “종려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천영이 자신의 가족을 죽였을 리 없다는 것을 직접 확인 받고 싶었을 것”이라며 “그러니 천영을 죽이지 말고 살려서 데려오라고 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종려의 액션은 몸만 잘 써서는 안됐다. 표정도 잘 쓰는 연기가 되어야 했다. 박정민은 “액션팀에 따로 요청을 했다. 감정 연기를 할 수 있게 동작을 수정하거나 좀 더 울분 섞인 액션을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고 말했다.
박정민은 상대 배우로 인해 준비해갔던 캐릭터의 설정을 뒤엎기도 했다. 종려는 극 중 무려 7년간 선조를 보필한 무사다. ‘전,란’에서 선조를 연기한 차승원은 ‘역대급 조선왕’을 연기했다는 반응이 나올 정도로 독특한 연기를 보여줬다.
박정민은 “처음 계획은 선조에게 조금 맞서는 연기를 하려고 했다. 그런데 차승원의 선조를 보고 나니 다 수정해야겠더라”며 “어떻게 행동할 지 예측이 안되고, 말대꾸를 하면 죽여버릴 것 같았다. 7년을 붙어서 수행을 했다고 해도 조금이라도 맘에 안 들면 모함해서 제거할 것만 같았다”고 말했다.
김 감독도 차승원의 선조에 대해서 “이 인물은 본인이 왕이라는 것이 너무 공기와 같은 것이라서, 백성들이 나한테 왜 반역을 하지, 도무지 이해를 못한다는 것을 눈물로 잘 보여줬다”며 “특히 피난길에 산 위에서 경복궁이 불타는 장면을 보면서 ‘아니~왜?’라며 순진무구하다고 할 정도의 표정을 보여줬을 때는 정말 놀라웠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배우들의 연기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진선규 배우가 연기한 김자령도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표준어를 쓴다. 그런데 대본리딩 때 진 배우가 모티브가 된 실제 인물인 김덕령 의병장의 고향이 전라도라는 점에서 힌트를 얻어 사투리를 쓰겠다고 한 것”이라며 “약간 기품이 느껴지는 사투리를 쓰면서 도리어 시골에서 공부만 한 유학자 느낌을 잘 살린 것 같아 너무 좋았다”고 밝혔다.
박찬욱 감독의 시나리오 덕도 톡톡히 봤다. 김 감독은 “캐릭터들을 너무 잘 그려줬다. 사람들은 본인이 속해있는 사회 시스템에서 자기 위치를 바탕으로 각자 사고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일종의 계급의식이라고 보는데, 계급의식 속에서 각자가 시대를 대하는 게 시나리오에 잘 녹아있었다”고 말했다.
박정민도 “이 영화를 처음 제안 받았을 때부터 확실히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어서 좋았다”며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메시지를 갖고 있는 영화를 좋아하는데 이 영화는 심지어 (메시지에) 동의가 되는 영화”라고 했다.
“인간사회와 넓게 보면 숨쉬고 있는 모든 것에는 계급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법적으로는 계급이 없어지고 자유가 보장된 이 사회에서 좋은 구성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떤 리더가 필요한가, 어떤 가치를 지니고 살아야 하는가를 이 영화가 현 시점에서 사람들에게 생각할 수 있는 질문을 던져주는 것 같아서 좋았다.”
영화가 끝을 맺고 엔딩 크레딧이 오를 때 또 한번 신선한 충격을 받는다. ‘나오는 사람들’이 등장 순으로 나오면서 권혁(정여립 역)부터 시작, 윤우(정옥남)와 차승원(선조) 등이 나온다. 먼저 등장할 법한 주인공인 강동원(천영)은 열한번 째에, 아역이 먼저 등장한 박정민(이종려)은 한참 뒤늦게 나온다. 박정민은 “우리나라에서 보기 쉽지 않은 크레딧”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