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신동윤 기자] #. 서울 강동구에 사는 직장인 A(37) 씨는 최근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랐다. 최근 떠들썩한 홍콩 주가연계증권(ELS) 사태의 당사자가 바로 퇴직 후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이 사실을 말하기 민망했던 A 씨의 모친은 며느리에게 홍콩 ELS 상품에 투자했던 2000만원 중 40%가 넘는 원금을 손실했다는 사실을 고민 상담처럼 털어놓았던 것이다. A 씨는 “과거에도 ELS에 투자해 5~7% 정도의 수익을 항상 올려왔던 어머니가 비슷한 수익률을 예측하며 홍콩 ELS 투자에도 나섰던 것으로 보인다”면서 “1000만원 정도의 손실액에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어머니를 보면, 수천만원에서 억대에 이르는 거액의 퇴직금을 투자했다 큰 손실을 본 분들의 심경은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걱정된다”고 말했다.
‘홍콩 ELS 사태’로 거액의 손실을 면치 못하게 된 투자자들이 어느 때보다 힘든 설 연휴를 보내고 있다. 특히, 기초자산으로 하는 홍콩H지수가 계속 약세를 면치 못하면서 투자자들의 원금 손실 규모도 더 증가할 수 있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홍콩 ELS 총 판매 잔액은 19조3000억원에 이른다. 이중 80%인 15조4000억원의 만기는 올해 도래하게 된다. 1분기 3조9000원, 2분기 6조3000억원 등 상반기에만 10조2000억원이 집중돼 있다.
홍콩 ELS가 문제로 떠오른 이유는 바로 홍콩H지수가 상품 판매 당시인 2021년 상반기 고점 대비 반토막이 나면서 연초부터 50%가 넘는 만기 손실이 불어나는 중이기 때문이다. 지난 2021년 1~1월 당시 1만1000~1만2000선을 넘어섰던 홍콩H지수는 지난 5일 종가 기준 5217.36까지 떨어졌다. 지난달 22일에는 종가 기준 5001.95까지 하락하면서 5000선이 붕괴될 위험에 빠지기도 했다.
홍콩H지수는 홍콩증시에 상장된 중국기업 중 50개 종목을 추려 산출한다. 홍콩H지수를 기초로 한 ELS는 통상 3년 뒤 만기가 됐을 때 가입 당시보다 지수가 70% 아래로 떨어질 경우 하락률만큼 손실을 보는 구조다.
올 들어 지난 2일까지 만기가 돌아온 홍콩 ELS 상품의 평균 손실률은 53.1%에 이른다. 지난달 하순 만기를 맞은 일부 상품의 손실률은 -58.2%로 거의 60%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홍콩 ELS에 따른 전체 손실액이 5~6조원에서 많으면 7조원 안팎까지 불어날 수도 있다고 우려 중이다.
더 안타까운 점은 홍콩 ELS 가입자의 10명 중 4명이 60대 이상의 고령층이라는 점이다.
국회 정무위 윤주경 국민의힘 의원이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11월 말까지 5대 은행(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NH농협)에서 홍콩H지수를 기초자산으로 하는 ELS 관련 상품에 가입한 사람 중 60대가 29.5%, 70대 이상이 11.1%에 달했다.
이런 상황과 대조적으로 5대 은행은 지난 2021~2023년 홍콩H지수 상품을 포함해 전체 ELS 판매를 통해 수수료 등으로 6800억원을 벌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기도 했다.
은행이나 증권사 등에서 홍콩 ELS 상품을 판매하는 과정에서 해당사 직원이 “손실이 나지 않는 상품”이라며 추천하고 투자 성향까지 임의로 바꿨다는 주장이 나오면서 금융 당국발(發) 홍콩H지수 ELS 불완전판매 정황에 대한 선제적 자율배상 목소리도 커지는 상황이다.
이복현 금감원장은 지난 5일 ‘2024년 금감원 업무계획 브리핑’에서 은행·증권사를 향해 홍콩 ELS에 대한 자율배상을 직접 촉구하기도 했다. 금융사 창구 직원들이 소비자 자산 규모·목적에 적합하지 않은 방향으로 상품을 판매하는 등 불완전판매 소지가 여럿 있다는 점에서다. 또 분쟁조정 절차가 장기간 진행되면 노후자금을 당장 사용해야 하는 소비자 입장에서 유동성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는 부분도 고려했다.
이 원장은 홍콩 ELS에 대해 최소 원금의 50% 비율을 선지급하고 나머지는 본격적인 분쟁조정을 통해 사후정산하는 방안을 권고하고 있다. 이는 은행이 애초에 검토했던 20~40%의 차등 배상비율보다 높은 수준이다. 지난 2019년 파생결합펀드(DLF) 사태 때 은행들은 투자 손실액의 40~80% 배상액을 결정한 바 있다.
금융사들은 분쟁조정 기준안이 마련되면 면밀히 검토하겠다는 원론적 입장이나, 내부적으론 고심에 휩싸였다고 알려졌다. 사적화해 등을 통해 선제적으로 자율배상을 진행하면 향후 제재 심의 단계에서 제재 수위가 낮아질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한편, 최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리스크 등으로 분위기가 좋지 못한 증권가엔 홍콩H지수 ELS 사태가 또 다른 부담 요인이란 분석도 나온다.
나이스신용평가는 지난 5일 보고서를 통해 “주요 은행의 ELS 판매 축소 조치는 증권사의 파생결합증권 관련 수익과 자금 조달원 다변화 측면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며 “다만 그 수준은 제한적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9월 말 기준 증권사가 발행한 파생결합증권 잔액 중 ELS가 차지하는 비중은 40.3%로 가장 컸다. 이 중에서도 은행 신탁에서 인수한 규모는 25조2000억원으로 전체 ELS 중 절반 이상인 62.8%였다.