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노동’ 단정보다는… ‘대화 촉구’ 수준 권고 가능성 높아
‘자발적 사직’ 막는 측면에서 ‘강제노동 금지 조항’ 위반 전망도
편집자주 취재부터 뉴스까지, 그 사이(메타·μετa) 행간을 다시 씁니다.
[헤럴드경제=이용경 기자]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가 정부의 업무개시명령이 국제노동기구(ILO) 협약상 ‘강제노동 금지’ 조항에 위반된다고 주장하며 ILO에 긴급 개입을 요청했다. 노동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향후 ILO가 이를 ‘강제노동’으로 단정하기보다는 정부와 의료계가 조속히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수준에서 ‘추상적 권고’ 의견을 낼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대전협은 지난 13일 저녁 “ILO에 긴급 개입 요청 서한을 발송했다”며 “ILO는 제29호 강제 또는 의무 노동에 관한 협약 조항을 통해 비자발적으로 제공한 모든 형태의 강제 또는 의무 노동을 금지하고 있고, 한국 국회는 2021년 2월 해당 협약을 비준한 바 있다”고 밝혔다.
이어 “정부는 2000명 의대 증원 등 정책을 일방적으로 발표했고, 이로 인해 대다수의 전공의가 사직서를 제출하고 병원을 떠나는 상황에 이르렀다”며 “정부는 사직서 수리 금지 명령, 집단 연가 사용 불허 및 필수의료 유지명령, 집단행동 및 집단행동 교사 금지 명령, 업무개시명령 등 행정 명령을 남발하고, 행정 처분을 위한 의사 면허 정지 사전통지서를 발송하며 형사 고발을 예고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또 “2022년 실시한 전공의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전공의들의 주당 평균 근로시간은 77.7시간이고 전체 응답자의 25%는 100시간 이상 근무하고 있다고 응답했다”며 “전공의 근로시간을 80시간으로 제한하는 ‘전공의법’이 2015년 통과됐지만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지적했다.
박단 대전협 비상대책위원장은 “의료법 제59조의 업무개시명령은 ILO 강제 노동 금지 조항에 위배된다”며 “정부는 업무개시명령 등 공권력을 통해 전공의를 겁박하고 노동을 강요하는 행위를 즉시 중단해야 하고, 헌법과 국제 기준을 위배해 기본권을 탄압하는 의료법 제59조를 폐지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다만 정부는 전공의들에 대한 업무개시명령 등 조치가 ILO 제29호 협약 예외 조항에 해당한다는 입장이다. 의료공백 상황이 국민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는 중대한 상황에 해당한다는 이유에서다.
이에 노동계 전문가들 사이에선 향후 ILO가 정부의 업무개시명령 등을 두고 “강제노동으로 단정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우세하다. 한국 정부와 의료계에 대화에 나설 것을 권고하는 수준에 그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박지순 고려대 노동대학원장은 “보건의료 분야는 국민들의 건강과 직결되기 때문에 공공성이 강조될 수밖에 없는 업종”이라며 “공익적 목적에서 어떠한 개별적인 휴업에 대해서는 업무 강제를 할 수 없겠지만, 이번처럼 집단적으로 사직하는 사태에 대해서는 ILO도 공익 보호를 위해 정부의 개입이 용인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다만 “의사들의 파업이 통상적인 파업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알 것”이라며 “협약 위반 여부를 단정적으로 판단내릴 것 같지는 않고, 정부와 의료계의 대화를 권고하는 정도로 의견을 낼 것 같다”고 덧붙였다.
송강직 동아대 로스쿨 교수도 “강제노동은 누군가의 의사에 반해 강제적으로 일하게 하는 것이 전형적인 것”이라며 “전공의들의 경우 일률적으로 이 같은 강제노동 금지 원칙에 반한다고 보기는 ILO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이정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는 강제노동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낼 것이라는 전망을 내놨다. 이 교수는 “정부의 입장은 이해되지만, 전쟁과 같은 긴급하고 위급한 사태가 아닌 이상 전공의들의 자발적인 사직 의사를 막는 것은 강제노동 금지 조항상 위반 여지가 있다”며 “ILO와 같은 객관적인 기관에서 볼 때 시정을 권고하는 정도의 의견을 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2022년 화물연대 파업과는 다소 다른 측면이 있다”며 “화물연대는 그 당시 근로조건 인상 등을 요구했지만, 이번 경우처럼 전공의들은 정부 정책에 반대해 아예 직을 떠나겠다는 것이어서 동일선상에서 볼 수가 없고, 집단적 파업이나 집단적 노무 제공 거부와는 결을 달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보건복지부 서면 점검을 통해 확인한 100개 주요 수련병원의 이탈 전공의 수는 지난 8일 오전 11시 기준으로 1만1994명, 이탈률은 92.9%를 기록했다. 지난 8일까지 업무개시명령을 위반한 전공의 4944명에게 사전 통지서가 발송됐고, 나머지 대상자들에게도 순차적으로 사전 통지 절차가 진행중이다.
ILO 파견 근무 경험이 있는 김용문 덴톤스리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우선 ILO에서 이번 사안을 얼마나 적극적으로 들여다 볼지는 불확실하다”고 밝혔다.
다만 “검토를 하게 된다면, 전공의들과 정부의 대립 상황이 ILO 29호 협약의 강제노동 금지 조항에서의 예외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관해 해석상 다툼이 주로 논의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는 “정부의 전공의들에 대한 업무개시명령이 의사에 반하는 강제노동에 해당하더라도 협약이 제시한 예외사유에 해당한다고 해석할 가능성도 있다”며 “과거 화물연대 사태와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