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휘자 정명훈과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
원조 ‘라 트라비아타’로 축배의 시간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무대에 화사한 꽃이 피었다. 오페라와 발레가 열릴 땐 피트 안으로 숨었던 수십여 명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무대로 올라왔다. 기존 악단의 콘서트에선 볼 일 없는 거대한 샹들리에가 오른쪽과 왼쪽 천장에서 눈부시게 빛이 났고, 포디움 옆으론 우아한 응접실 의자가 놓였다. 세계적인 지휘자 정명훈과 그를 사랑하는 이탈리아의 유서깊은 악단인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를 선보이는 날이었다.
이날의 공연은 여러모로 특별했다. 마에스트로 정명훈의 오페라를 오랜만에 한국에서 만나는 자리인 것은 물론 1792년 개관한 라 페니체 극장 역사상 가장 중요한 지휘자로 손꼽히는 그와 악단의 만남이라는 것도 그렇다. 게다가 1855년 초연한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는 라 페니체 극장에서 초연했다. 모든 면에서 최초이자 원조인 데다 각별한 의미까지 부여할 수 있는 콘서트가 바로 지난 4일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이 오페라였다.
원조 K-클래식 스타인 정명훈 지휘자가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무대 위로 걸어나왔다. 천천히 인사를 하고 뒤돌아서자 예술의전당은 어느새 1800년대 중반의 어느 시기로 모습을 바꿨다. 유려한 선율과 함께 프렐류드로 스타트를 끊자, 성악가들이 한 두명씩 무대로 등장해 축배를 들었다.
기존의 오페라와 달리 별다른 장치와 화려한 무대 없이 진행되는 콘서트 오페라의 특성상 성악가들의 동선도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조금 낯선 풍경이 연출됐다. 한정된 무대, 비좁은 동선으로 인해 성악가들은 포디움에 선 정명훈 지휘자의 앞을 가로질러 이동했다. 그 장면을 마주하는 것조차 무척이나 이질적이었다. 하지만 낯설었던 것도 잠시. 관객들이 이 콘서트 오페라에 젖어들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정명훈과 라 페니체의 호흡은 인상적이었다. 강력하고 절도 있는 지휘 제스처로 악단을 컨트롤 하자 빈틈없이 쫀쫀한 음악들이 흘러 나왔다. 명실상부 최고의 ‘오페라 전문가’인 정명훈의 무대는 보통의 콘서트와는 완전히 달랐다. 악단과 성악가들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으면서도 압도적인 카리스마로 음악의 기승전결을 만들었다. 성악가들의 아리아가 없이도 감정의 진폭과 스토리의 핵심,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복선까지 제시하는 음악이었다. 자유로우면서도 탄력있는 음악의 마법에 성악가들의 음성은 맛있는 조미료로의 ‘화룡정점’ 역할을 했다.
‘라 트라비아타’의 주인공인 소프라노인 올가 페레차트코는 1, 2막 무대를 이끄는 주역이었다. 이 시간은 페레차트코의 ‘하드캐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여린 감성으로 연기에 더 집중한 부분도 관객들이 콘서트 오페라의 한계를 극복하고 몰입할 수 있는 지점이었다. 비올레타의 이름처럼 보랏빛 조명이 무대 뒤편을 가득 메울 땐 ‘라 트라비아타’의 마법에 홀린 기분이었다. 특히 3막에서 완전히 힘을 빼고 부르는 ‘지난날이여 안녕’과 그 위로 흐르던 현악기의 여린 스타카토는 아름다움의 결정체였다. 알프레도 역을 맡은 테너 존 오스본과 아버지인 제르몽 역의 강형규는 ‘성량의 진수’를 보여줬다. 특히 강형규는 오페라극장의 4층 객석까지 뚫고 나가는 묵직하고 시원시원한 발성으로 좌중을 압도했다.
뛰어난 개인기의 세 주역들이 아리아를 마칠 때마다 정명훈은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보냈고, 그 어느 공연보다 역동적이면서도 여유로운 자신감은 관객들에게 ‘축제’의 시간을 선물했다. 순식간에 사라진 두 시간여의 공연을 마친 뒤에 관객은 우레와 같은 함성과 박수를 보냈다. 정명훈 지휘자가 무대에서 인사를 할 때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발을 구르며 그에게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정명훈과 라 페니체의 공연은 이후에도 이어진다. 8일과 9일, 10일엔 아트센터인천 콘서트홀과 세종예술의전당, 대구콘서트하우스 그랜드홀에서 모차르트의 ‘피아노협주곡 23번’과 프로코피예프의 ‘로미오와 줄리엣’ 등을 연주한다. 다음달엔 라 페니체 오케스트라가 속한 이탈리아 라 파티체 극장에서 오페라 ‘오텔로’를 함께 공연한다.
도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