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알타미라 동굴 벽화]
‘속 빈 강정’인 줄 알았던 곳
구석기 후기 벽화 깜짝 발견
아무도 믿지 않고 외려 논란
밝혀진 진실…‘진짜’ 증명돼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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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설마, 진짜 그런 게 있겠어
"아빠. 여기 소가 있어요!"
웬 잠꼬대 같은 말인가. 1879년, 11월의 어느 날. 스페인의 변호사 겸 고고학자인 마르셀리노 데 사우투올라는 여덟 살 딸의 외침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마리아. 이렇게 좁고 어두운 땅속에선 소가 살 수 없단다." 등불을 든 사우투올라가 딸을 타일렀다. 딸의 목소리가 멀리서 메아리처럼 울렸듯, 그의 대답 또한 공간을 메우며 반복해 귓가에 닿았다.
이날도 그가 본 건 깨진 돌과 동물 뼛조각뿐이었다. 이번 성과 또한 가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기대한 일 이상의 특별한 발견은 역시나 없었다. 곧 해가 질 것이었다. 몇 날 며칠에 걸친 동굴 탐사도 이제 매듭지을 시간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북부 칸타브리아 지방 칸타브리아주에 있는 알타미라(Altamira) 동굴 안을 돌고 있었다.
이곳은 지금으로부터 10년도 더 과거인 1868년에 한 사냥꾼이 찾은 지대였다. 당시 사냥꾼은 겅중겅중 뛰는 개와 함께 오늘의 사냥감을 찾고 있었다. 그러다 언덕을 먼저 넘은 개가 곧장 무언가를 본 듯 매섭게 짖기 시작했다. 사냥꾼은 잰걸음으로 달려가 녀석과 나란히 섰다. 그런데, 막상 올라와보니 개는 사냥감을 보고 있지 않았다. 녀석이 찾은 건 흙에 파묻혀있는 동굴의 들머리였다. 사냥꾼은 이날 발견을 인근 마을 유지(有志)에게 귀띔했다. 그 유지가 지금 딸과 함께 동굴을 조사하는 사내, 사우투올라였다. 사실 그때만 해도 사우투올라는 사냥꾼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 주변으로 이미 동굴 입구 비슷한 게 수백, 수천 개가 있었기에 더욱 시큰둥했었다.
사우투올라가 이곳에 첫 발을 디딘 해 또한 1875년께였다.
사냥꾼의 보고 후 7년도 더 흐른 시점이었다. 동굴의 총길이는 296m, 높이는 2~6m 정도였다. 전체적으로 습하고 아담한 공간이었다. 그때도 석기와 동물 뼈를 몇 개 찾긴 했다. 언뜻 봐선 언제, 어디서, 누가 쓴 건지 알 턱이 없으니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다. 예상대로 별것 없다고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그 동굴의 존재를 밀어냈다.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온 그는 1878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만국박람회 관람 중 충격적 장면을 접했다. 한 전시장에서 신줏단지처럼 대접받는 유물 몇 점을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별 볼 일 없던 눅눅한 곳에서 찾은 물건들과 닮았던 것이다. 그가 뒤늦게 알타미라 동굴에 대한 본격적 탐사를 결심한 이유였다.
딸의 외침에…동굴 속 ‘진짜 소’를 보다
1년 뒤 사우투올라는 유명 고고학자였던 마드리드 대학의 후안 빌라노바 교수와 그 동굴을 다시 찾았다.
이들은 돌 부스러기와 뼛조각 말고 보다 완전한 물건을 찾고 싶었다. 이를테면 형체와 용도를 알아볼 수 있는 화살촉 내지 그릇 같은 게 나오기를 기대했다. 만국 박람회에서 눈여겨본,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춘 그런 물건을 바란 것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땅을 파본들 쾌재를 부를 만한 건 보일 기미도 없었다.
그러던 1879년 늦가을의 어느 날, 사우투올라는 딸이나 한번 데려온 것이었다. 꼬마 녀석은 속 빈 강정같은 이곳이 마냥 신기한 듯 자유롭게 뛰어다녔다. "아빠, 여기서 소를 볼 수 있어요. 진짜예요. 어서 와보세요!" "아니, 이 좁은 동굴에 어떻게 소가…." 사우투올라는 딸의 얼토당토않은 말에 또 투덜대려다가 참았다. 오늘 또한 수확이 없으니, 차라리 아이의 상상 놀이에 장단이라도 맞춰주기로 한 것이었다. 그는 삽과 등불을 다시 쥐었다. 딸이 있는 통로 안쪽을 향해 움직였다. 코너를 도니 아이가 자기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그래. 소가 어디 있니?"
사우투올라의 말에 딸은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사우투올라는 등불을 크게 들어올렸다. 그런 다음 그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하마터면 손에 든 모든 걸 떨어뜨릴 뻔도 했다. "보세요. 소가 있잖아요." 아이가 윙크했다. 그랬다. 거기에는 진짜 소가 있었다. 정확히는, 진짜 소 같은 그림이 잔뜩 그려져 있었다.
그때 누가, 어떻게, 무엇 때문에 그렸는가
우뚝 선 소, 쓰러지고 있는 소, 상처를 입은 듯 몸을 잔뜩 웅크린 소….
동굴에선 이러한 들소 그림만 열아홉 개가 있었다. 멧돼지 세 마리, 말 두 마리, 이리 한 마리를 묘사한 그림도 각각 볼 수 있었다. 이렇게 따지면 작품은 모두 스물다섯 점이었다. 이 옛 그림들은 그려진 방법도 놀라웠다. 우선 목탄으로 검은 선을 그어 스케치를 했다. 단순히 윤곽에 그치지 않고 눈동자와 갈기, 발굽까지도 표현했다. 붉은색, 황토색, 검은색 등 천연 안료도 잔뜩 칠해져있었다.
몇몇 그림에선 3D 그래픽 같은 입체감도 느낄 수 있었다. 색의 진하기를 달리해 나름의 명암법을 구현했다는 점 또한 인상적인 지점이었다. 크기까지 상당했다. 몇몇 그림은 실제 동물 모습을 그대로 옮긴 양 우람했다. 이런 부분을 다 관찰할 수 있게끔 보존 상태 또한 아주 훌륭했다.
사우투올라는 그림이 주는 압도감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당장 그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보는 이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약 1만8500~1만4000년 전인 구석기 후기 시절에 그려진 예술품이었다.
당시에는 극소수의 네안데르탈인과 압도적 우세에 있던 크로마뇽인(호모 사피엔스)이 최후의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금 시선에선 인간보다 짐승에 가깝게 여겨지던 무리가, 알고 보니 이토록 찬란하게 예술 활동을 펼친 것이었다.
이날 이들의 발굴은 인류사를 통틀어서도 손에 꼽힐 만큼 위대한 발견이었다.
사우투올라가 마주하는 동굴 벽화는 당시 인간 또한 생존욕 이상의 창작욕을 가졌다는 분명한 증거였다. 그것도 그저 무언가를 주물럭거린 데서 그치지 않고, 구체적 묘사에 명암법 등 비교적 수준 높은 기법까지 구사했다는 걸 짐작하게 하는 결과물이었다. 얼마의 시간이 걸렸든 결과적으로 이런 대작(大作·blockbuster)을 만들었다는 건, 이 무리가 생각보다는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는 데 대한 방증도 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른 곳도 아닌 동굴 안쪽, 다른 것도 아닌 들소 같은 네발짐승을 그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답을 고민하다보면 이들의 그 시절 생활 방식도 추측할 수 있었다.
먼저 하필 동굴 깊숙한 곳에 그린 이유. 확실한 건 당시 이들이 단순히 보여주기 위한 예술 아닌 '숨기고 보존하기 위한' 예술도 할 수 있었다는 걸 보여준다. 그 시절 인류도 무언가에 대해 우리만 알아야 한다는 폐쇄성, 이를 엄한 이들에게 빼앗기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 등 감정과 관습의 공유까지 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다음 통통한 동물을 잔뜩 그린 이유. 이들이 나름대로 풍요를 누렸다고 한들, 그 시절 매일 매 순간을 위험 없이 산 건 아닐 터였다. 특히나 변화무쌍한 기후, 이에 따라 언제 고갈될지 알 수 없는 먹잇감 등은 마음을 늘 시리게 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선 모두가 한 대상에 기대 불안감을 떨치려는 마음이 들기 쉽다. 이는 주술이 생기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주술이란 신비한 힘이나 초자연적 존재의 기운을 빌려 인간의 길흉화복을 해결하고자 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이 그림 또한 들소나 멧돼지 등 사냥감을 더 많이 잡게 해달라고 비는, 일종의 종교물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우가우가’ 원시인이 아니었던 그들
정리하자면 이렇다.
당시 한 무리가 ▷비교적 여유로운 어느 날 ▷동굴 깊숙한 곳에 은밀히 모여 ▷한 목표를 놓고 ▷창작물 앞에서 기도를 올릴 수 있었다는 것. 이 벽화는 원시인이 이 정도의 입체적 사고와 고차원적 활동까지 할 수 있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했다.
즉, 사우투올라(정확히는 그의 딸)가 찾은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구석기 시대 인류가 익히 알려진대로 단순 무식의 '우가우가' 생명체가 아니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사우투올라의 이번 발견은, 어떤 면에서는 지구는 평평했을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깬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업적도 떠올리게 했다.
“아마추어 화가가 황당한 벽화를 그렸다” 무슨 일?
사우투올라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보자마자 이러한 역사적 가치에 대한 견적을 뽑을 수 있었다.
서 있던 그 자리에서 바로 역사적 의미를 조목조목 짚을 수는 당연히 없었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도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게 여태껏 찾은 뼛조각, 심지어 만국 박람회에서 본 유물과도 비교가 안 될 만큼의 가치를 품는다는 걸.
사우투올라는 벅찬 마음을 안고 이날 성과를 글로 썼다.
1년 후인 1880년에는 이를 엮어 논문 《산탄데르 지역에서 발견된 선사시대 유물에 대한 소론(小論)》을 발표했다. 이제 그의 엄청난 업적이 전 세계로 뻗어나갈 터였다. 역시나 파장이 일었다. 그런데, 그가 바란 방향과는 전혀 다른 쪽으로 파도가 몰아쳤다. 사우투올라는 학계에서 엄청나게 공격을 받아야 했다. 사우투올라는 생각도 못한 의외의 지점이 도마 위로 올랐다.
수만년 전 인간이 그림을 그려도 너무 잘 그렸다는 게 문제였다. 학자들은 그들이 이렇게나 완성도 높은 벽화를 남겼다는 걸 믿지 못했다. 백번 양보해 그랬다고 해도, 매머드가 뛰놀았을 가능성이 큰 그 시대 예술품이 지금껏 남아있다는 점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명성에 눈먼 후안무치한 아마추어 고고학자가 무명 화가를 시켜 이 황당한 그림을 그렸다."
사우투올라는 졸지에 이 따위 누명도 썼다. 그는 사기죄로 고소를 당하는 수모도 겪었다. 사우투올라는 맹세코 거짓말은 없었고, 산사태의 일종으로 동굴 입구가 막혔던 덕에 보존이 됐을 것이라고 받아쳤다. 그는 평생 억울함을 호소하고 다녔지만, 이 해명을 귀담아듣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둘러싼 분위기가 또 뒤집힌 건 첫 발견 후 10년도 훌쩍 흐른 후였다.
지질 연구와 발굴 기술 발전 등에 힘입어 학계는 1895년 라뮤수 동굴, 1896년 페농페 동굴 등 유럽 곳곳에서 새로운 동굴을 찾을 수 있었다. 긴 세월간 잊혔던 이런 동굴 안에서도 옛 시대 벽화가 줄줄이 등장했다. 이 모든 걸 조작으로 볼 수는 없었다.
'어쩌면….'
발견 사례가 늘수록 학자들은 울분에 찬 표정의 사우투올라를 곱씹을 수밖에 없었다. 결백한 사람을 바보로 몬 실수를 범했을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게 됐다. 한때 사우투올라 비난에 앞장선 고고학자 에밀 카르타이야크가 뒤늦게나마 진상규명에 나섰다. 카르타이야크는 1902년에 알타미라 동굴을 찾았다. 그는 편견과 고정관념을 떨친 채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요목조목 뜯어봤다. 카르타이야크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진이 난 듯 다리가 후들거렸다. "제발 제 말을 믿으세요. 진짜라니까요!" 가슴을 치며 소리치던 사우투올라가 거듭 떠올랐다.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신 후 이를 길게 내뱉었다. "아…. 내가 실수를 했었다." 나지막한 혼잣말과 함께.
진실의 승리…“알타미라 후 예술은 퇴보했다”
사우투올라의 주장이 다 맞았다.
학자들이 탄소연대 측정법 등으로 〈알타미라 동굴 벽화〉의 제작 시기를 따져본 결과, 실제로 구석기 후기 시대가 맞다는 결과를 낼 수 있었다. 카르타이야크는 동굴의 진실을 알아차린 그해 《알타미라 동굴, 의심하는 자의 고해(告解)》라는 글을 썼다. 그는 서문에 "20년 전 저지른 불의를 정의로 되돌리고 싶다"라는 문장을 남겼다. 오만함에 젖어 한 억울한 사내의 말을 끝까지 무시했다는 걸 공식적으로 고백했다. 카르타이야크는 이제라도 학계를 대표해 사우투올라에게 용서를 구하려고 했다. 그는 사우투올라의 딸을 만나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정작 사우투올라는 만나지 못했다. 화병에 걸렸던 걸까. 어떠한 명예도 누리지 못한 그는, 한참 전인 1888년에 세상을 떠난 상태였다.
그 후 1940년에는 프랑스 도르도뉴 지방 라스코(Lascaux) 동굴에서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쌍벽을 이룰 완성도를 갖춘 옛 시대의 〈라스코 동굴 벽화〉가 모습을 보였다.
네 명의 10대 소년이 우연히 찾은 곳으로 알려진 이곳에선 빨간색과 노란색, 검은색 등으로 그린 말과 들소 등 100여점 동물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있었다. 큰 동물은 5.5m, 작은 것 또한 상당수는 1m 안팎의 크기였다. 노루, 코뿔소, 곰, 새는 물론 상상의 동물로 예상되는 존재와 집 모양의 그림까지 있었다. 다양성과 완성도, 보존 상태로만 보면 그간 발견한 모든 옛 벽화보다 낫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사 결과, 이 그림도 부인할 수 없는 구석기 후기 시대의 성과물로 판명됐다. 이 또한 그 시절 그들이 위대한 예술 활동을 했다는 데 대한 결정적 증거로 떠올랐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가 진짜라는 걸 자연스럽게 또다시 증명한 셈이었다.
1985년, 유네스코(UNESCO)는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렸다.
인류 최초의 예술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근현대 인류가 찾은 최초의 '가장 오래된 예술품'임은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구석기 시대의 이름 모를 예술가들의 혼, 이를 알리려는 사우투올라의 의지는 이처럼 늦게나마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알타미라 이후 모든 예술은 퇴보했다." 20세기 가장 유명한 화가 파블로 피카소는 알타미라 동굴을 찾은 후 이런 찬사를 남겼다고 한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알타미라는 문자 그대로 옮기면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전망'이라는 뜻을 갖는다. 〈알타미라 동굴 벽화〉는 가치를 인정받은 직후부터 인파가 몰리는 등 유명세를 치렀다. 1977년부터는 관람을 전면 중단했는데, 이는 관광객이 내뿜은 이산화탄소로 작품 일부가 훼손된 데 따른 것이다. 1982년부터는 제한된 인원만 입장권을 받을 수 있었다. 이마저도 2~3년을 기다려야 할 만큼 대기 기간이 길었다. 이에 당국은 2001년에 알타미라 동굴의 복제 시설을 만들었다. 이 안에선 초정밀 레이저 측정을 동원해 그대로 재현한 〈알타미라 동굴 벽화〉를 볼 수 있다.
라스코 동굴 벽화〈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비슷하게 기원전 1만7000~1만5000년경 사이 그려진 벽화로 추정되고 있다. 라스코 동굴 또한 일반인의 입장이 허용된 후 인기몰이를 했다. 이에 훼손 위험성이 커지자 1963년, 당국은 폐쇄를 결정했다. 당국은 다만 관람객을 위해 1983년에 동굴 일부 구조를 그대로 만든 '라스코 2', 2012년에는 순회 전시용으로 동굴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재현한 '라스코 3', 2017년에는 동굴 구조를 총체적으로 재현한 '라스코 4'를 세워 선보였다. 라스코 동굴은 197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상당수의 미술 역사서가 〈알타미라 동굴 벽화〉와 〈라스코 동굴 벽화〉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점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참고 자료〉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아르놀트 하우저, 창비
세상의 모든 지식, 김흥식, 서해문집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세계 역사 유적 1001, 리처드 카벤디쉬 등, 마로니에북스
미술사 연대기, 이언 자체크 등, 마로니에북스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본 뒤 관련 책과 영화를 모두 찾아봤습니다. 잘 그린 건 알겠는데 이 그림이 왜 유명한지 궁금했습니다. 그림 한 장에 얽힌 이야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습니다. 즐거웠습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조금은 달라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나누고자 글을 씁니다. 미술사에서 가장 논란이 된 작품, 그래서 가장 혁신적인 작품, 결국에는 가장 유명해진 작품들을 함께 살펴봅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