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190개국 공개 넷플릭스 영화 ‘전,란’
액션보다 배우들 얼굴 표정 연기에 긴장감
세계관 최강자 ‘천영’役 강동원 “반전은 없다”
[헤럴드경제=이민경 기자] 2시간 여의 러닝타임 중 액션신이 나올 때가 오히려 잠깐 숨을 고르는 시간이다. 인물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대화를 주고받을 때가 더 긴박하다. 넷플릭스 영화 ‘전,란’은 ‘액션’과 ‘전쟁’ 장면보다는 오히려 혼란스러운 임진왜란의 시기, 각양각색의 인간 군상을 탐구하는 ‘드라마적 장면’에 더 몰입이 됐다. 영화의 제목이 ‘전란(戰亂)’이 아니라 ‘전’과 ‘란’ 사이에 ‘쉼표’를 넣어 끊었는데, 전쟁에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신분제가 흔들리는 혼돈을 담아내려는 제작자의 의도가 담겼다.
오는 11일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전,란’은 왜란이 일어난 혼란의 시대, 함께 자란 조선 최고 무신 집안의 아들 종려와 그의 몸종 천영이 선조의 최측근 무관과 의병으로 적이 되어 다시 만나는 이야기를 그렸다.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작품으로서는 처음으로 지난 2일 개막한 제29회 부산국제영화제의 개막작으로 선정된 작품이다.
작품에선 최종 빌런이 언뜻 보면 조선인들의 코를 베는 일본 장수 ‘비귀’(겐신·정성일 분)인 듯 보이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조선 백성의 어버이인 임금, 선조(차승원 분)가 더 큰 분노를 일으킨다.
하지만 차승원이 연기한 선조가 이 다음 장면에선 어떤 표정과 대사 톤을 보여줄지 계속해서 기대하게 만든다. 영화는 오프닝에서 정여립의 대동계(양반과 천민을 따지지 않고 누구나 평등하게 참여한 무술 연마 조직)를 소개한다. 역도 정여립은 현장에서 금군의 칼에 목이 관통당해 죽었지만, 선조는 잔당을 직접 궁으로 불러 추국하는 열정을 보인다.
선조는 정말로 임금과 노비가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느냐고 혀가 붙어있는 신하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신하들은 머리를 땅바닥에 찧으며 ‘천부당 만부당하다’고 선조를 위로하지만, 그는 이미 아주 깊은 곳에서 상처를 입었다. 분노일까, 슬픔일까. 선조의 한 쪽 뺨을 타고 흐르는 한줄기 눈물은 그가 왕의 피는 백성의 피와는 결코 같지 않다고 믿는 ‘확신범’임을 단박에 알려준다.
여느 영화에서처럼 ‘무겁고 비장한 조선 임금 캐릭터가 하나가 더 탄생하겠구나’ 싶었지만 오산이었다. 말을 타고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가마를 타고 뒤따라 오던 중전이 가마 밖으로 튕겨져 나오자 “그러게 말을 타라니까”라며 이죽거린다. 불타는 경복궁을 내려다 보면서는 세상 경박한 말투로 “저게~ 뭐야?”라고 묻는다. 피난길에 받은 수라상 앞에서 투정을 부리는 모습이나 전쟁 직후 경복궁을 600칸이 아닌 6000칸으로 새로 짓자고 박박 우기는 장면에서 욕심이 그득한 차승원의 얼굴이 스크린 가득 잡히면, 말 그대로 ‘명치를 세게 치고픈’ 충동이 든다.
열등감과 질투에 휩싸인 선조가 구국의 영웅인 이순신 장군이 살아서 돌아오길 원하지 않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전,란’에는 수군 대신 내륙에서 왜구에 맞서 싸운 의병과 이들을 통솔한 김자령 장군(진선규 분)이 등장한다. 전쟁이 끝나고 공을 세운 의병들을 면천시키고자 김자령이 도성에 상소문을 가지고 도착하자 선조는 “순신은 죽었는데 자령은 왜 살아있는가”라며 역사가 공인한 소인배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자령은 실제 전라도 지역에서 활약한 양반 출신 김덕령 의병장을 모티브로 한 창작 인물이다. 진선규는 고증에 걸맞게 느릿한 전라도 사투리를 탑재했을 뿐인데, 이게 이상하게 신선하다. 미디어에서 영웅은 주로 표준어를 쓴다. 범동누님(김신록 분)처럼 신분이 낮은 백성들이 사투리를 쓰는 것은 지극히 예상한 바이나, 갓을 쓴 장군이 사투리를 쓰는 게 영 생소하다. 심지어 그가 아주 비장한 절체절명의 상황에 처했을 때도 같은 말투를 써 캐릭터가 일관성을 유지했다.
인물의 구도가 선과 악으로 대체로 선명하게 나뉜 반면, 이종려(박정민 분)는 영화 내내 엎치락 뒤치락 수시로 변하는 감정을 표현한다. 초반에는 노비이자 동무인 천영(강동원 분)을 정말로 아끼고 안쓰럽게 여기는 세상물정 모르는 양반 도련님의 얼굴을 보여주다 선조의 피난길 도중 식솔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엔 흑화해 나룻배에 오르려는 피난민들의 손을 가차 없이 절단해버리며 살기어린 눈빛을 장착한다. 극중 가장 입체적인 인물이라 할만 하다.
천영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한 종려의 흑화가 도대체 언제 깨질지 기다리다 조바심이 날 때 쯤 다행히도 이 둘에게 해후의 시간이 주어진다. 천영이 제 아내를 죽인 것이 아니란 오해가 풀리자 박정민은 순식간에 얼굴을 바꾼다. 눈에서 살기가 자취를 감추고 자책과 후회만이 남는다. ‘수 년간 쌓아온 원한의 감정이 한 순간에 모래성처럼 무너질 수 있을까’라는 의심이 들려는 찰나, 본디 성정이 여린 도련님이라는 설정과 배우의 연기로 납득할 수 있었다.
‘전,란’은 원 톱 주인공이 나오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강동원이 연기한 천영이 굳이 꼽자면 프로타고니스트 주인공이다. 천영은 양민이었지만 궁핍한 부모로 인해 노비로 전락한 인물로, 면천해 다시 양민으로 사는 것이 삶의 동력이다. 천영에겐 끊임없는 시련이 닥친다. 아버지, 김자령, 의병 동지들을 차례로 잃으며 주체할 수 없는 분노로 인해 강동원의 눈동자는 극이 진행될 수록 더 심하게 흔들린다.
강동원은 ‘전,란’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작 기자회견에서 “천영을 연기하면서 처음으로 노비 역할을 맡아 자유로울 수 있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강동원은 그냥 노비가 아니었다. 한번 보면 남의 검법을 제 것으로 체화하고, 왜적들을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청의 검신’인 그가 단기필마로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영웅에 어울리는 음악이 깔린다. 노비 역을 해도 멋진 강동원이라 오히려 신선함은 다소 반감되고,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생각이 스친 것이 사실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강동원, 박정민, 정성일 세 배우가 서로가 서로를 베고자 해무 짙게 깔린 해변에서 싸우는 액션신은 합이 잘 맞았다. 롱테이크로 찍은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을지 가늠된다. 하지만 잘 만들어진 액션과 검술의 고수들이 한갓지게 서로 농을 주고 받으며 결투하는 액션 장면들이 특별히 긴장감을 주진 못했다. 다만 어서 이 화려한 액션신이 끝나고 카메라가 인물들의 감정이 펼쳐지는 얼굴을 잡아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큰 아쉬움은 이 영화를 다시 볼 때는 스크린으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김신록 배우가 부국제 간담회에서 “넷플릭스 영화로 전세계 190개국에 오픈된다고 들었다. 여러 나라에서 우리 영화를 사랑해주면 이게 스크린으로도 이어질 것”이라며 “넷플릭스 영화 뿐만 아니라 극장에 걸리는 영화도 활력을 얻을 것이다.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좋은 평가와 관심을 얻었으면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